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부터 경산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지역 스토리텔링 부분에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총 11분을 인터뷰해서 글로 옮기는 작업인데 내가 쓴 글이라 기록으로 남겨둔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죠, 김00 씨
무남독녀 외딸
역전마을에서 삶의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새로운 터전을 일구신 분들이 있다. 마을 우물이 있는 김00 씨 댁 맞은편에 사시는 김00 씨가 그 주인공이다. 청도 동곡이 고향인 김00 씨는 자인 용성에 시집갔다가 경산 다른 동네를 거쳐 1987년에 역전마을에 정착하셨다. 경산 일대에 살아온 지도 40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는 여기가 고향 같아서 다른 데서는 못 산다고 하신다. 교통도 좋고, 만족하신단다.
김00 씨가 역전마을에 들어올 무렵은 남편 분의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였다. 두 칸짜리 작은 집을 당시 돈으로 250만 원 주고 샀다 하신다. 딸 둘, 아들 둘, 4남매가 지내기에는 비좁아서 정부 소유 공터에 방을 더 지어 지내기도 하셨단다. 2000년에 부근의 땅을 더 사서 지금 살고 계시는 큰 집을 지었다. 집 가까이에 단칸방이 연이어 붙어 있는 옛 골목길이 남아 있는데 공동화장실 터가 이 집 소유이다.
김00 씨는 무남독녀 외딸이다. 부친은 김순영 씨가 네 살 때 6.25전쟁에 참전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셨다. 그래서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색동옷을 입고 아버지 품에 안긴 것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얼굴은 도통 생각이 안 나신단다. 사진 한 장조차 없다. 열아홉에 시집 와서 불과 몇 년 후에 혼자가 되신 모친께서 신경질 난다고 사진을 다 없애버렸다고 한다. 얼마나 속이 상하면 그러셨을까. 이웃들의 이야기로는 부친은 키가 훤칠하고 눈이 컸다고 한다. 김00 씨의 모습에도 그런 면이 엿보인다.
널따란 거실이 있는 이 집을 지을 때 친정 모친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고 하신다. 좁은 집에서 4남매가 자라는 걸 안쓰러워 하셨던 모친은 딸이 집을 새로 짓는 것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김00 씨는 청도 골짜기에서 자라 어리숙한 편이었는데 자신을 놀리는 아이가 있으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가만 안 두어서 아무도 김00 씨를 괴롭히지 못했다고 한다. 농사 지으며 딸 하나를 금덩이처럼 키우셨던 모친은 60대에 세상을 떠나셨다. 김00 씨는 추수철이 되면 어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고 하신다. 매년 가을이면 친정에서 쌀이 오곤 했다. 지금까지 살아계셨으면 손자 재롱도 보고 좋은 시절을 맛보셨을 텐데, 생각할수록 아쉽고 허전하다고 하신다.
22년 6개월 일한 영남방직
1983년 6월 3일은 김00 씨가 진량에 있는 영남방직에 입사한 날이다.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하는 그날로부터 2006년까지 영남방직에서 22년 6개월을 근무하고 정년 퇴직하셨다. 20년 근속했다고 회사에서 금반지 닷 돈을 받기도 했는데, 그 금은 남편 분께서 IMF 때 금 모으기 할 때 다 내서 지금은 없다며 웃으신다.
김00 씨는 영남방직 식당에서 조장으로 일했다. 입사 당시는 직원이 1400명이나 되었다. 공장이 3교대로 돌아갈 만큼 일이 많았고 식당도 3교대로 매일 8시간을 근무했다. 일당 3천원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공장이 잘 돌아갈 때는 보너스를 600퍼센트나 받은 때도 있었다 한다.
방직회사에서 기억나는 일 중 하나는 임금인상 파업이다. 노조원들이 식당 직원은 집에서 자고 오라고 해서 김00 씨가 파업 현장을 지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장 들어오는 입구의 큰 도로에 남녀 직원들이 모두 누워서 데모하던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그러다가 몇 년 지나니 필리핀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 이듬해부터는 또 중국인들이 입사하는 등 공장도 많이 변해갔다고 한다.
식당에서 20년 넘게 많은 인원의 밥을 하다 보니 김00 씨는 작은 일은 눈에 안 찬다. 국도 큰솥에 끓여야 맛있지 작은 냄비는 옛날 맛이 안 난단다고 하신다. 경로당에 가면 아직도 나보고 국 끓이라고 한다면서 활짝 웃으신다.
애국가를 나만큼 잘 부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김00 씨 삶에서 국가유공자회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서울에 데모하러 수차례 오가기도 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김대중 정부 때 5.18 유공자를 비롯해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연금이 25만원 씩 지급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형식적이거나 명목상으로만 있던 연금이 김대중 정부 때부터 제대로 지급되었다 한다.
유공자회 활동을 하며 매년 현충일 등의 행사에 참여하다보니 김00 씨만큼 애국가를 자주 부른 분도 없을 것이다. 부친의 위패는 원래 청도에 있었는데 경산 성암산에 새로 위령탑과 현충공원이 생기면서 그곳으로 옮겨왔다. 가까운 곳에 부친을 모시게 되어 자주 가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하신다. 공원 야외에 참전 비석이 있고 실내에 있는 위패는 1월 1일에만 개방한다.
나이 들수록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더 깊어간다. 김00 씨는 봄에 파릇파릇 풀이 돋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어머니도 다시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신다. 아버지 얼굴을 꿈에서라도 한 번 보고 싶다고 노상 빌었더니 사오년 전인가 꿈에서 아버지를 만나뵌 일도 있다. 꿈속의 아버지는 얼굴 모습은 흐릿했지만 네이비색 바지에 반팔 셔츠를 깔끔하게 갖추어 입고 계셨다. “아버지 왜 이제 왔어요” 하며 김00 씨는 꿈에서 아버지를 꼭 끌어안고 우셨다고 한다.
일흔이 넘으셨는데도 어쩜 이렇게 젊은 사람처럼 이야기를 활기차고 재미나게 하시냐고 여쭤보니, 아니라며 손을 저으신다. 젊을 때는 아이들 도시락을 하루에 6개씩 싸면서 살아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별일 안 해도 여기저기 아프시단다. 이렇게 짧은 것이 인생이어서 자녀들에게 늘 당부하신단다. 어디 가도 남이 손가락질 안 할 만큼은 살아야 한다고. 우직한 신념으로 삶의 온갖 고비를 헤치며 올곧게 살아온 분들이 있는 곳, 그곳이 역전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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