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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일상을 쓴다는 것

by 릴라~ 2020. 9. 3.

간밤에 바람소리에 잠을 깼다. 몇 시인지는 모르겠으나 태풍이 아마 그때 지나갔나보다. 깜박 잊고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어뒀더니 잠을 깨울 정도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컸다. 일어나 창문을 닫고 다시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니 파란 하늘이 보인다. 태풍이 지나간 거다. 아직 휙휙 바람 소리는 더러 났지만, 군데군데 트인 파란 하늘 아래, 건너편 산들의 선명한 초롯빛에 감동했다. 먼지가 다 씻겨나가고 더없이 청명한 날씨였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출근했지만, 공기는 얘전과 달랐다. 후덥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린 시절, 가을 운동회 할 때 같이 피부에 맑게 감기는 공기의 감촉. 그리고, 저녁에 자연과학고를 한 바퀴 돌며 산책할 때, 확실히 알았다. 아, 오늘부터 가을이구나. 얼마 전에도 저녁엔 더러 선선한 적이 있었으나 그래도 습기 많은 여름이었다. 태풍이 여름 기운을 다 휩쓸고 지나갔나보다. 길던 여름이 끝나고 드디어 2020년의 가을이 왔다. 

 

시지의 자연과학고는 신도시 아파트단지 속의 작은 시골이다. 가을 저녁의 산책길, 학교 안의 물 담긴 논둑길을 따라 걸으며 이제 알이 여물기 시작하는 벼와 붉은 기운 감도는 서쪽 하늘과 어찌 된 영문인지 벌써 꽃이 져버린 코스모스와 연못의 오리 세 마리에 눈길을 주다가 살짝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움보다는 쓸쓸함으로 다가오는 가을. 시간이 훅 가버린 듯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한 계절 한 계절을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운 나이가 되었다. 

 

이 여름의 끝에 나는 처음으로 일상을 좀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를 한 시간이 이제 십 년이 훌쩍 넘었다. 2004년에 네이버에서 시작했다가 몇 년 뒤 티스토리로 이사왔다. 내 블로그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개인적 소회를 자유롭게 담아두는 공간이었다. 하루에 몇 개 쓸 때도 있고 몇 달간 아무 것도 안 쓸 때도 있고, 한동안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생각나면 또 들르는 그런 공간. 

 

대부분의 글이 책, 영화, 여행인 이유는, 그간 일상을 기록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꼈기 때문이다. 내게 새로운 영감을 주거나 의미와 감동을 주는 것들은 대부분 일상이 아니라 책이나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솔직히 나는 일상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일상이 흥미롭지도 않았고, 그래서 일상을 관찰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물리적 여행이건 정신적 여행이건 언제나 일상 너머의 다른 세계로 나를 초대하는 것들에 매혹되었다. 

 

그랬던 내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이제야 알게 된 게 있다. 지난 시간이 그냥 훅 지나가버린 것 같은,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의 이유를 알지 못해 그것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문득 발견한 사실 하나. 내가 일상에 대해 쓰지 않았구나. 내 두 발이 땅을 든든하게 딛지 않고 있었구나. 늘 어디론가 떠날 생각만 했구나. 떠남이 주는 해방감과 희열, 지적이고 감성적인 자극이 매우 크지만, 우리는 늘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일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무언가에 갇힌 듯이 참을 수 없이 답답해하며 탈출 생각만 했다.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나만의 행복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만약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일상에 대해 쓰려고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일상을 더 깊이 들여다보았을 것이고, 그것에 더 애정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을 붙잡는 행위이다. 내가 일상에 대해 쓰지 않은 만큼, 애정어린 눈길을 주지 않은 만큼, 내가 내 삶의 시간 대부분을 그냥 흘려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별 일 일어나지 않는 이 평범한 하루하루를 가능하면 자주 기록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발견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일상을 기록하는 일은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또다른 여행일지도 모른다. 이 여름의 끝에 세운 작은 계획이다.

 

 

2020. 9. 3. 목요일. 태풍 지나고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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