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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아빠의 마지막 순간

by 릴라~ 2021. 7. 29.


성당 후배 부친 장례미사에 참석했다. 부부가 다 우리 성당 교리교사 출신인데 지금은 같은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장을 한다고 한다. 코로나라서 세속적 절차를 생략하고 미사로 마무리하기에 병원장례식장 대신 미사에 가게 됐다. 부부의 동기 신부님들이 많이 와서 뜻깊었고 이 부부 가족윽 잘 아는 신부님이 강론하며 그간 투병 때 있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어 기억에 남았다.

이분들에겐 죽음을 정리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강론하신 신부님과 병자성사도 드리고 마지막엔 가족만 참석하는 미사도 같이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고인이 그때 그렇게 기뻐하셨다 한다. 그리고 투병으로 절뚝거리면서도 고인이 평일미사에 자주 가셨다 한다.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안타깝게도 우리 아빠는 너무 급작스럽게 모든 일이 진행되고 병원과 응급실을 들락거려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치료하다가 그 마지막 몇 달을 그냥 흘려보냈다. 집에 잠시 계실 때 욱수성당 신부님께 병자성사를 봤다면 그분이 얼마나 잘 말씀해주셨을 건데(연세도 많으시고 정말 인품 넉넉하신 분이었다), 그 타이밍을 놓치고, 전날까지도 멀쩡하시다가 돌아가시는 날 아침부터 갑자기 호흡곤란이 왔다. 산소포화도가 100에서 80으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아산병원에 상주하는 원목 신부님이 바로 오셨다. 의례적인 기도문 이후 한 마디라도 따스하게 말씀하셨으면 좋으련만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기도문 딱 끝나자마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쌩 하니 가버리셨다. 아빠는 신부님이 해주실 말씀을 손을 모으고 기다리고 있었는데…환자가 곧 돌아가시는데… 아산병원이야 매일 적지 않은 수가 돌아가시니 그분이 형식적이 된 걸 수도 있겠지만 난 너무 섭섭했고 엄마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날 저녁에 돌아가셨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안 간다고 고개를 저으셔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야 치료를 포기했다. 기도에 구멍을 뚫어 인공적으로 호흡하는 기도삽관을 안 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 모든 치료가 실패였으니 동생도 하나 남은 건 하지 말자 했다. 가끔 그걸 했어야하나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병원사목을 하는 친한 수녀님이 이야길 들으시곤 죽음 앞에 손을 잡아줄 수 이는 성직자뿐인데 그때 잡아주셔야했다고 그 신부님 일이 매우 안타깝다 하셨다. 자신도 맨날 환자들만 보면 우울해지기에 병원문을 나서면 일체 생각 안 하고 즐거운 일을 한다 하셨다. 그래야 그 힘으로 병원에 가서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장례미사에서 후배의 부친인 고인이 마지막 시간을 절뚝거리면서도 미사에 쓰고 그렇게 삶을 정리했다는 이야길 들으며 삶의 마지막이 그러해야 하고 마지막에 의탁할 것은 그 길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질만능의 시대에도 죽음 앞에서 인간을 도와줄 수 있는 건 종교뿐이기에 종교가 살아남은 것이리라. 장례미사 때 신부님 말씀처럼 고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진짜 경황 없이 돌아가셨는데 잘 계실까? 마지막 시간의 어수선함이 내게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었다. 그 시간을 그렇게 써서는 안 됐는데 이 병원, 저 병원, 대구에서 서울로 병원만 쫓아다녔다. 도저히 죽음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는 온갖 걸 다 알아보며 잘해보려고 분주했지만 실상은 가장 어리석었다. 대화를 더 나누었어야 했는데 이것저것 온갖 병에 좋다는 것만 물색했다.

그 마지막 날, 호흡이 하루만에 죽죽 떨어져 돌아가실 지경인데 우리나라에서 젤 좋은 아산병원은 간호사가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더니 아무 필요 없는 수혈이나 하고, 이후엔 산소호흡기를 씌웠다. 우리나라 의료제도가 좋은 건 알지만 죽음을 앞두고 행해지는 처치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호스피스가 필요한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가 찍은 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다들 멘붕인데 동생은 마지막이라며 폰으로 가족사진 셀카를 찍었다. 네 명은 세상 끝난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울고 있는 모습으로 찍혔다. 나중에 동생이 이것 좀 보라며 사진을 확대해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산소호흡기 투명 플라스틱 너머로 아빠는 웃고 있었다. 이미 의식은 있으나 말씀 못하는 상태였는데 아마도 온 힘을 짜내어 입술을 ‘김치’할 때처럼 힘을 주신 것이다. 그 사진에서 보여준 마지막 의지처럼 우리 아빠에게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기를” 빈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건 깊은 위로의 한 마디다. 영하 10도의 칼바람이 불던 날, 아빠의 장례미사를 끝내고 군위 천주교 묘소에 묻고 본당에 돌아왔을 때 백발이 성성한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 걱정하지 마이소. 내 저 위에다 기도 마이 했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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