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호기심에서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외부인의 눈으로 기록한 글을 모두 찾아 읽고 있다. 후대에 역사를 설명적으로 기술한 글보다, 그 시대에 조선을 방문하여 직접 목격한 일을 기록한 글이 그 시대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는데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는 글 반, 그림 반의 책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일본의 억압적 통치를 비판하지만, 명성황후를 좋게 보고 있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대의 구체적 정치 상황은 속속들이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컬러 판화로 그려낸 조선 방방곡곡의 풍경과 풍습,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얼굴은 그 시대로 건너가는 듯한 생생한 표정을 전하고 있다. 그가 조선이란 나라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호기심과 강렬한 관심이 살아있는 그림들이다.
아마 화가여서 그럴 것이다. 지리학자나 여행가, 선교사들의 기록과 달리 그는 그가 잘 모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상, 표정, 옷차림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그림을 통해 표현해낸 '다정하고 정겨운' 조선 사람들의 실제 이미지는 다른 책이 전하지 못하는 이 책만의 장점이다. 서울 동대문 등 풍경 그림도 좋다. 내가 방문한 적 있는 금강산 구룡폭포 그림을 봤을 땐 마음 한 켠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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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들은 피상적인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깊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 집안의 분위기는 우울했으며 집주인은 정부의 감시를 받으며 사는 것이 확실했다. 바쁘게 활동하며 살던 그런 분에게 일본 정부는 억압 그 자체이다.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말을 하고, 무슨 책을 읽으며, 신문은 어떤 것을 읽는지 등을 낱낱이 일본인, 때로는 무식한 일본인에게 설명해야 한다. 손님을 접대할 때도 질문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자기 나라 땅인데도 마음대로 집을 짓지도 못한다. 이 집주인에게는 족쇄가 채워졌고 그리하여 시들어가고 있다. 이건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것이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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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파고다 공원에 모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확성기 소리가 멈추자 숨겨 갖고 있던 태극기를 일제히 휘두르며, '독립 만세, 독립 만세"를 크게 부르며 춤을 추며 길로 나갔다. 함성이 터지면서 군중은 모이고 헤어지고 또 모이면서 질서 정연하게 서울의 대로를 행진했다. 양반, 선비들,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 상인들, 막노동자, 거지, 심지어는 술집 여자들까지, 계급의 상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배제학당 교장이었던 휴 신은 '한국의 재생'이란 책에서 자기가 목격한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모자를 든 학생들, 하얀 옷을 입고 주름진 초록색 장옷을 걸친 부인들, 소매를 걷어올리고 연장을 들고 있는 일꾼들, 고운 비단 두루마기를 바람에 날리는 양반의 자제들, 앙상한 손가락에 바짝 마른 팔뚝을 한 순박한 농사꾼들, 이마에 흰 천을 질끈 동여맨 몸체가 단단한 달구지꾼들, 긴 담뱃대를 들거나 귀 뒤에 펜을 꽂은 부유해 보이는 상인들, 솜 넣은 바지를 입은 퉁퉁하게 생긴 남자 아이들, 혹은 나막신을 신고, 혹은 비단신을 신고, 서구식으로 옷을 입은 청년, 천차만별의 연령, 직업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일체가 되어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즐겁게 '만세, 만세, 만세!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p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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