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은 음악 선생이다. 천생 집순이인데다 싸돌아다니는 걸 젤 싫어한다. 집에서 피아노 치고 그림 그릴 때가 젤 행복하단다. 그런 M도 싱글이기에 이렇다할 변화가 없는 삶이 계속되다보니 문득 이래 사는 게 맞는가 싶을 때가 있더란다. 갱년기는 통과했지만 뭔가 막막하고 답답한 게 가시지 않아 근처에 사주를 보러 갔단다.
역술가 왈, “21세기에 살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이네요.”
“꽉 막혔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거지. 너무 자기 틀 안에 단단히 갇혀 있어. 틀을 좀 깨야 운이 좋아집니더.”
“뭘 하면 좋을까요?”
“어… 음악, 미술, 시, 이런 거 하면 안 되고 밖으로 자꾸 나댕기소.”
M이 웃었단다.
“직업이 음악이고 취미가 미술인데요.”
역술가, “실내서 앉아서 하는 거 그만하고 몸을 써야 됩니데이. 이 사주는 일탈을 쫌 해야 돼요. 계획대로만 살지 말고 즉흥적으로 맘 가는 대로 막 움직여야 돼. 일탈을 해야 운이 바뀌고 좋은 기운이 들어옵니데이. “
M이 사주 본 이야길 하고 있을 때 난 막 제주국립박물관을 나오고 있었다. 난 그간 M이 사주 본 이야기를 몇 차례 들었던지라 이 역술가가 가장 알맞은 조언을 한 것 같다고 다 맞는 말이라 하니 M이 갑자기 “제주에 갈까?” 한다. 난 이따 서귀포 내려간다고 공항리무진으로 1시간 반 걸리니 자고 가는 거면 몰라도 당일은 무리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잊어버렸는데 담날 1시경 톡이 왔다. “공항이다. 2시 10분 제주 도착.”
오 마이 갓. 그럼 4시 넘어 서귀포 도착인데 언제 가실려고? 비행기 도착 시간에 맞춰 급히 전화해 물어보니 밤 9시 비행기란다. 일단 리무진 타시라 했다. 종점 서귀포칼호텔에 4시 20분쯤 도착.
올 거면 아침에 오지 왜 지금 왔냐니까 M은 나랑 통화하고나서 그날밤은 물론 담날 오전까지 갈까말까 내내 고민했다고. 걍 자고 가라 하니 안 된단다. 약도 화장품도 안 챙겨왔다고. 화장 하루 안 해도 되고 약 몇 시간 늦게 먹어도 안 죽는다고 해도 노노. 그러면 오늘 말고 낼 일찍 오지 하니까 시간 계산을 잘못했단다. 서귀포서 네 시간은 보낼 줄 알았다고. 딱 한 시간 반을 같이 있는 동안 잔소리를 30분은 한 것 같다. 이게 무슨 일탈이냐고, 뻘짓이고 개고생이지 하면서.
M은 6시에 다시 공항리무진버스를 탔다. 아까 올 때 기사님이 저녁에 막힌다고 6시에 타라고 하셨다 한다. 나 보러 제주까지 오신 분을 저녁도 못 먹이고 보냈다. 짧은 시간이나마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근처 올레길을 걸었다. 곧 떠나야 하기에, 해가 넘어가기 전이기에 더 아스라한 제주 바다, 검은 해안. 잠깐 보기엔 넘 예쁘고 아까운 풍경이었다.
M이 떠나고 룸서비스를 시켜먹으며 생각했다. 난 떠나는 게 세상에서 젤 쉬운 일인데 누군가에겐 하루를 고민하고 또 오전을 더 고민해야 하는 일이구나. M은 어디 떠날 때마다 평소 쓰는 물건을 완벽하게 챙겨가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이쑤시개까지 챙긴다고. 그런 분이 이틀 고민하긴 했지만 어쨌든 생애 처음으로 계획 없이 제주행 비행기를 탔으니 일탈은 일탈이다 싶기도 했다. 아무튼 M의 방문은 내 제주여행 중 가장 황당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드는 생각. 내게도 M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단단한 틀이 있을 거라는 것. 내가 그어놓은 선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들이 나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잇값 못한다 소리 들을까 움츠러드는 면도 있고. 그래서 새로운 기운을 불러오려면 그 역술가 말마따나 일탈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올해엔 M도 나도 ‘건강한’ 일탈을 많이 하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아래는 얼마 전 M이 그려서 선물로 보내준 그림. 유명 여류화가 작품을 그대로 본딴 건데 그 화가 이름은 생각 안 나고 M의 황당한 제주행만 머릿속에 간질거린다.
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신년 사주풀이와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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