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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역전마을 인터뷰 9 - 정직을 원칙으로 살아온 세월

by 릴라~ 2020. 12. 21.

**10월부터 두 달간 경산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지역 스토리텔링 부분에 자원봉사를 했다. 총 11분을 인터뷰해서 글로 옮기는 작업인데 내가 쓴 글이라 기록으로 남겨둔다.


 

 

정직을 원칙으로 살아온 세월, 한진건강원 천00 씨

 

기차 타고 경산으로

 

스물네 살에 역전마을에 시집와서 44년째 살고 계시는 천00 씨. 원래 고향은 밀양이다. 학창 시절에 대구까지 석탄기차를 타고 간 일이 있는데, 결혼할 때는 완행열차가 생겨서 열차 타고 경산까지 오셨다. 70년대 후반, 지금 경산역 도시재생센터가 있는 자리는 가구골목이었고, 그 골목 안 경산극장 맞은편에 ‘경산문화원’이 있었다. 천명00 씨는 바로 그 ‘경산문화원’ 예식장에서 결혼하셨다.

 

그 무렵의 기억을 떠올리면, 경산역 주위에는 철도사택이 있었고 여인숙이 많았다. 지금 주민사랑방 있는 자리도 여관이었다. 역전마을 꽃밭쉼터에는 작은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 옆에도 여인숙이 하나 있었다. 보림빌라 자리는 과일밭이었고, CU편의점 뒤로는 사과밭이 펼쳐졌다. 장산중학교의 예전 이름은 경산중학교였는데 일본식 건물이었다. 인근 성모유치원 자리에는 교사들의 사택이 있었다.

 

경산역은 조그마했다. 주변은 비포장도로였고 마을에는 기와집도 있었지만 슬레이트집이 더 많았다. 80년대 후반쯤, 지금 장사하고 계시는 ‘한진건강원’ 앞으로 도로가 나면서 마을 모습이 좀 바뀌었다고 한다. 건강원이 있는 집을 지은 지는 17년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도로변 사람들은 대개 장사를 했다. 학생들이 많은 곳이라 장사는 잘 됐다. 주변에 경산여고가 있었고, 남자 중고등학교도 있었는데 고등학교는 나중에 정평동으로 나갔다. 대구 학생들도 많았다. 그때는 여기가 학교가 더 좋아서 대구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그 학생들을 태우는 스쿨버스도 10대나 있었다고 한다.

 

역전마을 분식집

 

천00 씨는 결혼하고 일 년 뒤에 분식집을 차렸다. 남편 분의 일이 잘 안 풀려서 첫 애기 놓고 살 길이 막막했다 하신다. 목수인 시아버님께 식탁을 짜달라고 부탁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때 떡볶이 한 접시가 100원 했고, 붕어빵, 국화빵 같은 풀빵은 5원이었다. 한 손님이 5원 하던 국화빵을 500원어치나 주문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은 국화빵에 들어가는 팥과 반죽을 완제품으로 납품 받지만 당시에는 팥도 직접 쑤고 반죽도 만들었기에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하신다.

 

풀빵은 돈이 안 되어 일 년 뒤에 아는 분의 조언으로 핫도그로 바꿨다. 재료와 기구를 어디서 살지 몰라서 옆집에서 핫도그 파는 할머니한테 물으니 절대 안 가르쳐주시더란다. 경산교 부근 핫도그집에 물어보니 경산시장의 재료 파는 집을 알려주었고, 지인으로부터 중고 핫도그솥을 얻어서 장사를 시작했다.

 

이제 다 됐구나 싶었는데 중고솥에서 기름이 샜다. 스텐 특수 땜질이 뭔지도 몰랐던 천00 씨는 고민 끝에 담뱃갑의 은박지를 다 모아서 연탄불에 태웠다고 한다. 은박지의 종이가 타고 남은 금속물질로 구멍을 때우는 데 성공했다. 그걸로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모른다며 미소 지으신다. 풀빵은 5원인데 핫도그는 20원이었다. 핫도그값은 이후에 30원으로 올랐고 50원까지 받아보시고는 분식집을 접었다.

 

한진건강원 35년

 

분식집은 딱 한 철 장사였다. 학생들 있을 때만 장사가 잘 되고, 당시 보충수업이 없다보니 방학 때는 손님이 끊겼다. 7년 정도 장사한 분식집을 접고 ‘한진건강원’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남편 분이 개장사를 시작했는데 잘 되다가 가격이 폭락했다. 한 마리 30만원 하던 게 3만원에도 안 팔려서 사료 먹이면서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아는 분이 건강원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요새는 건강원에서 과일즙을 비롯해 온갖 걸 다하지만 그때는 주로 개소주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있을 무렵, 개소주가 엄청 유행을 해서 시작은 순조로웠다.

 

부부가 함께 하려고 시작한 일인데 남편은 일을 솜씨 있게 거드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본인 모친에게도 전혀 정을 내지 않아서 시어머니 모시고 병원 가는 일도 다 천명숙 씨 몫이었다. 천00 씨는 살갑지 않은 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안쓰러워서 병석에 누워계셨던 마지막 해까지 정성껏 돌봐드렸다. 치매가 있던 시어머니는 정신이 살짝 돌아왔을 때 “아가 고맙다, 니 덕에 내가 이만큼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시어머니는 91살에 돌아가셨고 천00 씨는 할 도리를 다해서 마음이 가벼웠다 하신다.

 

시어머니는 장수하셨지만 남편 분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천00 씨에게는 아쉽거나 불편한 점이 크게 없었다. 운전만 조금 아쉬울 때가 있을 뿐, 지금껏 모든 살림살이를 혼자 도맡아 해왔기 때문이다. 천성적으로 온화한 분이 분식집에서 건강원까지 41년 세월을 장사하며 그야말로 씩씩하게 살아오셨다. 그런 며느리가 안쓰러웠는지 생전에 시어머니는 이렇게 당부하셨다. 역 앞에는 온갖 사람이 다 드나들고 억센 사람도 많으니 늘 조심하라고, 한쪽 눈은 감고 살라고.

 

천00 씨의 장사 원칙은 ‘정직’이다. 정직하게 장사한다고 자부하기에 물건 값 깎는 사람을 싫어한다. 한 번은 형편이 괜찮은 손님이 값을 깎아서 처음엔 깎아드렸는데, 물건 찾으러 올 때 또 깎아 달라 해서 화가 나셨다. 몇 만 원 더 깎으면 우리도 남는 게 없다고, 선금 줄 테니 물건 두고 가라고, 우리도 애들 공부 시키고 먹고 살라고 장사하는 건데 그렇게 심하게 깎으면 되겠냐고 소리치셨단다. 손님이 그제서야 값을 제대로 치르려 하자 천00 씨는 물건을 내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지매 같은 분 오면 내가 골병 들어요. 이거 슬슬 하는 게 아니라 엄청 힘든 거예요.”

 

그 장사가 올해로 마지막이다. ‘한진건강원’ 자리는 아드님이 물려받아 제과점을 열 예정이다. 은퇴 이후 하고 싶은 것을 여쭤보니, 특별한 건 없고 41년을 장사하며 살림살이를 제대로 못 배웠다고 하신다. 최근에 간장을 담갔는데 싱거워서 다시마와 명태 두 마리 끓여 넣으니 더 깊은 맛이 나더라고, 앞으로 뭐든 맛있게 요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단다. 건강원 계단과 옥상에는 천명숙 씨가 틈틈이 가꾼 화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유투브 보고 직접 배우신 거란다. 평범한 일상, 그 속에서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의 가치를 아는 분의 인생 2막이 기대되면서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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