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런저런 독서가 재미없어지긴 처음이다. 이젠 잡다한 교양서도 별로.... 소설 '토지' 등의 묵직한 책만 끌린다. 작년에 '토지' 다 읽으리라는 계획은 물 건너갔고 올 초반까지 다 읽고나서는 '태백산맥' 새로 읽을 예정. 태백산맥은 스무 살 때 읽고 그 사이 다시 못 본 책. 그렇게 '두께' 있는 책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나이가 그만치 들었나보다.
'성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예전엔 너무 익숙해서 시시한 적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쳐보니 새롭다. 고전의 매력은 '총체성'인 것 같다. 현대 책이 아무리 잘 써도 다 자기 분야에 한정되어 있고 부분적 진실만을 담고 있다면 고전은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형태이고 미신적인 부분이 있지만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담고 있다. 고대인들의 세계관이 느껴진다는 거다. 그것이 고전의 매력이다.
성서는 매일미사 앱으로 읽고 있다. 이천 년 전의 삶의 인식이지만 단순히 이천 년 전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가 수만 년 문명을 개척해오며 쌓인, 그 수만 년의 인식이 그 시점에 담긴 것이다. 인류 경험의 총체가 담겨 있는 셈이다.
12월 30일 말씀이 기억에 남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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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한나.
남편과 칠 년을 살고 여든넷까지 과부로 살았다 한다.
이천 년 전의 삶을 생각하면 가련한 여인이다.
성서에도 가장 불쌍한 사람의 예로 고아와 과부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한나는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께 감사했다고 나와 있다.
난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나도 그렇고 주위 친구들과 얘기해봐도 그렇고
우리가 신앙을 잃는 지점이 바로 내 삶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다.
괴로움이나 불행을 겪는 중에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기 어렵고
그래서 삶을 축하하기가 어렵고 결과적으로
그 삶을 만든 혹은 주관하는 분을 찬미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 한나가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실로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 삶을 ‘비참한 과부’가 아니라 ‘거룩한 예언자’로 만들었다.
평생 하느님을 기다렸고 고대했던 아기를, 희망을
그의 생애 속에서 발견하고 만났다.
예언자 한나를 보며 삶을 ‘비참하게’ 혹은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구나 했다.
나도 잘 안 풀리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하늘에 맡기기가 쉽지 않다.
무엇이 내게 더 좋은 것인지 나보다 하느님이 더 잘 아시리라
믿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지혜를 청한다.
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예언자 한나, 12/30 성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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