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대학원을 10년 다녔다. 직장생활 하며 다니다 보니 중간에 휴학도 하고, 논문 주제 찾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려 석사 마치고 박사학위 받기까지 딱 10년이 걸렸다. 이래저래 교육학 관련 책은 꽤 구경한 셈이다. 물론 학자 한 명 한 명 다 두께가 만만치 않아 깊이 있게 보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잘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다양한 책을 구경한 기회는 된 것 같다.
그 중에서 교육적으로 가장 영감을 받은 사람을 꼽으라만 들라면 존 듀이다. 듀이는 내가 관심 있게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기껏해야 강의 한두 개 듣고, 그의 책을 읽은 게 전부지만, 교육에 관한 기본적 관점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동과 교육과정(The child and the curriculum)'은 50쪽 정도 밖에 안 되는 짧은 연설문이지만, 교육이라는 활동의 본질을 이만큼 간명하게 잘 설명해준 글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어 번역판(박철홍 역)은 '경험과 교육'과 같이 묶어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예전에도 한 번 포스팅했는데, 개학을 앞두고 이 두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교과교육 전공자에게 교과교육 전반을 관통하는 또렷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초등교육은 어린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그래도 학생에게 배움의 무게 중심을 두는 것 같다. 학생의 성장이라는 교육의 기본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중등교육(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학생의 배움과 성장보다 교과 지식 그 자체를 더 떠받들고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중등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 입장에서 교과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도 교육적 시각이 부족한 초임 때는 학생보다 교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교과교육의 틀을 짜는 사람들 역시 학생의 배움에 대한 고려 없이 교육과정에 각 교과목의 지식 영역을 다 담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교육적 관점과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교과교육의 목적은 각 교과가 속해 있는 지식/학문의 목적과는 다르다. 학생들이 배우는 각 교과목은 학문적 지식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교과목은 학생의 지적/정서적 성장에 도움이 되기 위해 존재하며 그런 역할을 수행하도록 재구성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활동에 앞서 학생과 교육과정이라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듀이의 저작은 이 둘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검토하면서 교육과정과 학생이 만나는 교육활동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므로 교과교육 전공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텍스트다.
1. 아동(학습자)과 교육과정의 관계
듀이는 먼저 아동과 교육과정의 차이점을 지적한다. 첫째, 경험의 범위다. 아동의 경험은 개인적 관심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활세계에 한정되어 있다. 즉각적이고 편협하며 현재 위주의 경험으로 시공간적으로 범위가 좁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교과는 더 넓은 시공간, 즉 인류가 겪은 과거, 현재, 미래의 경험을 모두 다루고 있다. 둘째, 아동의 경험이 자신의 흥미와 감정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심리적인 경험으로서 자신과 분리되지 않은 통일성 있는 세계라면, 학문적 탐구의 결과인 교과는 영역별로 세분화되어 있고 논리로 짜여 있고 개인적 경험을 넘어선 보편적인 세계로서 논리로 짜여 있고 영역별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런데 듀이는 아동과 교육과정, 이 둘이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상의 차이를 지닌다고 본다. 교과 또한 처음에는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했으며 그것이 탐구되는 과정에서 논리화, 체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과는 인류 전체의 경험이 조직적으로 축적된 것으로서 교과의 논리 또한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의 관점과 전망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것이므로 아동의 경험과 완전히 대립하지 않는다. 경험의 수준과 차원을 놓고 볼 때, 아동의 경험은 학습 초기에 볼 수 있는 형태이고 교과는 학습의 최종 단계, 즉 완성된 결과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동과 교육과정은 경험의 양 극단으로서 아동의 경험이 개인적 경험이라면 교과가 담고 있는 지식은 인류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왜 교과가 필요한가. 학생을 그냥 내버려두어서 저절로 사고가 촉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동이 지니고 있는 흥미는 다음 경험에 대한 추진력으로 작용하는데, 이 흥미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아동의 경험은 새로운 만남을 통해 자극되고 성장한다. 각자의 경험이 탐험가의 메모라면 교과는 이를 집대성한 일종의 지도이다. 지도는 직접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자원을 활용할지에 대한 지침이 된다. 즉 학습자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면 좋은지 발달 가능성에 대한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동의 의미 있는 성장을 위해 교과라는 지도를 활용해야 한다. 아동에게 교과가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기 위해 교사가 해야 할 임무가 '교과의 심리화'이다.
2. 교과의 심리화(경험화)
듀이는 아동과 교과(교육과정)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의 수준과 질의 면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동이 교과에 흥미 있게 다가가기 위해서 교사는 교과의 딱딱한 논리 체계에 숨어 있는 인류의 경험, 흥미, 호기심, 이 모든 생생한 감각을 복원해야 한다. 이렇게 교과를 심리화할 때만 아동이 학습동기를 가진다고 듀이는 보았다. 아동이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교과를 생생한 경험적 현실로 파악할 때 호기심과 사고를 촉발되기 때문이다. 교과가 담고 있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교육내용의 가치는 학습자에게 각자의 경험이나 사건의 진실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수단과 방법이 되는 데 있다.
교과의 심리화(경험화)는 단순히 아동에 맞게 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딱딱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겉에 달콤한 사탕을 입히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교육방법의 문제도 아니다. 교과를 가르칠 때,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교과 지식이 아니라 아동의 현재 경험이라는 점이다. 아동의 현재 경험에서 출발하여 교과라는 지도를 활용하여 아동의 경험의 질과 폭을 더 넓히는 것이 교육활동이다. 이는 아동이 자신이 지닌 경험이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교과의 심리화는 아동의 발달 단계에 맞게 경험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아동이 교과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교사가 교과지식 전반을 재구성하고 재조직하는 일이다. 이때 교과지식(교육과정)은 비로소 학습자의 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교과의 심리화는 학생들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과 그 자체와의 만남에서, 교과의 본질적 내용으로부터 학습동기를 갖게 하는 일이다.
듀이는 '흥미'가 앞으로의 경험에 대한 태도라고 보았다. 아동이 무언가를 하고 싶은 에너지, 추진력이 흥미이다. 아동이 즉각적인 충동과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지적 도전에 관심을 갖도록 교과에 대한 '흥미'를 길러주는 일이 교육의 중요한 과업이다. 듀이는 교과가 심리화될 때 아동이 교과에 진정한 '흥미'를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3. 학자와 교사의 차이
그래서 학자와 교사는 역할이 다르다. 학자는 학문적 지식을 탐구하면 되지만 교사는 학문적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이 학생의 경험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학생이 교육적 흥미를 가지도록 교과내용을 재구성하여 제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교과의 심리화(경험화)'이다. 교육활동에서 아동과 교육과정은 양대 축으로서 그 출발점은 언제나 아동이며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방향이 교육과정이다. 듀이는 말한다. 둘 다 중요하지만 둘 중 더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아동이라고. 당연한 말이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과정도 아동에게 스며들지 못하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4. 교육적 경험의 두 가지 원리
듀이의 <경험과 교육>은 경험이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교육적 경험'의 성격과 중요성을 부각한다. 듀이에 따르면 경험은 두 가지 원리를 지닌다. 계속성의 원리와 상호작용의 원리다. 후자부터 살펴보자. 상호작용의 원리란 경험은 항상 두 가지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외부와의 만남, 즉 외적이고 객관적인 요소와 경험하는 이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요소가 함께 상호작용하는 상황이 경험이다.
전통적 교육은 경험의 외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을 중시했지만 실제 겪는 경험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는 내적 측면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즉 전통적 교육은 외적 조건(지식 등)에만 강조를 두고 상호작용의 원리를 무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아동의 내적 조건(주관적 심리)에만 강조를 두는 새교육도 상호작용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교육에서 경험의 상호작용을 고려한다는 것은 교과 지식은 아동에 맞게 심리화되어야 하며, 아동의 주관성과 자유 또한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계속성의 원리는 모든 경험은 앞으로 올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경험은 당사자에게 모종의 습관 즉 태도를 형성하게 하고 이는 앞으로의 경험에도 영향을 미친다. 당사자가 경험한 세계는 앞으로의 경험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말하기를 배운 학생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듯이 어떤 경험은 다음 환경과 상황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작용한다. 즉 경험은 아동에게 일종의 자기 세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앞으로 구성할 환경과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듀이는 어떤 경험이 교육적인가를 판단하려면 경험의 이 두 가지 원리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교육적 경험은 객관적인 세계(지식)와 아동의 주관적인 내면이 상호작용하면서 아동의 성장을 이끌어야 하고[상호작용의 원리], 이 경험은 앞으로 아동이 계속해서 배움을 선택할 수 있도록 '좋은' 경험이어야 한다[계속성의 원리]. 따라서 아동이 배움을 통해서 어떤 습관과 태도를 형성하고 있는가를 예의주시하는 것의 교사의 주된 임무다. 교사는 아동이 지금 형성하는 태도나 습관이 아동의 계속적 성장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은 전통적인 지식 전달보다 훨씬 어렵다.
개인 밖에 상호작용할 무언가가 없다면 경험은 일어날 수 없다. 교사는 환경적 조건들이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환경적 요소가 경험의 성장에 기여하는가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동이 가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자연적, 사회적 환경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교사의 전문성이다. 아동의 현재 경험을 고려하되 아동의 즉각적인 기분이나 감정에 맞추지 않고 아동의 경험이 성장할 수 있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을 선정하고 조직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듀이는 학습자의 구체적인 능력이나 필요를 무시하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교육적 가치는 없다고 보았다. 교육적 경험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계속해서 공부하려는 열망을 갖게 하는 일이다.
듀이에 따르면 교육에서 미래만을 준비하는 태도는 어리석다. 미래에 대한 준비가 중요한 목적이 될 때 현재 경험이 가지는 성장의 가능성, 현재 경험을 활용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 발달을 이룩할 가능성이 무시되고, 막연한 미래가 현재를 잠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형국이다. 우리는 지금 현재에 살고 있으며, 경험의 계속성의 원리에 따르면 현재의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지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현재 경험들로부터 최대한의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우리는 미래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 교사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현재 경험이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를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다. 성장으로서의 교육은 항상 현재의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며, 현재의 경험에서 풍부한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다.
종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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