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때 읽고 이십 년 넘는 세월을 훌쩍 건너 뛰어 다시 손에 잡은 소설 태백산맥. 벌교 여행을 다녀와서 이틀 만에 3권까지 읽었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일단, 소설의 주요 장소인 벌교읍내, 현부자집, 술도가, 보성여관(옛 남도여관), 금융조합, 홍교, 중도방죽 등을 직접 보고 온 터라 읽으면서 장소가 환히 떠올라서 좋았고,, 주인공들이 오고가는 인근 선암사와 고흥, 순천 일대까지도
이번 여행을 통해 지리가 환히 그려져서 좋았다. 고흥 과역면은 3권에서 한 줄 나오는데 과역면에서 여행 중 가장 맛있는 밥을 먹어서 그것도 기억에 남았다.
<토지>가 진도가 잘 안 나가서 힘겹게 붙들고 있던 참이라 <태백산맥>이 더 기대 이상인 듯도 하다. 조정래 씨 필력이 대단하다.스무 살 때만큼은 아니지만(그땐 밤새워가며 읽음) 꽤 속도감 있게 읽힌다.
캐릭터의 힘도 살아 있었다. 다양한 배경의 등장인물들이 한 명 한 명 생생하게 그려졌고 그들이 시대를 헤쳐가는 과정 또한 설득력 있었다.
젊은 날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이 빨치산에 굉장히 우호적이라 읽혔는데 지금 보니, 작가가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역사적 관찰자로서 객관적인 시각을 고수하고 있음이 잘 느껴진다.
1부 제목이 '한의 모닥불'이다. 그 모닥불이 어떻게 불타올라 한 시기를 화염에 휩싸이게 했는지 잘 전하는 소설이다. 한의 모닥불은 소작쟁의에서 시작된다. 소설가 김훈이 기자 시절에 쓴 기사처럼 당시 그 일대가 좌익에 경도된 것은 모스크바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생존의, 생명의 몸부림이었다.
나는 예전에 다른 자료들을 읽으며 빨치산들이 왜 그리 가망 없고 승산 없는 싸움을 오래 전개했을까 생각하곤 했었다. 이번에 태백산맥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이 땅에서 그들의 한이 깊고 깊어서라는 것을. 그들은 죽어서라도 성취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비록 그들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그 한 서린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10권까지 달려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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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생각은 다 옳아. 그러나 그 옳은 생각의 실천이 꼭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네." 김범우 선생의 말이 가슴 깊은 골짜기에서 메아리져 들려왔다. p109, 1권
사회주의 사상, 그 달콤한 논리,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 자극적 최면, 무산자 혁명의 영웅, 그 충동적 칭호. 이런 것에 이끌려 첩보활동의 경험을 십분 활용해가며 지금쯤 염상진과 함께 저 어둠에 묻힌 어느 산줄기에 박혀 있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이란 예기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그 사건을 계기로 완전한 의식변화를 일으켰고, 연합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불신은 물론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국제성의 허구와 그 속에 도사린 위험스런 덫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점을 염상진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신념화된 의식이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만한 강도의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의식변화를 염상진에게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염상진은 학병 나가기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p266,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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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네. 나는 그 시체와 절망적 체념에 빠진 부모의 슬픔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가 없었어. 그런 비굴과 비겁을 저지를 용기가 없었던 거야. 그렇다고 내가 그들보다 나은 힘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또한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네. 그 순간 나는 내가 한 마리 작고 하잘것 없는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 인간인가, 이런 집중적인 회의 앞에서 나는 완전히 해체되고 있었어. 그 장소를 외면할 비굴한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폭력에 대항할 당당한 용기도 없는 나는 이미 내 눈앞의 시체와 다를 것이 없었지. 그 순간 난 각오했어. 인위적인 힘을 만들자고. 그들에게도 힘이 있음을, 관권의 폭력을 쳐부술 수 있음을 실증시켜 주고 싶었어. 그때의 절망스러움은 나를 내 정신이 아니게 만들었어. 나는 선생이란 무기를 최대한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지. 그 시체까지 동원한 선동은 30분도 안 걸려 완료했지. 줄을 세우고, 구호를 몇 번 연습시키고, 그리고 토벌대놈들이 뺑소니쳐버린 읍내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p336-337,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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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내는 그 어떤 새로운 주의나 주장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고, 인간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가 없네. 왜냐하면 인간이란 탐욕과 자만을 근본적으로 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인간이 탐욕과 자만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제아무리 새로운 주의나 사상을 내세워도 거기에는 또다른 모순과 불합리를 내포하게 마련이야. p242,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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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감옥살이를 해봤지만, 변호사를 거부한 채 법정투쟁을 벌여 10년형을 받았고, 겨울이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에 시달리며 지장 하나만 찍으면 가출옥을 시켜주겠다는 끊임없는 유혹을 뿌리치며 어찌 8년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숙인 머리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네. 끝끝내 옥사하고 만 그분의 영혼이나, 도처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희생들 앞에 오늘의 현실은 치욕일 뿐이고 우리들 모두는 죄인일 따름이지. p.251,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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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그는 쥐도 새도 읎고 바람뿐이란 말이여. 우리가 아부지 이약 아무리 배가 터지게 혀도 바람에 다 날라가뿐단 말이여. p255,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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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병이나 징병을 피해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세간이 퍼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리산이란 산은 그렇게 간단하게 색출작업이 이루어지는 산이 아니었다. 앉음새가 열두 폭 치마처럼 넓고, 품고 있는 골짜기가 그 치마의 주름보다 많아 피신하는 100여 명을 찾아내기란 모래밭에 빠뜨린 바늘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가당찮ㅇ느 일이었다. p269,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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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이 든 것까지는 주인의 책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 도둑에게 어떻게 대처하고, 무슨 방법으로 몰아낼 것이냐 하는 것은 주인의 책임입니다. 도둑을 맞아 한 집안이 망하게 되었을 때, 도둑은 그 집안을 망하게 한 원인일 뿐이지, 책임을 물을 대상은 아닙니다. 도둑은 직업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다만 그 집안 사람들이 비겁하고 빙충맞아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도둑에게 전가시킬 수는 있겠지요. p295,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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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는 지금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모든 정치세력들이 신탁통치의 종식을 위해 단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에도 공산당이 있고, 보수정당이 있고, 종교세력 정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알력하지 않고 연합세력으로 뭉쳐 있습니다.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서죠. 그들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느냐, 그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이고, 우리의 문제점입니다. p296, 3권.
책 이야기/시와 소설
태백산맥 1부 (1~3권) 한의 모닥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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