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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야기/르완다

식민 통치가 낳은 분열의 씨앗, 르완다 제노사이드 기념관에서

by 릴라~ 2019. 5. 7.

 

 

1994년을 르완다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때 르완다는 이 지구별 안의 어떤 장소가 아니었다고. 르완다는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였다고.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에서 본 짧은 영상에서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증언을 하고 있었다. 1994년은 약 80만의 주민이 희생된 르완다 제노사이드가 일어난 해다.

 

 

천 개의 언덕을 지닌 이 아름다운 나라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이 사건의 배경은 르완다가 겪은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 국가는 독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패하면서 르완다는 이후 벨기에의 점령지로 바뀐다. 그리고 콩고에서 고무나무 재배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던 벨기에는 여기서도 잔인한 통치방식을 택한다. 종족을 차별하는 식민지 분열정책이다.

 

 

당시 르완다 인구는 후투족이 83%, 투치족이 15% 정도로 구성되었다. 벨기에는 소수파인 투치족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어 르완다를 대신 통치하기 시작한다. 사실 후투족과 투치족은 외모가 좀 다르긴 하지만(투치족이 키가 크고 피부가 덜 검다고 한다) 오랜 세월 같이 살아왔고 서로 결혼도 하기에 외모로는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양반, 상민 정도의 개념으로 재산을 많이 모으면 후투족이 투치족이 될 수도 있는 등 완전히 분리된 집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벨기에가 부족이 표시된 신분증을 발행하면서 후투족과 투치족은 두 개의 또렷한 계급으로 구분된다. 벨기에가 이 두 부족을 구분하는 방식은 코의 길이를 잰다거나 하는 식으로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렇게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장벽이 생기기 시작한다. 

 

 

르완다가 1959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해서 르완다왕국이 세워지지만 식민지 시절 지배계급인 투치족이 여전히 통치하자 후투족의 봉기가 일어나 르완다왕국은 무너진다. 1962년 공화국이 세워지는데 초대 대통령은 후투족 출신 카리반다였다. 이때 식민지 시절 싹튼 갈등과 분열이 폭발한다. 정부가 투치족을 탄압하면서 투치족에 대한 공격, 추방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르완다에 있던 벨기에 군대는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삼십만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탈출한다. 1964년 1차 제노사이드이다.

 

 

1973년 쿠데타로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집권한다. 그는 전임자보다 온건했지만 여전히 투치족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지자 1979년 해외에 있던 투치족들이 폴 가가메(현 대통령)를 중심으로 르완다민족통일동맹(RANU)을 만든다. 이는 나중에 르완다애국전선(RPF)이 되고, 1980년대 후반 커피값 폭락으로 르완다 경제가 파탄난 틈을 타서 국내 및 해외 투치족들이 1990년 내전을 일으킨다. 이때 후투족 기득권층은 투치족을 몰살해야 한다면서 후투족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1991년 헌법에서 다당제를 허용하고 1993년 아루샤 조약을 맺음으로써 내전은 종식된다. 하지만 정부 내에서는 투치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파와 권력을 투치족과 나누어야한다는 온건파가 계속 대립하고 강경파들은 후투족에게 무기를 지급한다. 

 

 

1994년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브룬디 대통령과 함께 평화협상을 논의하러 가다가 암살당한다. 그들이 탄 비행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는데 누가 발사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 하루 뒤에 온건파 총리까지 암살당하면서 르완다는 대혼란에 빠진다. 이에 후투족 강경파들이 힘을 얻으면서 르완다는 다시 내분에 휩싸이고 약 3달간 8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진다. 2차 제노사이드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은 대부분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였다 한다. 

 

 

이후 르완다 참상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후투족 강경파들이 고립되어갔고 폴 카가메가 이끄는 르완다애국전선이 키갈리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후투족은 보복이 두려워 피난을 떠났지만 새 정부가 온건파 중심으로 내각을 꾸리고 보복을 중지하자 다시 르완다로 돌아오게 된다. 1994년 이후 지금까지 투치족 출신 폴 카가메가 집권하고 있다. 

 

 

르완다 내전 후 25년이 지난 지금, 르완다 시내는 평온하다. 폴 가가메 집권 후 르완다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치안이 가장 안정된 나라이다. 르완다는 일종의 경찰국가라고 볼 수 있다. 안으로 잠재된 갈등을 현재 강한 공권력으로 눌러놓은 상태다. 키갈리 시내에선 총을 든 군인의 모습을 보게 되고, 호텔이나 도서관 같은 곳에도 짐을 검색한다. 부족간 갈등을 유발하는 어떤 말도 금지되어 있다. 혹자는 이를 언론탄압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서로간의 끔찍한 학살을 겪은 이들에게 분쟁의 소지가 있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올 가능성을 막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민족을 가르는 가장 분명한 기준은 언어이다. 언어가 다르면 다른 문화와 역사, 정체성을 가졌다 볼 수 있다. 그런데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은 하나의 언어, 키냐르완다어를 사용한다. 투치족은 멀리 이집트에서 이주해온 종족인데 오랜 세월 이곳에 살면서 토착화된 것이다.

 

 

그런데 1994년, 이곳은 지옥이 되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이는 인종갈등이 아니라 식민지가 잉태한 계급갈등 쪽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갈등을 통합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오히려 권력 유지를 위해 상대에 대한 증오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식민지 시절의 차별과 억압을 경험했으니 거기에서 빚어진 증오와 공포는 대중들에게 쉽게 먹혀 들어갔을 것이다. 결국 프로파간다가 원인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지 않는 면도 있다. 어린이까지 닥치는 대로 죽인 그 ‘광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떤 원한이 첩첩이 쌓여 있기에 이웃을, 친구를,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녀를, 자녀가 보는 앞에서 부모를 죽였을까. 사람들이 분노에 사로잡힐 만한 이유가 그들 역사 안에 켜켜이 쌓여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속사정을 모르는 이방인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아프리카는 권위주의가 강했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명령에 사람들이 쉽게 복종하는 분위기도 제노사이드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식민지에서 독립할 무렵 백만이던 인구가 칠백만 이상으로 불어나면서 재산과 영토에 대한 갈등도 있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르완다 뿐 아니라 식민지에서 독립한 모든 나라가 비슷한 혼란을 겪었다. 우리 또한 제노사이드에서 예외가 아니다. 제주도민 3만여 명이 희생된 1948년 제주 4.3사건은 미군정의 폭압적인 정치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으며 6.25전쟁은 삼백만 이상이 희생된 내전이었다. 당시 한국 인구가 삼천만이었으니 한 마디로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다. 6.25전쟁 중에 이승만이 자행한 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만 해도 삼십만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르완다에서는 독립 후 식민지 지배 계층인 투치족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고 이에 반발하여 투치족이 내전을 일으키자 평화협정이 맺어지지만 누군가에 의해 후투족 지도자가 암살되면서 다시 후투족이 투치족을 공격하여 제노사이드가 일어난다. 하지만 한국은 식민지 지배계층이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이념대립을 이용하고, 피지배계층이었던 동족을 학살했으니 어찌 보면 한국의 상황이 더 비극적일 수도 있다. 1994년이 그들에게 지옥이었다면, 한반도에서 4.3사건, 6.25전쟁과 보도연맹 사건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같은 언어, 같은 역사를 공유한 한 민족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다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이란 관념이 매우 근대적인 관념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민족이란 관념은 고대나 중세에는 없었다. 이민족에 대한 인식은 있었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이 노비를 같은 민족 공동체 구성원이라 여겼다고 보긴 어렵다. 인종(race)과 구분되는 민족(nation)이라는 관념은 유럽에서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사상과 더불어 나타난다. 프랑스는 대혁명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데, 국민이 정치적 주권을 갖고 참여하는 일종의 공동체가 민족이며, 그 민족이 국가를 이루어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는 관념을 갖게 된다. 이때의 민족은 혈통이라기보다는 주권 공동체의 개념이 강한 편이다. 반면에 독일은 각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있다 보니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혈통 중심의 게르만 민족주의가 싹텄다고 한다.

 

 

아무튼 ‘민족’은 국민국가를 성립시킨 동력으로 의미가 있으며, 이는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주의처럼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제국주의와 양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아가기도 하고, ‘민족자결주의’처럼 식민지 약소민족 독립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스스로 민족이라는 관념을 구성하여 그 민족 구성원을 중심으로 국가를 세운 서구 국가들, 즉 혁명 등을 통해 구성원 내부의 갈등을 해결한 경험이 있는 그들과 달리 식민지를 겪은 많은 나라들은 제대로 된 민족주의를 해볼 시간도 역사적 경험도 없었다는 것이다. 식민지가 가중시킨 계급간 분열은 식민지 구성원들이 민족이라는 하나의 테두리로 통합하는 것을 막고 그들 내부에서 갈가리 찢어놓아 부족 내부의 작은 차이조차 용납할 수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 주권 공동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아프리카의 경우 부족주의로 후퇴한 셈이다.

 

 

여기에는 유럽의 개입도 한 몫 했다. 1960년대 콩고의 정치 지도자 루뭄바가 축출된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은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자를 싫어했다. 당시 콩고에는 세 명 정도의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는데, 루뭄바가 나라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고 콩고의 막대한 자원을 국유화하고자 했다면, 다른 지도자들은 자기 부족의 이익만 챙겼다. 식민 지배는 끝났으나 아프리카의 자원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었던 유럽 각국은 아프리카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도자 대신 자기들과 자원에 대한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세력을 막후에서 지원했다. 당시는 냉전 시대여서 서구 국가들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인물이라면 무조건 제거하려 했고 그것이 아프리카의 정치적 발전을 더욱 가로막았다.

 

 

르완다 정부가 벨기에 식민지의 영향으로 공용어로 쓰던 불어를 영어로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점도 프랑스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할 때 후투족에 많은 무기를 지원했다.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내전에는 쿠데타군에 무기를 지원한 프랑스 등이 있다. 그래서 르완다의 현 대통령 폴 카가메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불어의 영향력을 지키고 싶었다면 사람을 죽이는 일에 협조하지 말았어야죠.”

 

 

한국을 남북한으로 분열시킨 건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충돌이었고, 그것에 맞서서 민족을 통합할 만한 역량을 당시 우리는 갖고 있지 못했다. 민족주의가 약했다고 볼 수 있다. 625라는 엄청난 내전을 겪었지만 우리 안에서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 정리하지 못했고 그런 의미에서 ‘휴전’이란 말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이 결국 민족의 분열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남북한의 통합을 위해서는 어쩌면 한국은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건강한 민족주의가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혈통이 아니라 ‘주권 공동체’로서의 민족, 봉건사회(계급사회)의 질서를 극복하는 개념으로서의 민족이다. 

 

 

르완다가 분열을 극복한 과정은 시사점이 많다. 먼저 학살을 종식시킨 폴 카가메의 르완다애국전선은 질서가 있는 군대였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예외적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르완다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후투족 부대와 달리 약탈을 행하지 않았으며 어떤 종류의 보복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치안을 안정시켰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였다. 식민지 지배국들은 오히려 후투족에게 무기를 주는 등 내분을 조장했다. 그래서 카가메의 성공은 아프리카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다음 문제는 학살자들에 대한 처리였다. 이웃을 죽인 그 많은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카가메는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한다. 학살 명령을 내린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단순히 가담한 농민들을 구분한다. 전자는 법적 처벌을 받게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가차차’라는 전통적인 마을 재판에서 용서를 구하면 피해자에게 재산으로 보상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등 가벼운 처결을 내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웃을 죽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카가메는 '좋은 교육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라고 대답한다. 

 

 

가차차는 르완다 전역에서 열렸고 나중에는 흐지부지된 점도 있지만 제노사이드의 상처를 극복한 방식으로서 다른 사회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카가메가 말했듯이 그것은 사건을 그저 용서하는 것도, 단순히 덮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모든 가해자들로부터 사죄와 보상을 이끌어내는 방식이었다. 그는 이웃을 죽인 사람도 교육을 통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천했다. 르완다는 국민소득이 천 불이 안 되는 국가지만,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입학률은 100퍼센트지만 졸업률은 60퍼센트 정도라 한다), 의료에 대한 접근성도 괜찮은 편이다. 정부의 부패 지수 역시 우리와 비슷한 순위로 낮다. 앞으로 갈 길은 멀지만, 카가메 정부가 지난 이십여 년간 이룩한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이후 대처도 용감하다. 쫒겨난 후투족 학살자들이 이웃나라 콩고 국경지대에서 머물면서 또다른 내전의 불씨를 키우고  같은 후투족인 콩고 정부가 그들을 지원하자 카가메는 콩고와의 전쟁을 택하고 결국 콩고 정부가 실각한다. 이때 서방세계의 많은 원조 물자가 난민촌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후투족 학살자들의 배를 불리는데 이용되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유엔 등 누구도 손 쓸 수 없었던 난민촌을 해산한 것도 카가메의 군대였다. 이때 민간인이 최대 8000명 가량 희생되는데, 카가메는 이를 솔직히 시인했다. 그리고 인명 피해가 난 건 명백히 잘못된 일이었지만, 난민촌을 내버려두었더라면 수만 명이 희생되었을 거라 답한다. (르완다 상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운데,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내일 우리가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장기집권 중이지만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어서 단순히 독재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아 보인다. 아프리카의 정치적 안정은 그만큼 힘든 과제이기 때문에 다른 사회와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다만 대통령제의 단점이 그렇듯이 다음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국가치고는 자원이 별로 없는 나라여서 현재는 외국에 이권을 팔아넘기는 등의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 장기 집권으로 인한 부패가 발생할 수도 있다. 정부 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 일은 그러한 역사적 경험이 축적되지 않은 국가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과제이다.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분단 상황에서 비롯되는 위협과 불안이 정쟁에 이용되거나 사회 여러 면을 흔들고 있다. 1940~50년대, '빨갱이' 타령으로 수십만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역사를 생각하면, 그 단어는 금지해야 하는데, 아직도 정쟁에 이용된다. 독일에서 나치 찬양이 금지인 것처럼, 분열을 조장하고 이웃을 죽이는 데 이용되는 언어들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제노사이드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명확히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들다. 과거의 망령이 70년째 지겹게 반복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남북한 통합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외세에 휩쓸렸던 과거를 극복하고 자기 공동체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갈까. 분열을 극복하고 남북한의 화해를 이루어내어 새로운 시민 공동체를 건설하는 역사의 주인이 될까. 아니면 다시금 분열과 내전을 겪으며 외부의 힘에 휩쓸려가게 될까. 작은 나라이자 최빈국인 르완다가 제노사이드를 극복한 과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다만 비전이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품은 꿈의 크기일 것이라는 생각이 먼 아프리카 땅에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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