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미국 본토가 아니라 광화문에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결정되었다. 내가 가려고 했다가 '외압'에 의해 못 간 나라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미국이다. 미국대사관 비자인터뷰가 존재하던 90년대말의 추억(?)이다.
이십대 중반, 임용시험을 어찌어찌 끄트머리로 붙었다. 끄트머리로 붙다 보니 봄에 발령이 안 나고 2학기인 9.1일자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발령 전까지 몇 달 여유가 생긴 거다. 시험을 친다고 심신이 지친 상태라 딱히 가고 싶은 데는 없었다. 그냥 미국이나 한번 보자 싶었다.
당시만 해도 비자 발급 절차가 까다로웠다. 미국대사관에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하러 가야 했다. 마침 IMF 직후라 비자 거부율이 높다고 했다. 나는 교육청에 여행 간다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장학사의 달갑지 않은 목소리를 들어가며 임용예정확인서를 끊었다. 현재 소득이 없으니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서 부친의 재직증명서와 소득증빙까지 준비해야 했다. 번역을 맡긴 비자서류대행업체는 부친이 공기업 재직중이고 소득증빙도 했으니 시국이 안 좋긴 해도 웬만하면 비자가 나올 거라고 했다.
인터뷰 날짜가 잡히고 광화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갔다.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을까. 대사관 앞에는 긴 줄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영어 인터뷰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이 되었다. 미국 영사는 우람한 몸집의 중년 여성이었다. 우리는 기차역 매표소처럼 생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내 기억에 영사 옆에 통역이 서 있었던 것 같은데 내 경우는 필요 없었다. 단 한 마디로 인터뷰가 끝났기 때문이다.
영사는 미국에 왜 가느냐고 물었다. “travel”이라고 대답했다. 내 서류는 봤는지 안 봤는지 영사는 더 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비자 승인을 거부해버렸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KTX가 없던 시절, 새벽기차 타고 오느라고 피곤해서 내 행색이 넘 초라했나. 거울을 보니 머리가 좀 부스스해 보이긴 했다. 대사관을 나오는데 이보다 더 허무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이십대 여성은 무조건 일정 퍼센트를 거부한다고 했다. 한국 경제가 안 좋아 위장결혼 혹은 불법취업을 할까봐서 그런단다.
'아니, 난 미국에 놀러가는 거라고!'
'거기 살아라 해도 안 산다고!'
열 받아서 결심했다. 이 나라에 다시는 가나 봐라. 무비자가 되면 그때나 고려해보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내가 방문한 나라는 꿩 대신 닭으로 캐나다였다. 나이아가라폭포에서 미국 땅을 흘낏 보았다. 별 거 없었다. 미국 동부에서 넘어온 여행자들이 캐나다가 넘 좋다 했다. 여긴 저녁에도 맘 놓고 돌아다닌다고. 문화 충격이었다. 그럼 미국에서는 해 지면 못 돌아다니능겨?
여행 한 번 가려면 대사관 인터뷰를 해야 하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세월이 흘러 2009년인가부터 미국에 무비자 여행이 가능해지자 정말 격세지감이 들었다. 대사관 한쪽으로 길게 줄을 서던 모습도 사라졌다. 하지만 난 나이가 들면서 아메리칸 드림도 없어지고, 총 맞을 까봐 무섭기도 하고, 이래저래 미국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미국대사관을 다녀오면 반미주의자가 된다는 농담이 이해가 갔다.
그러다기 최근에야 미국에 다시 호기심이 생겼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나서. 뉴욕을 다녀온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도 꽤 흥미를 자극했고(다음 이야기에 계속),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를 어찌됐든 한 번 직접 봐야겠다 싶었다.
해외여행이란 게 시간을 좀 많이 들이건 잠깐 다녀오건, 배낭여행이건 패키지건, 본질적인 의미에선 겉핧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외부인이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여행의 본질은 무얼 얼마만큼 보느냐가 아니라 ‘이동 경로'에 있다. 비행기에 열 몇 시간 내 몸을 실어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그 시공간의 이동을 통해서만 어떤 장소가 내 정신 세계 속에서 구체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직접 시간을 들인 경험만이 우리에게 빛깔 있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미지와 실재는 언제나 다르며, 그래서 그 땅을 직접 밟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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