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명품’이지 싶다. 텔레비전, 광고, 신문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단어, 명품. 명품 아파트, 명품 연기, 명품 교육... 들을 때마다 거슬리는 단어지만, 한국인의 신분상승욕구와 맞물려서 앞으로도 긴 생명력을 유지할 같다. 그런데 대체 명품이 무엇일까. 루이비통, 구찌, 샤넬, 프라다???
내게도 비슷한 게 하나 있긴 하다. 제대로 된 가방 좀 사서 쓰라는 엄마의 성화에 성과급 받은 걸로 하나 질렀다. 그다지 돈값은 못 한다(차라리 이 돈으로 여행이나 갈 걸..). 가방 같은 것에 워낙 관심이 없어서 사기 전엔 잘 몰랐는데, 주위를 보니 진짜건 짝퉁이건 온통 비슷한 류의 가방이라서(백화점 가면 같은 브랜드의 제품을 든 사람 수십 명은 족히 만난다.) 들고 다니는 게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왕 산 거라서 그냥 쓰긴 하지만...
다시 팔까 하는 생각에 필웨이 같은 데를 기웃거렸는데 거기가 또 놀라운 세상이다. ‘예쁜 아이예요. 이 아이 꼭 데려가세요.’ ‘아주 귀여운 녀석이랍니다.’ 등등... 많은 여성들이 가방에게 사람과 같은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의인법은 시에서나 어울리지, 고가품이라 해도 물건은 물건일 뿐, 그것을 향한 애정어린 어법이 내게는 영 낯설다.
이 책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명품에 열광하는 이유를 다양한 계층/직종의 사람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서 분석한다. 말하자면, 사치소비의 심리학이다. 생생한 인터뷰와 구어체 문장 덕택에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먼저 저자는 ‘명품’이란 용어에 문제를 제기한다. 원래 이 말은 장인이 만든 예술품을 가리키는 단어로 일본에서도 장인/명인이 만든 물건에만 쓰는 말이다. 영어로는 luxury goods, high-end products, premium products 정도가 가장 비슷한 어휘로 사치품, 고성능품, 고가품을 의미한다. 외국의 고가 브랜드를 ‘명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책에 따르면, 이 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치품 마케팅이며 그 희생양은 중산층이다. 대대적인 판촉 행사에는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초고소득층이야 상관없지만 중산층이 사치품 소비의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그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는 것. 저소득층은 말할 것도 없다.
계층을 가리지 않는 사치품 선호 욕망의 근원에는 변신에의 열망과 초라함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구조, 갈 데 없고, 놀 데 없고, 쇼핑하는 것이 여가 선용이자 취미 생활이 되어버린 우리 삶의 구조를 문제 삼는다. 삶에는 수많은 종류의 쾌락이 있는데 오직 소비만이 쾌락이 되어버린 구조.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제한될 때 사람들은 물건을 통해 자신을 표출한다. 사람들 역시 이러한 삶의 문제점을 알지만 고착화된 삶의 구조 때문에 쉽사리 헤어나지 못한다. 한국 사회의 지나친 분주함과 스트레스는 이러한 현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미학적 여가’를 주장한다. 참된 의미의 여가를 회복하는 것이 고급 상품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동감이다. 나 역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산과 자연을 많이 찾아 다녔는데, 바쁘거나 피곤해서 그럴 시간을 못 낼 때 기분 전환 삼아 백화점을 자주 찾게 된다.)
‘좋은 생활’은 ‘좋은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도 고급 상품이 아니라 삶을 즐길 줄 아는 온갖 종류의 능력이다. 친구를 사귀고, 자연과 교감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감성을 적실 줄 아는 것. 책의 마지막 문장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
“물건을 사는 열정을 삶을 사는 열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소비가 아니라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명품입니다.”
다음에 읽을 책. '루이비통을 불태워라'.
연말정산하면서 카드 긁은 비용에 충격 받고 새해엔 '합리적 소비'를 하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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