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책 이야기/역사, 인물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조선의용군 | 류종훈 _ 민족의 분열로 지워진 이름

by 릴라~ 2021. 5. 5.

'대장정' 하면 흔히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중국 대륙에서 그에 못지 않은 대장정을 한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조선의용군이지요. 이 책에서 KBS 피디인 저자는 조선의용군의 남은 흔적을 하나하나 쫓아가면서 일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그 대장정의 여정을 복원하는데요. 귀한 기록이고 읽으면서 숙연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조선의용군의 뿌리는 의열단입니다. 밀양 사람 김원봉과 윤세주가 주축이 되어 만든 의열단과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는 일본의 탄압과 자금 문제로 여러 부침을 겪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에 장개석의 국민당의 지원으로 '조선의용대'로 태어나게 됩니다. 조선의용대는 사상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1941년에 두 부대로 나뉘어 하나는 김원봉이 있던 충칭에 남고 주력 부대는 일본과의 전투를 위해 팔로군 지역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입니다. 

 

당시는 중일전쟁 중이라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죠. 김원봉과 가깝던 윤세주가 전사하고 팔로군과 연대하면서 부대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실권을 쥐게 됨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및 김원봉과 멀어지고(거리적으로도 너무 멀었죠)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됩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에 있던 조선인 무장부대 중에서 최대 규모였고 중국 각지를 이동하며 일본과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부대이기도 합니다. 

 

윤세주가 전사한 태항산 전투에서는 조선의용군이 목숨을 걸고 퇴로를 뚫었기에 팽덕회, 등소평 등 주요 공산당 간부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윤세주의 장례식에는 주덕이 직접 참석해 추도사를 읽었죠. 중일전쟁과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에서도 조선의용군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그간 '조선의용군'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은 북한 인민군의 주력 부대가 된 반면에 충칭에 남아 있던 김원봉의 부대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합류하여 이후 남한 국군이 되기 때문입니다. 6.25전쟁은 독립군도 분열시켜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남한에서 조선의용군이 환영받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북한에서는 어땠을까요. 조선의용군을 이끈 최창익, 김두봉, 무정 등 연안파와 월북한 김원봉은 김일성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가 1958년에 모두 숙청되고 맙니다. 일제시대 주요 조선인 무장부대는 조선의용군, 김일성의 88여단, 임정의 광복군 셋이었습니다.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 그룹은 조선의용군이 주축이 된 연안파를 모두 숙청해서 역사에서 지워버립니다. 

 

그리고 해방 후 70년이 넘어서 이제 남쪽에서 조금씩 그들의 흔적을 기억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밀양에 있는 김원봉의 생가터에 세운 의열기념관 등이 그 예입니다. 조국이 둘로 갈라지기 전에는 그들은 어느 쪽 편도 아니었죠. 그저 자신의 신념대로 일본과 싸웠을 뿐입니다. 중국 전역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이름없이 사라진 젊은이들의 죽음에 기억의 빛을 비추는 것은 후손의 몫일 겁니다. 그들이 싸운 이유는 앞으로 올 세상에 대한 바람 때문이었으니까요. 

 

책을 통해 이분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민족의 분열이 얼마나 우리 역사를 비비 꼬이게 만들었는가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분열을 해소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우리 역사는 고비마다 어떻게든 꼬이게 되리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후손들이 드넓은 대로를 걸어가게 할 것인가, 미로처럼 얽히고 꼬인 길을 걸어가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자각이 너무 부족한 것이 현재 남북한입니다. 

 

 

 

##

 

이곳 태항산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일본군이 맞붙은 최전선이었다. 일본군이 팔로군 총사령부에 포탄을 쏟아부으며 들이치던 날, 조선인 전사들은 팔로군과 동료 의용군의 주력을 엄호하며 퇴로를 뚫었다. 그 전투에서 김원봉과 같은 밀양 사람이자 의열단 창립 멤버였던 석정 윤세주가 전사했다. 그의 목숨 값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팽덕회와 등소평 등 훗날 대륙을 주름잡은 이들이다. 윤세주의 장례식에는 팔로군 총사령관이자 중국 인민해방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주덕이 직접 참석해 추도사를 읽었다. p15

 

##

 

연안에도 어김없이 조선의용군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공산당은 이곳이 황토 지형임을 이용해 산에 토굴을 파고 살았다. 모택동과 주은래 등 최고위 지도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가평이라는 연안 인근의 시골 마을에는 의용군이 살았던 토굴들이 아직 남아 있다. 의용군 간부를 교육하기 위해 세운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흔적도 남아 있다. 광주 사람 전율성이 이곳 연안에서 팔로군 행진곡을 썼다. 연안의 혁명 전사라면 당시 목청껏 한 번쯤 불러봤을 법한 옌안송도 정율성의 작품이다. p16

 

##

 

하지만 역사는 얄궂다. 조선의용군의 대장정은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지 못했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해방 전 한반도를 둘러싼 조선인 무장대오는 크게 셋이었음을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만주의 항일 빨치산이 주축이 된 소련 영내의 88여단, 그리고 조선의용군이다. 

 

광복군은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와 공존해야 하긴 했지만, 남쪽의 큰 줄기가 되었다. 역사는 제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친일파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간 대한민국은 이제 국군의 연원을 자랑스러운 광복군으로 떳떳하게 찾을 만큼이 됐다. 만주의 항일빨치산들은 북쪽의 건국을 주도했다. 소련의 후원을 업은 김일성과 그 부대원들은 북한을 장악한 후, 김씨 왕조를 수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88여단의 후손들은 지금도 북한에서 혁명 가계를 자처하며 그들만의 공화국을 버텨가고 있다.

 

조선의용군만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그들은 지워졌다. 남쪽은 그들을 빨갱이라 잊었고, 북쪽은 김일성 유일사상에 반기를 들었다며 숙청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족은 전쟁 중에 학살당했고, 당사자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서류 한 장 찾을 수가 없다. 독립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역사의 정당성도, 그 긴 세월의 대장정도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다행히 몇몇 뜻있는 움직임이 대륙에 그들의 흔적을 약간 남겨놓았다. p291-292

 

 

 

 

 

 

https://youtu.be/TjjXRrDQBX0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