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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사소한 시비, 치열한 전투 등이 일상사인 개미들에 비하면 인간은 정말 조용하고 평화로운 존재다. 개미들 간의 전쟁은 봄과 여름에 미국 동부 지역 도시와 마을 대부분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길가나 들판에서 서로 물고 뒹구는 짙은 갈색을 띤 개미 무리들을 찾아보라. 그 전투원들은 주름개미들로서 일반 도로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 집단 구성원이다. 수천 마리의 개체들이 싸움을 벌이기라도 하면 몇 제곱미터 넓이의 풀숲이 전쟁터로 변한다.
이러저러한 형태의 공격 행동이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타고난 충동을 배출하는 수단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확실한 것은 그러한 충동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증거로 동물들의 공격 행동을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다양하고 단계적인 공격 행동을 구사할 수 있고, 공격성이 그들 사회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각 개체들은 이따금씩 장난 삼아 한바탕 싸움을 하거나 사소한 적대감 정도만을 드러내면서 자손을 낳아 기르며 사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다. 잦은 감정 표현이나 격앙된 싸움은 사회적 스트레스에 대한 적응적 반응이다. 특정한 동물은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호피족 사회나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 같은 몇몇 인간 문명에서 공격적인 상호작용이 매우 적게 나타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요컨대 동물 행동의 비교 연구를 통해 얻은 증거들이 인류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형태의 공격성, 비린내 나는 사건, 폭력적인 스포츠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는 없다. pp1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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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우리 안에 존재해 온 원시적인 유전자들은 미래에 훨씬 더 많은 문화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아직은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인간 본성이 좀 더 이타주의와 사회 정의를 많이 포함하는 방향으로 적응해 갈 수도 있다고 믿는다. 유전적 편향은 사라질 수도 있고, 갈망도 다른 방향으로 돌려질 수 있으며, 윤리는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사회 계약을 만드는 인간의 천재성은 더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 계속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이 무한정 융통성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사회 생물학은 계속 탐구될 것이고, 이를 통해 얻은 지식은 정신의 진화사를 추적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 현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을 이끌어 갈 최고의 안내자인 이상, 우리는 결코 역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p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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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무차원적이고 비이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온갖 생물종들의 본성이 존재하는 영역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인간종 하나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인간종 역시 거기에 속한 일부인데도 말이다. 인간 중심적이 된다는 것은 인간 행동의 한계, 인간 행동의 바탕이 되는 행물학적 과정의 의미, 장기간에 걸친 유전적 진화의 보다 깊은 의미를 모두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종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의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좀 더 포괄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p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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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산물이다. 나는 이 말을 문제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생물학이 하나의 과학으로서 발전을 거듭하는 한 사회적 행동과 제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분명 바뀔 것이다. 개성과 인지 변이의 대부분이 유전된 것이며, 유전과 환경 모두에 기인하는 변화조차 양적인 면에서 볼 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변화들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인지 발달 자체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유전적으로 정해진 규칙들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기 대문이다. 비행기를 만드는 유전자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물론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쟁, 종족의 융화, 교역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비행기를 만든다. 이러한 행위들은 명백히 자신의 생물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문화는 진화 생물학의 중요한 원리를 따른다. 대부분의 변화는 생물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발생한다. pp135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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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화는 유전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가 혼재된 독특한 이중 트랙 시스템이다. 유전적인 변화는 인간 두뇌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200만 년 전 호모 하빌리스의 시대로부터 초기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는 50만 년 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인간의 대뇌피질 체적은 3.2배나 증가했다. 또한 뇌의 언어 영역과 후두에서는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일어났다. 문화적인 변화의 속도는 이보다 훨씬 빠르다. 그러나 문화적인 변화는 뇌의 감각 기관의 특성에 의해 제한되고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된다. 인간의 사회 생물학 연구가 어려운 주된 이유는 생물학자와 사회학자 간에 존재하는 절차와 언어의 차이에 있지 않다. 진정한 어려움은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이 상호작용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학습과 문화를 통해 전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감각, 기억, 의사 결정에 관여하는 인지 과정의 독특한 속성들이 문화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문화는 궁극적으로 개인들의 정신 발달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정신적 발달의 속성은 행동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질서인 후성 법칙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동물들과 비교할 때 인간은 냄새와 맛에 비해 시청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냄새와 맛보다는 시각과 청각을 표현하는 어휘들이 훨씬 많은 것은 이러한 생물학적 속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전 세계 언어의 3분의 2에서 4분의 3가량의 단어들이 시각과 청각에 관련된 반면, 맛과 냄새에 관련된 단어들은 10분의 1정도이거나 그 이하에 불과하다.
유전적 진화는 이렇게 문화적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 거꾸로 문화적 진화는 유전자들이 자연 선택을 통해 검증받는 환경을 창조함으로써 생물학적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 유전자와 문화는 사실상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한쪽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들은 다른 쪽에도 변화를 일으키면서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를 이끈다. p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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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간은 이 극단적인 두 종들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사회적 행동은 유전-문화 전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수많은 가능성이 학습될 수 있고 벼화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감각 기관과 두뇌에 남아 있는 생물학적 속성들은 특정한 선택을 선호하게 하거나 최소한 다른 것들보다 더 쉽게 학습할 수 있게 한다. 근친상간의 기피와 같은 어떤 언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러한 선택들이 매우 광범위하고 동등하게 일어난다.
정신 발달에 관한 이러한 개념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전체 사회들 혹은 특정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문화 유전자의 선택과 거기서 비롯되는 변이에 관한 것이다. 문화의 진화가 보여주는 몇몇 인상적인 현상들은 유전적 진화와 나란한 평행선을 그린다. 돌연변이의 방식으로 집단 내에 나타나는 혁신들은 유전자처럼 확산되고, 자연 선택과 무작위적 부동을 닮은 과정들을 통해 촉진되거나 단절된다. 이들 생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실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은 적어도 전통적인 유전적 진화를 조절하는 상호작용만큼이나 복잡하고 방대한 양의 분석을 필요로 한다. 사회의 특수한 환경, 주변 문화와의 접촉 정도, 역사적 우연,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전적 변이 등이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다. pp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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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생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도 아주 깊이. 문화의 진화는 정신 발달의 후성 법칙들을 통해 경로화되며 그러한 법칙들은 유전적으로 정해져 있다. 우리는 자연 선택을 거쳐 유전자 발현 빈도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유전적 규칙에서부터 문화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인과 관계의 고리를 그려볼 수 있다. 유전자와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이 알려지면서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는 이러한 고리의 부분들과 분석적 모형들에서 연구된 몇몇 핵심적인 단계들을 통해 입증되어 왔다. 이러한 탐색들을 더 심도 있게 진행하는 것은 앞으로의 문화 연구에 큰 성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p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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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행되고 있는 환경파괴 가운데 가장 해로운 부분이 생물 다양성의 감소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립 유전자들로부터 종에 이르기까지 생명체의 다양성은 한 번 없어지면 다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야생 생태계의 다양성이 유지되는 한 생물권은 회복될 수 있고, 다가올 세대들은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반면에 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는 양만큼 다가올 모든 세대의 인류는 그만큼 더 빈곤해질 것이다. (...)산호초, 하천, 호수 지중해성 기후의 비옥한 대지에 사는 다양한 생물종들과 그 풍요로운 서식처도 유사한 위기에 처해 있다. 한 지역에서 이러한 서식처들의 마지막 잔재가 파괴될 때, 에를 들면 산맥이 개간되고 남은 마지막 산등성이, 또는 하류의 댐이 넘쳐 흐르고 그 마지막 급류가 지나간 곳에서 종들은 집단으로 절멸된다. 처음 서식지의 90퍼센트가 감소하면 생물 종수의 반이 감소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인 처음 서식지의 10퍼센트가 감소하면 나머지 절반의 생물종이 사라진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서식지 변질 속도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면, 다가오는 30년 안에 인간의 행동으로 인해서 지구상 생물종의 20퍼센트 또는 그 이상이 사라지거나 초기 멸종에 회부될 것이라는 것은 주관적이지만 매우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다. 선사시대 이래로 오늘날까지 인류는 이미 생물종의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를 멸종시켜 왔다. 예를 들어 섬 지역에서 일어난 불균형적인 멸종까지 고려해서 추산하면, 새들의 종수는 1만 2000종에서 9000종으로 25퍼센트 감소했다. 몸집이 큰 포유류나 조류와 같은 대형 분류군에 속하는 동물들의 대부분이 수렵 채집자들의 집단 이주와 수천 년 전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의 인구 증가로 인해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멸종되어 왔다. 식물과 무척추동물의 멸종 수는 훨씬 더 적은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자연 상태에 대해 추정하기에는 고고학적 매장물과 화석 매장물들이 너무 적다. 선사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그리고 다음 수십 년 동안 이어질 인간의 강력한 영향력은 6500만 년 전에 있었던 중생대가 끝난 이래로 또 한 번의 대멸종을 만드는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인류 출현 전에 존재했던 전 세계 생물종의 10퍼센트가 이미 사라졌고, 단호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20퍼센트가 아주 빠르게 사라질 운명이라고 생각해보자. 어떤 조처가 취해지든 상관없이 잃어버린 작은 부분은 인간에게 의미가 있는 그 어떤 시기에도 진화에 의해 복구될 수 없다. 과거 5억 5000만 년 동안 있었던 다섯 번의 대변동들을 각각 살펴보면, 그 생명을 회복하는 데 약 1000만 년의 자연적인 진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 인간이 단 한 세대에 해치우는 일은 다가오는 모든 시기에 살아갈 우리 후손들을 피폐하게 하는 것이다. pp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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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생물종들을 그들의 잠재적인 물질적 가치로만 판단한다면 그들에게 가격이 매겨질 것이고, 그 가격이 적당할 때는 부를 만드는 다른 자원들과 거래되다가 끝내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인류에게 미칠 특정 종의 궁극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 생물종이 즉각적인 이득을 주든 그렇지 않든 간에, 다음 세기의 연구에서 무슨 이익을 줄 것인지, 어떤 과학적 지식을 제공할 것인지, 또는 인간 정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측정할 수 있는 아무 기준도 없다.결국 나는 대단히 설명하기 힘든 '정신'에 관한 논쟁에까지 왔고, 그 정신과 관련해서 생명 애착과 환경 윤리를 연결하는 지점에 와 있다. 우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도덕적 사고의 커다란 철학적 구분은 '다른 생물종들은 존재에 대한 본유적인 권리를 가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수학 법칙과도 같이 도덕적 가치가 인간 밖에 존재하든 정신이 그러한 것처럼 도덕성 또한 자연 선택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서 진화된 특유의 구조이든 간에 생물의 존재에 대한 본유적 권리에 대한 물음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pp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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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주사위는 지구의 형편을 나쁘게 하는 쪽으로 굴러왔다.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좀 더 상냥한 동물이 아닌 육식 영장류가 큰 발전을 이룬 것은 생태계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다. 우리 종은 파괴적 충동을 부추기는 유전적 형질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종족 안에서 뭉치기를 좋아하고, 공격적으로 세력권을 방어하며, 최소한의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려 하고, 이기적인 성격과 성적 욕구에 의해 행동한다. 가족과 종족의 수준을 넘어선 협동은 어려운 일이다.더욱 심각한 것은 육식에 대한 우리의 선호이다. 이것은 태양 에너지를 낮은 효율로 이용하도록 만든다. 식물 조직에서 광합성에 의해 고정된 태양 에너지의 10퍼센트 가량이 초식동물들의 조직 안에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다. 다시 그 양의 10퍼센트가 초식동물을 먹는 육식동물에게 도달한다. 마찬가지로 그 중 10퍼센트만이 포식동물들에게 전달된다. 녹색 생산 과정에서 고정된 에너지는 습지 식물에서 메뚜기로, 딱새에서 매에 이르는 습지의 먹이 사슬을 거치면서 1000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한 마리의 매를 지탱하는 데 엄청난 양의 초본이 소모된다. 매처럼 고기를 먹는 인간도 언제나 식물로부터 두서너 단계 위 먹이 사슬의 끝에 위치하는 육식동물이다. 예를 들어 닭을 먹으면 두 단계, 참치를 먹으면 네 단계를 거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회가 채식주의자의 식단을 고집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있는 세계의 많은 부분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다. 우리는 농작물과 목재를 소비하고, 건물과 길을 만들고, 황폐한 지역을 넓히면서 자연 식생에 고정된 태양 에너지의 20~40퍼센트를 착복하고 있다. 더 많은 음식을 찾기 위해 냉혹하게도 호수와 강, 그리고 점점 더 많은 해양에서 동물들의 삶을 축소시키고 있다. 곳곳에서 공기와 물, 심지어 지하수까지 오염시키고 생물종을 멸절시키고 있다.한마디로 인간은 환경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잘못된 생물종의 지능이 생물권에 대한 치명적인 조합으로 미리 정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지능은 그 자신을 멸절시킨다는 것이 어쩌면 진화의 법칙일 수도 있다. pp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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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답은 단호하다. 인간은 자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말 그대로 자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위협할 만한 수준의 환경적 재앙을 피하기에 충분할 만큼 영리하며 그럴 만한 시간도 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방향을 재설정하도록 요구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기술적 문제들이 있고, 우리 자신을 그저 하나의 생물종으로 보도록 하는 데에는 윤리적 문제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언젠가는 여유롭게 '환경의 세기'라고 부를 수 있을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 말이다. 1992년 6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국제 환경 개발 회의는 무려 120개국 이상의 국가수반들이 참석했다. 이것은 전례 없는 대규모의 모임이었고, 이 모임을 통해 환경 문제가 정치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 요컨대, 의지가 있기에 희망이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간에 인류의 대부분이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무서운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절대 빈곤을 겪는 사람들의 수는 지난 20년 동안 10억에 이르도록 증가했으며, 10년이 지나면 또 10억 명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개발도상국이 어떤 발전을 이루든 그 발전이 평균적인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더라도, 그것은 지속적인 빠른 인구 증가와 계속되는 숲과 토양의 파괴로 위협받을 것이다. pp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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