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이 있는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지역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럽이 아니라 '유라시아'다. 유라시아는 지리적인 맥락에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연해주 지역은 유럽과 아시아 문화가 혼재되어 있으므로, 문화적인 맥락에서도 유라시아였다.
사학자 이이화 선생에 따르면, 연해주 일대는 원래 이르쿠츠크에서 하바롭스크 이북까지는 코사크족 거주지였고, 하바롭스크 아래 아무르강에서 두만강 상류까지는 말갈족(나나이족) 거주지였다고 한다. 아무르강 아래 남쪽 영역을 8세기 무렵엔 거의 발해가 차지했다. 고구려는 만주 일대를 거의 차지했지만 아무르강으로는 진출하지 못했고 블라디보스톡 남쪽 동해안까지만 진출했다.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뒤이어 말갈이 10세기 초에 종족 이름을 여진으로 바꾸어 만주와 연해주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게 연해주는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몽골의 원나라를 거쳐 1860년까지 청나라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블라디보스톡의 인구 5/4가 중국인과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이었다 한다. 블라디보스톡에는 지금도 여러 인종이 섞여 살지만, 눈으로 봐서는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아르세니예프 향토박물관이 유일하리라 생각한다. 연해주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평생 연해주를 탐험했던 탐험가이지 지리학자였던 아르세니예프의 이름을 따왔다. 이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과 러시아의 동방 진출과정을 전시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제일 흥미로운 건 역시 발해 유물이다. 러시아어 안내판 아래 '발해 왕국의 자취를 찾아서'라고 한글로 씌어 있어 더욱 반갑다.
박물관 1층의 석물은 딱 봐도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드는데 이 일대에서 발굴된 발해 유물이다. 사찰 지붕이 제일 눈에 띄는데 배경지식이 없어도 우리 것이란 느낌이 든다. 놀이 때 썼던 발해의 공기돌은 지금과 모양이 같아 재미있었다. 그밖에 박물관에는 금나라 왕자였던 애스쿠이의 무덤 유물이 특징적이고 다른 왕조의 유물도 꽤 있다. 설명이 대부분 러시아어이고 영어 설명이 소략해서 아쉬웠다.
아르세니예프 향토박물관은 발해 이전 청동기 시대의 세형청동검도 소장하고 있다. 그간 압록강 이남에서만 발견되었던 한국식 청동검이 연해주에서도 발견되어 학계에 놀라움을 주었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수입되었는지 한반도의 장인이 이곳으로 건너가 만들었는지는 아직 논란 중이라 한다.
향토박물관의 유물이 한때 동아시아를 호령했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간직했던 발해를 실감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백인들의 땅에서 처음 만난 8세기 조상의 흔적이 먼 곳에서 옛 친구를 찾은 듯 반가움과 친근감을 주었다. 신화적으로만 느껴지던 우리 고대사에 새로운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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