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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이만하면 다행이다"

by 릴라~ 2021. 6. 25.

 

M과의 통화는 늘 이 말로 끝을 맺는다.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M은 음악 선생님이다.

내가 첫 발령을 받은 모중학교에서 이십대 때 처음 만났다. 

키가 작고 얼굴이 갸름하고 몸매도 마른 편이다.  

87학번이니 나보다 다섯 살 많지만 

서로 나이가 들면서 니네 하며 친구처럼 지낸다. 

 

내가 주말에 시험 문제 내느라 골머리를 앓을 때면

전화해서 "그러게 왜 국어를 했어? 음악을 하지." 하면서 놀리곤 한다. 

음악은 일 년 내내 지필고사를 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서 자기는 음악이니까 선생을 하지, 국영수면 선생 못 할 거라면서

다음 생에서는 꼭~~ 음악을 하라면서 부아를 지른다. 

 

M은 젊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기사 딸린 자가용 타고 다니다가 

(내 기억에 88올림픽 전쯤에 우리집을 비롯해서 이웃들이

많이들 차를 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법적인 것이 다소 허술하던 시절이라

남은 재산은 어찌어찌 의리 없던 동업자에게 다 넘어가버렸고

M의 어머니는 공주과라 경제 능력이 전혀 없었다.

믿고 의지하던 오빠도 M이 이십대일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아버지와 오빠를 연이어 잃었다. 

 

M은 음대를 나와서 먹고 살기 위해 길을 찾다가 교사 임용 공부를 했는데

시험에 덜컥 붙었다.

공부하고는 담 쌓은 자기가 시험에 어떻게 붙었는지

M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한다. 

살 길은 트였찌만 당시 초봉이 백 만원도 안 되던 교사 월급으로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했자니 생활은 빡빡할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은 고시생이었다. 

 

M은 꽃 같은 삼십대를 우울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결혼하고 싶어 선을 수백 번 봤는데 인연이 닿지 않고

가족 뒷바라지는 끝이 없고, 답답하기가 말로 다할 수 없던 시절이라 한다. 

동생이 마흔 줄에 다행히 고시에 붙으면서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M의 어머니는 젊을 때 고생한 딸의 심정을 이해 못하고

그럼 누나가 동생을 도와야지 하는 식으로 M의 속을 뒤집는 분이었다. 

 

M은 자기가 소심하고 여리여리한 성격인데 어떻게 그때 

집을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다. 

학교에서도 드센 애들 때문에 늘 맘고생을 하곤 했었다. 

사람은 절실하면 어떻게든 행동하게 마련이라고 M은 말했다. 

M은 그렇게 뒤늦게 독립했다. 

그리고 여행을 시작했다. 

 

이제 오십대에 접어든 M은 말한다. 

결혼은 인생의 열 가지 즐거움 중 하나에 불과한데

그 하나 때문에 아홉가지 기쁨을 놓치고 살았다고. 

가족사에 갇혀 있을 때는 이토록 넓은 세상이 있는 줄 몰랐다고.

이 넓은 세상에 이렇게 할 거리가 많은데 

바보같이 울면서 살았다고. 

지금은 결혼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M의 하소연, 아이 키우는 게 소원인데

이렇게 싱글로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그 하소연을 십 년 넘게 들어온 나로서는 

M의 변신이 놀랍기만 하다.

워낙 아껴 쓰며 사는 게 버릇이 된 터라 M은 여유가 있어도

싼 것만 찾는 게 습관이 되었다.  

내가 백화점에 가서 옷을 턱턱 사는 게 늘 신기했다고 말하는 M이다.

물론 나도 젊을 때나 그렇지 지금은 옷 욕심도 없고

돈 아까워서 그렇게 안 사지만. 

 

내가 돈 좀 쓰라고 노래를 해도 그렇게 매사에 아껴쓰던 M이

비즈니스석을 타고 유럽을 다녀왔을 때 

나는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M이 그 정도로 변할 줄은 정말 예상 못했다.  

 

예체능 전공이라 그쪽에 소질이 있는지

M의 취미는 그림이다. 주말이면 유화를 그린다. 

지금 M의 소원은 그림 도구를 편하게 늘어놓을 수 있게

33평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

그리고 패키지 말고 해외 배낭여행을 많이 하는 것이다. 

그것만 되면 충분하다고, 왜 남자한테 목매었는지 후회되어 죽겠다고

지금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리고 M은 말한다. 나랑 자기는 완전 정반대 스타일인데

어떻게 교류가 오래 갔는지 모르겠다고.

아마도 둘 다 숨김 없이 솔직한 스타일이라 그런 것 같다고.

 

내가 뭔가 힘든 일을 말할 때마다 M은 말한다. 

예술이, 음악이 사람을 왜 그렇게 감동시키는지 아냐고

작가들이 겪은 무지막지한 고통 때문이라고.

모든 걸 다 가져도 사람은 마음이 2퍼센트 허전한 법이며

그 부분은 봉사로만 채울 수 있다고. 

남을 도울 때 우리 마음도 채워진다고. 

 

그리고 말한다. 

"이나마 복이다 생각해라."

지금 이 정도 사는 것도 참말 다행이고 복이다 생각하라고.

자기는 힘들면 늘 그 말을 되뇌인다고,, 이나마 복이다.

 

M이 할머니처럼 "이나마 복이다~~"라고 할 때면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이 가벼워진다.  

이런 종류의 말을 다른 사람이 아닌 M이 말해야 울림이 있는 이유는

이 말 속에 M의 살아온 나날이 깃들어있기 때문이지 싶다. 

 

M은 내가 책을 많이 읽은 게 부럽다고 했다. 

"뭐 그다지 많이 읽은 것도 아닌데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자기가 제일 많이 읽었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책이 도통 눈에 안 들어온다는 M이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 있다.

내가 권해준 위화의 '제7일' 

읽고나서 치유가 되었다고 한다. 

소설을 읽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오빠가 하늘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즐기며 편히 있을 것 같았단다.

시간 나면 다시 읽어야겠다고. 

 

그 다음에 권해준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몇 달째 안 읽고 계신다. 방학 되면 시도할 거라고 기다리라고 한다. 

 

M이 나를 부러워하지 않는 지점은

자신이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것이라고 한다. 

그건 정말로 잊지 못할 추억인데 나를 포함한 90년대 학번들은 경험 못한 것이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소중한 거라고 했다. 

1987년에 정말 대단했다고.

음대생은 원래 데모 같은 거 안 한다고.

그런데 음대생까지 나서서 보도블럭 들었으니

얼마나 특별한 시대였냐고.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그 시대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너무너무 그립다고 했다.

 

이런저런 밑도 끝도 없는 수다로

M과의 통화는 늘 한 시간을 금방 채운다. 

그리고 각자 학교에서 힘든 일을 하소연하고(학교는 날마다 힘들다)

전화를 끊기 전 마지막 말은 늘 똑같다. 

 

"이나마 복이다 생각하자!"

 

내가 연이은 유산으로 괴로워할 때도 M은 말했다.

"이만하면 다행이다 생각해라.

인연은 다 정해져 있는 거야."

 

M의 한 마디를 듣고 전화기를 내려놓을 때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진정이 된다. 

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답답했던 가슴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와닿은 느낌.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않아도

숨통만 조금 트여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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