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읽는 프랑스 소설.
처음엔 프랑스 소설에서 흔히 보는, 부르주아적 생활상에 대한 묘사가 썩 와닿지 않았는데..
캐릭터가 워낙 흡입력이 있어서 끝까지 몰입해 읽었다.
책장을 덮으니 루실, 샤를, 앙투안, 디온, 이 네 사람을 직접 곁에서 만난 것 같았다.
그 집에서 같이 생활한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탁월하다.
과연 천재 작가라는 말을 들을 만하구나 싶었다.
내일에 대한 계획이 없는, 오늘의 따스한 햇빛에서 삶의 모든 행복을 얻는 서른의 루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는 능력 있고 사려 깊은 오십의 애인 샤를.
사교계의 여왕이자 세련되고 아름다운 마흔의 디온.
디온의 애인이자 그녀의 경제적 후원을 받는,
작가 지망생이면서 진지하게 의미를 추구하는 서른의 앙투안.
각자 경제적 후원을 해주는 애인이 있는, 젊은 루실과 앙투안이 사랑에 빠지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더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랑의 화염에 휩싸이고
그 사랑이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 그 몇 달의 과정을 탁월하게 묘사해낸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것만을 사랑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지속 가능하지 못한 것이 사랑의 본질일까.
루실과 앙투안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젊은 남녀의 사랑이고, 관능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수많은 애틋한 순간과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진 시간이고
그 애틋함과 그리움이 또 쉽게 절망과 한숨으로 바뀌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지속 가능하지 않기에.
샤를의 보호 아래 풍족한 생활을 했던 루실은 앙투안의 가난한 연인 역할에 어울리지 않으며
앙투안은 그 역시 젊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태양, 해변, 한가로움, 자유"에만 탐닉하는 루실을 사랑하지만
그의 다른 한 면은 삶이 계속 그렇게만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가 그것에만 탐닉하는 이였다면 디온과 결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앙투안은 자기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루실을 사랑하고
그녀와 어떻게든 함께 생활의 장벽을 뚫고나가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힘없이 포기한다.
앙투안과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루실은 결국 샤를에게 돌아가고 만다.
네 명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샤를이었다.
그는 자기 삶에서 잃어버린 '어린이'를 루실에게서 발견했으며
그 사랑은 아무 이유도 대가도 없는 것이었기에.
이 소설의 캐릭터들은 다들 조금씩 비겁하지만
샤를은 유일하게 정직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하지만 샤를의 보호 아래 루실은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소설을 결코 방종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소설 속 부르주아적 생활 세계가
물질적 풍요과 지적 허영이 결합한,
자신에 대해서도, 타자에 대해서도 진정한 깊이에 이르지 못한
종국엔 허무한 뒤끝을 남기는 그런 세계로 다가왔을 뿐.
그래서 재능 있고 감각적인 문체를 지닌 작가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예전에 기다림으로 충만했던 빈 시간들이 정말로 빈 시간들이 되었다.
그녀가 그를 기적이 아닌 일상으로서 기다렸기 때문이다." p253
책 이야기/시와 소설
패배의 신호 / 프랑수아즈 사강 __ 프랑스 부르주아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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