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사적, 정치적 이슈에 의견 표명을 잘 하지 않는다. 젊을 때는 분노도 하고 목소리도 높였지만, 지나고 보니 언론이 생산해낸 이슈에 낚인 거였다. 누군가가 선점한 아젠다 세팅에 놀아나는 것. 문제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건강한 방향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호도하기만 하는 일회성 이슈에 눈길을 주는 게 인생 낭비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들었다.
그래서 우리집엔 TV도 없다. 포털에 뜨는 기사도 제목만 보지 클릭해서 잘 읽지 않는다. 제목만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알 수 있기에. 클릭해서 읽어봤자 쓰레기에 눈 버리는 것 뿐.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파고 심리적 건강을 해치는 선정적인 문구가 대부분이다. 이런 말들 속에서는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다. 세상사 돌아가는 것은 페북을 며칠에 한 번 정도 훑어보면서 파악한다. 사람들이 공유한 기사 중에 의미 있는 기사다 싶으면 읽어보는 걸로 만족한다.
그동안 특정 정당에 표를 주었지만, 이념 때문이 아니다. 같은 당이라 해도 온갖 사람 다 모인 정당이, 그들의 면면 모두가 내 마음에 들 리 없다. 마음에 드는 정치인이 있다고 해서 그의 모든 정책에 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공익'을 좀 더 고려할 만한 책임감 있는 엘리트가 더 많이 모여있다고 생각되는 곳에 표를 주었을 뿐이다. 투표에서 내가 우선하는 가치는 '공익'이며, 그래서 조금 더 이타적인, 그러나 그 이타성이 이념이나 주장으로만 표방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 및 타협과 협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행해낼 능력이 조금 더 많다고 생각되는 곳에 투표해왔다. 그 외엔 관심 끄고 산 지 꽤 되었다.
그런데 이번 주말만큼은 마음이 매우 복잡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어난 사건 자체가 엄청난 비극인데다가 그 비극에 대한 사람들의 상반된 반응들이 나를 더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가 생각한 '상식'이 상식이 아니었나 싶어 놀랐고, 세대 차이도 많이 느꼈다.
내 나이쯤 되어보면 안다. 사람이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뒤로 한 채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젊을 때 몇 년은 이상을 추구할 수 있지만, 50대, 60대가 되어서도 그 젊은 날의 이상과 가치를 꾸준히 간직하고 현실에서 펼치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기껏 사십대 중반을 통과하는데도 많은 것에 실망했고, 내가 예전에 사랑한 많은 가치들이 벌써 내 마음속에서 빛을 잃은 게 많다.
젊을 때뿐 아니라 50대, 60대까지 자기 삶을 관통해서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밀고나가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내 주위 사람들보다는 위인전기에서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위인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인품와 소신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재능의 문제다. 그들은 신념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현실 속에서 계속 펼쳐내며 세상을 변화시킬 재능과 실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고인은 내게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그의 지지자도 아니고, 당원도 아니고 또 그분에 대해 특별히 개인적 관심을 가진 일이 없어서 그의 인생 역정에 대해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그분이 시장이 되기 훨씬 전, 참여연대를 처음 만들 때 했던 인터뷰를 비롯하여 정말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은 여러 삶의 행로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일중독이라 불릴 만큼 그런 일들을 정말 좋아했고 사고가 유연하고 아이디어가 넘쳤다는 것도. 그에 더하여 자기 집을 선뜻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자신은 평생 집 없이 살만큼 사욕이 없었다는 것도.
성실하고 유능한 관료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길을 앞장서서 열어가기란 훨씬 어려운 일이다. 가치와 신념, 재능, 리더십, 헌신, 친교의 능력, 아이디어, 이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한다. 그는 그런 드문 재능을 갖추었기에 검사직을 던지고 스스로 선택한 시민운동에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길을 새롭게 개척했고 시장이라는 행정가로 변신해서도 꽤 괜찮은 행보를 보였다. 그가 시장으로 추진한 정책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찬반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공익을 우선했고, 그 연배 그 지위의 사람들이 지닐 법한 권위의식 없이 소탈한 성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고 약자를 성심껏 배려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누군가에 대한 미화가 아니라 그저 팩트일 뿐이다.
고 노회찬 의원이 눈군가로부터 받은 몇 천만 원 때문에 돌아가셨을 때 아무도 그분의 비리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분이 평생 살아온 삶의 궤적 때문이었다. 고 박원순 시장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사건의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이 사건 앞에 놓인 수많은 시간, 몇 년이 아니라 60년의 시간이 크고 무거운 증거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 깊이 애도한다. 젊은 애들이야 인생을 모르니, 이타적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모르니, 그를 그저 성범죄자로 비난한다 쳐도, 살아온 세월이 있는 이들이 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평생 청렴하고 소탈하게 살아온, 대선후보이기도 했던 유력 정치인이 그렇게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사라졌을 때, 그의 죽음의 원인이 미투가 아니라 정치적인 덫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건 고소인(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아니라, 권력이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드는 합리적 의심이다. 무고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노무현 대통령, 노회찬 의원, 박원순 시장까지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그리고 그토록 빨리, 마치 박시장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언론들이 쏟아내는 말을 보면 더욱 의심스럽다. 정치적 반대편에서는 박원순 시장 사라지면 좋아할 자가 한두 명이 아닐 텐데.
당연한 말이지만, 약자 혹은 여성이 항상 옳지도 않고 절대선도 아니다. 약자도 자신에게 칼이 쥐어지면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다. 만약 고소인(피해자)이 위력에 의해 고통받은 피해자라 하더라도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고소 행위가 한 사람을 날려버릴 힘이 있다는 것을. 고소인은 어린 소녀가 아니라 의사결정권이 있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고소인은 물론 보호받아야 하고 그의 선택도 존중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소인이 아니라 유족이다.
고소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박시장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고소 그 자체보다는 언론과 검찰의 예상되는 행보가 이닐까 싶다. 몇 년이 될 지 알 수 없는 기간 동안, 없는 사실도 지어내며 고인과 가족을 먼지까지 탈탈 털어 괴롭힌다면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노무현 대통령 때 언론은 거짓말로 그를 살해했다. 죽을 때까지 말로 찔렀다. 조국 사태 때 그것은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대중의 광기가 아니라 언론의 광기가 문제다. 역사적 사건에서 늘 보듯 대중의 여론을 증폭시키고 선동하는 것은 언제나 언론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언론이 날려버릴 수 있는 사람은 권력자가 아니다. 언론사 사주만 되어도 진짜 증거가 확실한 성추문에도 건재하므로.)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언론은 실종 상태인데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숱한 오보를 쏟아내더니, 이후 내는 기사들도 가관이다. 어떤 교훈에도 통찰에도 진실에도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선동하는 내용들. 대체 누가 이를 기획했을까. 왜 이게 아직도 정리가 안 되는가. 방송통신위원회는 뭘 하는가. 언론의 칼날이 다음에 또 누구를 겨냥할지도 모르는데, 왜 집권당이 되어도 말로 사람을 난도질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 말이 세상을 병들게 하도록 내버려두는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한 나라의 장수(박시장)가 죽었는데 조문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만 이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는 알겠다. 중년이 되면서 왜 이렇게 삶이 무의미하고 헛헛한가를. 몇 년간 이유를 찾아왔는데, 이제 알겠다. 그건 중년의 보편적 특징이 아니라 내 재능과 아이디어의 빈곤 때문임을. 내 그릇의 한계임을. 지금까지 해온 것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하며 계속 추진해나갈 만한 에너지와 재능이 빈곤해서 그런 것임을.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시점에서 재화를 얻는 일에 남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더욱 애도한다. 64세에 이를 때까지 청년이었던, 펼쳐내고 실현할 많은 것이 넘쳐났던 한 삶이 끝난 것을. 어쩌면 불행은 그가 아니라 우리 몫일지도 모른다. 그의 자리는 누군가 대신하겠지만, 그가 다 펼치지 못한 계획들은 우리의 손실이므로. 그는 희로애락의 저편으로 떠났지만, 우리는 한동안 여기 남아 있을 것이기에.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위해 해오신 많은 일들을 기억하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으며, 천국에서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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