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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역전마을 인터뷰 8 - 하도 몸서리나서 다 기억하지 (한국 근현대사를 모두 겪은 88세 할머니)

by 릴라~ 2020. 12. 5.

**10월부터 경산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지역 스토리텔링 부분에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총 11분을 인터뷰해서 글로 옮기는 작업인데 내가 쓴 글이라 기록으로 남겨둔다.

 

하도 몸서리나서 다 기억하지, 김00 씨

 

 

일제강점기의 기억

 

역전마을에서 한평생 살아온 김00 씨는 1933년생이다. 올해 88살로 열세 살 때 해방을 맞았다. 마을 어르신 중에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시대를 모두 기억하는 유일한 분이다. 태어난 곳은 역전마을 윗동네인 옥곡2동이고, 65년쯤 전에 역전마을에 오셨다. 목수였던 부친이 65년 전에 직접 지은 집에 지금까지 계속 사신다. 마당 한복판에는 이 집의 오랜 세월을 증명하는 우물이 있고, 뒷집은 100년 정도 되었다 한다.

 

역전마을은 원래 지반이 지금보다 낮았다. 일본인들이 지반공사를 해서 땅을 돋워서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옥곡2동에서 시작되어 굴다리에서 사정동 물과 합쳐져서 역전마을 쪽으로 흘러들던 도랑이 콘크리트로 덮어서 안 보이는 것도 달라진 풍경 중 하나다.

 

김00 씨에게 일제강점기는 ‘왜놈시대’다. 1940년대 역전마을에는 조선 사람보다 일본 사람이 더 많이 살았다고 기억하신다. 코발트광산 관련자들이 대부분으로 일본 군인도 살았고, 조선 사람은 일하는 사람이 섞여 사는 정도였단다. 성암산에도 일본 절이 있었고 지금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일본 신사와 공원이 있었다.

 

당시 딸은 가둬놓고 키우는 시대여서 광산은커녕 경산 장에도 못 가보셨다. 학교는 3학년까지 다녔다. 먹을 게 없어서 나물, 쑥을 뜯으러 산에 가고, 콩이파리 삶아먹고, 죽이나 겨우 끓여먹던 시절이었다. 겨울에는 날이 얼마나 추웠는지 온천지에 얼음이 꽝꽝 어는데 비누도 없고, 잿물로, 그것도 불을 때서 빨래했다. 옷은 홑껍데기에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니고, 지금 생각하면 걸뱅이도 그런 걸뱅이가 없었다고 회상하신다. 그때도 일본이 들여온 전기는 있었지만 보통 사람은 호롱불도 어쩌다가 켰다고 한다.

 

가난은 그렇다치고 ‘왜놈’들의 횡포도 말이 아니었다. 김00 씨는 왜놈이 있으면 뜯어먹었으면 싶다고 언성을 높이신다. 농사지은 건 물론이고 목화도 싹 다 가져갔고, 새끼 꼬고 가마니 찐 것, 놋그릇 같은 살림살이까지 죄다 빼앗겼다. 식량을 숨겨 놓았을까봐 ‘왜놈’들이 짚을 창으로 찔러보기도 하고, 뭔가가 나오면 “빠가야로 혼또노...” 하며 소리쳤다 하신다. 그놈들에게 안 빼앗기려고 모친은 밤에 몰래 베를 짰다. 징용 나간 집도 있고, 험한 데 끌려갈까봐 딸은 15살만 되면 시집보내려 한 시절이었다.

 

70년도 더 전의 일인데 기억력이 참 좋다고 말씀드리니, “하도 몸서리나서 그렇지”라고 답하신다. 왜놈들이 그렇게 고생시킨 걸 생각하면 지금도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단다. 그때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안 하면 무조건 잡아가서 징역을 살렸다고 강조하신다. 조선 사람은 다쳐도 병원에도 못 갔다. 모친은 10남매를 낳았고 다른 집도 엇비슷했는데, 병들고 해서 아이들을 반도 제대로 못 키웠다 한다. “세월을 잘못 타고났지” 하신다.

 

백자산은 일본인들이 나무를 많이 베어 숯을 구워 가져간 곳이다. 해방 뒤에 김계연 씨를 비롯한 주민들이 나무를 다 심었다. 그때 김00 씨는 어린 딸을 업고 나무를 심었는데, 그 딸이 지금 64살이다.

 

피란민이 들끓던 역전마을

 

1945년, 해방이 되고나서도 시절은 어수선했다. 김00 씨에게 해방 무렵의 일을 여쭤보니 ‘빨갱이’를 제일 먼저 떠올리신다. 나이가 어려 자신은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고 정말 빨간 줄 알았지 사상이 다른 줄도 몰랐다고 하신다. 데모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산에는 사상범들이 숨어 있었다. 성암산 이쪽저쪽에서 불이 번쩍하면 백자산에도 불이 번쩍하고, 그렇게 암호를 주고받았단다.

 

결국은 사람이 엄청나게 죽어나갔다. 트럭에 실어서 광산에 가서 다 죽였다고, 김계연 씨는 참으로 얄궂지도 않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하신다. 동네에도 잡혀간 사람이 있었는데, 집에 돈 많은 사람은 빼내기도 하고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단다.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빨갱이들한테 밥해줬다고 경찰에게 두드려 맞기도 했다. 김00 씨 형부가 면사무소에 다녔는데, 해방 뒤에도 왜놈 밑에서 뭐 했던 사람은 다 먹고 살았으나 다른 사람은 못 먹고 살았다고 하신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김00 씨는 18살이었다. 역전마을로도 피란민들이 마구 몰려왔다. 김천, 서울, 이북 오만 데서 다 내려왔는데, 대구 사람도 있었다. 인민군이 팔공산까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짐을 이고 지고, 아이는 업고, 행렬이 끝이 없었다. 걸어서 먼 길을 내려온 사람들은 헛간에도 자고, 마을 사람들에게 장을 달라하기도 했다. 지나는 사람들이 호박잎, 콩잎을 다 뜯어가서 남아나는 게 없었고, 뒷집은 피란민을 상대로 밥집을 했다.

 

전쟁통에는 군인들이 길에 서서 아무나 붙잡아갔다. 일할 사람이 모자라면 보국대로 뽑아가고, 군인이 모자라면 군대로 마구잡이로 데려갔다고, 한 마디로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하신다. 남자들이 전쟁 가서 다 죽고 마을에는 피란민만 들끓는 바람에 딸을 시집보낼 데가 없는 부모들은 애가 탔다. 동갑 친구들은 잔치 하려고 날 잡아놨다가 신랑이 갑자기 군에 끌려가서 잔치에 안 온 일도 더러 있었다.

 

김00 씨 부모님도 혼기를 놓칠까봐 딸 결혼을 서둘렀다. 인근에 일하러 온 사람 중에 모친과 뒷집 할머니가 제일 괜찮다며 봐둔 사람이 있었다. 남편감은 김천 출신으로 자신보다 8살 많은 분이었다. 김00 씨는 시집 안 가려고 울고불고 밥도 안 먹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부산 사는 사촌에게 몰래 도망가려 했는데 그때 못 내뺀 게 한이라고 하신다. 18살 김00 씨는 신랑보다 엄마가 훨씬 좋았고, 엄마와 떨어지면 못 살 것 같으셨단다.

 

모친이 간신히 달래서 결혼했는데 곧이어 남편도 전쟁에 붙들려갔다. 남편이 대구 대한방직 공장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김00 씨는 모친과 같이 걸어서 그곳까지 갔다고 한다. 가보니 공장 안에는 물건은 하나도 없고 사람이 집합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었다. 남편은 울었지만 자신은 뭐가 뭔지 모른 시절이라 눈물도 안 났고, 다시 집까지 걸어오니 발바닥이 다 부르텄다고 하신다.

 

남편은 처음엔 지게에 밥 지고 낙동강 전투에 갔다가 키가 180cm에 덩치가 좋고 인물이 좋은 덕분인지 미군 부대에 차출되었다. 낙동강 전투에선 많이도 죽었는데 다행히 남편은 살아 돌아왔다. 김00 씨는 해방 전에 일본이 전쟁에 지면 조선 나라는 피로 물든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나중에 보니 그 말 그대로 되었다고, 낙동강에 피가 강물이 되어 흘렀다고 한탄하신다.

 

참혹했던 전쟁은 그렇게 몇 년을 끌었다. 인근에 있었던 8사단 군인들이 집에 와서 밥 달라 한 일도 있고, 미군이 약을 뿌려서 벽에 들끓던 빈대와 벼룩이 싹 사라진 일도 있다. 남동생들은 “헬로”를 외치며 흑인 병사에게 과자를 얻어먹기도 했다. 영천에서 들려오던 총성은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린다. 꽤 오랫동안 “타다다다다” 하는 총성과 “탕탕” 하는 대포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하도 몸서리쳐져서 지금도 불꽃놀이를 싫어한다고 하신다.

 

이승만도 보고 박정희도 봤지

 

김00 씨는 경산역을 세 번 다시 짓는 것을 보았다. 철로는 하나는 일제 강점기부터 있던 것이고 나머지는 해방 후에 새로 건설한 것이다. 그 사이 역대 대통령들도 경산역을 다녀갔다. 초대대통령 이승만 부부가 경산역에 와서 인사하는 것을 보았고,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경산역에 올 때는 해바라기를 심으라고 해서 해바라기도 심고 대통령이 새카만 얼굴로 휙 둘러보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지만 못 봤고, 대구 사람 노태우 대통령은 본 적이 있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TV에서 봤고, 이명박 대통령은 온다고 의자 몇 백 개를 놓던 모습만 생각난다고 하셨다.

 

해방 이후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지만 김00 씨의 기억은 자꾸 젊은 시절로 되돌아갔다. 청춘의 기억이 강렬해서일까,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김해 김씨인 부친은 해방될 때 족보를 챙기며 딸에게도 집안 역사를 설명해주신 다정한 분이었다. 김해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인도 공주와 결혼해서 아들을 6형제 두었는데 허씨 집안에 하나 준 것, 이성계가 중국을 치려다 고려를 친 것, 동래 정씨인 할머니 집안이 임진왜란 때 경주로 온 것…. 다 부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말씀을 들을수록 기억력이 비상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머리 좋다고 천재 소리도 들으셨다 한다. 한 번 보면 잊는 법이 없고, 해방 후에 한글을 익혀서 글도 읽을 줄 아신다. 하지만 김00 씨는 그런 것 다 소용없다며 사람은 모름지기 복을 타고나야 한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37살에 혼자 되시고, 21살에 낳은 큰아들도 일찍 잃었다. 그 아들이 지금 살았으면 68살인데 자신만 여태 살았다고, 이제 아픈 데만 남아서 지팡이 짚고 다니며 둘째 아들 돈만 깨먹는다고 한탄하신다. 아무래도 하늘이 자신에게는 요만큼의 복만 주시는 모양이란다.

 

역전마을에는 이제 김00 씨의 또래 분들이 없다. 예전에는 군인도 많고 사람이 끓던 동네인데 지금은 아파트 사서 다 나가고, 연로해서 자녀 집이나 병원으로도 갔다. 요새는 사는 게 지루해서 늘 길거리에 앉아있다 보니 사람이 새카매져서 자기가 봐도 꼴이 우습다 하신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을 찾아와서 쓸데없는 걸 묻고 받아 적느냐고 물으신다. “70~80년 전의 마을 이야기를 들려줄 분이 할머니 한 분뿐이세요”라고 답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힘겹던 시대를 통과한 모든 분께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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