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구원, 인생의 문제에 대한 깊은 사색
"신과 나, 그것은 한밤중에 빛나는 두 개의 커다란 불빛이다." (뉴먼)
몇 년 전에 본 책인데, 책장에서 떨어진 것을 주워 올리며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책이 지닌 풍부한 의미 때문에 다시 봐도 새로웠으며, 예전에 놓쳤던 내용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은 '시간과 영원'에 관한 주제를 평생 고민해온 프랑스 대학자의 깨달음을 소설 형식으로 쉽게 쓴 책이다. 가톨릭 사상을 빼고는 프랑스를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가톨릭 신자인 나에겐 꽤 친숙한 내용이었지만 종교나 철학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겐 다소 어렵게 읽힐 수도 있겠다.
이 책은 죽음, 장례식, 심판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임종을 앞둔 저자에게 악마 루시퍼, 블레즈 파스칼, 베르그송, 드골, 소크라테스 등이 찾아와 삶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임종 후 그는 신 앞에 서게 되고, 미테랑과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가 그의 삶을 변호한다.
번득이는 유머와 빛나는 지식으로 가득찬 이 책은 우리에게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한다. 실제로 100세 가까이 산 저자가 생애 말년에 쓴 책이니 이 책에는 그가 그의 삶 전체를 통해 건져낸 해답이 담겨 있다.
1. 왜 신을 믿는가?
그가 파스칼과 나눈 대화는 왜 신을 믿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신인 절대와 신이 아닌 절대를 엄격히 구분한다. '절대'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누구나 절대를 인정한다. 문제는 유신론과 범신론 사이의 선택이다. 비인격적 절대인가, 인격적 절대인가의 문제.
그는 신은 전체가 아니고, 전체의 본질도 아니며, 전체의 주체도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초월적이며 인격체이고 자유로운 창조주라고. 인격적 존재보다 더 신에 가까운 것은 없다고.
신을 믿지 않게 되면서 자동적으로 비인격적 절대의 어느 한 형태를 믿기 시작한다. '무' 조차도 절대이긴 마찬가지이다. 만약에 진짜로 절대를 의심한다면 그는 절대가 무로서 인식되는 형이상학적 허무주의자라고 그는 말한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들처럼 회의론자가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상태가 유지될 수 없음을 깨닫고, 진리들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최초의 절대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의 정신이란 이 '진리'의 품안에서 사는 것이고, 이 '진리'의 광채 아래에서 사는 것이며, 이 '진리'를 향한 영원한 운동인 삶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진리란 진실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최초의 '진리'는 '존재'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합니다.
그는 제논과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일도 흘러가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이 씌어지고 모든 것이 연역되기 때문에 범신론은 시간을 정당화하는데 실패했다고. 시간은 엄연히 존재하고, 흘러가므로, 영원은 체계가 아니라고.
--진정한 영원이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영원으로, 인간의 자유와 창조와 시간에 일치하는 영원입니다.
2. 그리스도교는 무엇인가?
서양의 고대는 동양과 많이 닮아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우주적 범신론이다. 그곳에서 '절대'는 성서 안의 '신'이 아니라 '존재'이거나 '무'이며, 혹은 '자연'과 '세계의 실체'이다.
반면 현대는 인간이 절대이다. 인간은 선과 악을 결정하고, 모든 것의 기준이 되므로. 모든 의존을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을 '존재'의 꼭대기에 올려 놓는 것이기에 역시 공허하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고대 '운명'의 엄격한 법칙을 깨뜨리고 개인의 '자유'의 개념을 도입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운명'을 자체 내의 모든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의 초월을 향해 문을 연 사건이다.
그는 묻는다. 인간의 권리를 지닌다는 인간은 대체 누구인가? 인간의 위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인간은 신으로부터 권리를 받았는가? 그 점에 있어 서양은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가 보기에,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 없는 자유를 원하는 것이지만 어려운 시도이다. 개인과 자유라는 개념은 인격 '신'의 개념과 한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주의가 그리스도교를 파괴한다면, 계몽주의도 절멸될 것이다. 계몽주의는 동양적 범신론과 결합하고 싶어하는데 이는 허무주의와 활력의 결합이다. 그러나 계몽주의자들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도들만으로는 인간의 권리라는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었을 것이기에, 혁명은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은 전적으로 '신'에게 자신을 맡길 것입니다. '신'의 은총이 그들에게 재능을 부여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낼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범신론에 매력을 느낄까? 인간과 신과의 거리는 절망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도망을 친다.
--범신론은 죄인인 인간이 꿈꾸는 신의 화신입니다. 이것은 초월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은 채로 초월을 숭배하도록 해주고, 모든 잘못과 모든 죄를 넘어서서 신비한 결합을 목표로 삼도록 해줍니다.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무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토록 쾌락에 매달린다고 저자는 말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확신을 가진다면, 계속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다면 우리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쾌락은 기쁨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
그리고 둘의 대화는 성서와 예수에게로 옮겨진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중심 사건인 '부활' 사건의 독창성에 주목한다. 하나의 전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사도들은 즉시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복음서는 전설일 수 없다고. 시간이 너무 짧다고.
신화는 영원한 현실의 구상일 뿐이지만,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과 분리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구원은 '신'이라는 관념(그것이 진실이더라도) 안에 빠지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말한 '신'의 실제의 '말'을 듣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성서는 사건의 진실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모든 신비적인 책보다 매우 높은 위치에 놓이는 것입니다....나에게 있어 진정한 기적은 이 얼어붙은 세상에 사랑과 용서가 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사랑'이었다는 믿음이 나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그 사람처럼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도 '사랑'이라는 말이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사랑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얼어붙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제명되었습니다. 그것은 형틀 위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봅니다. 이러한 조건 안에서 삶이란 무엇이며, '신'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사랑'의 출현 증인이었던 사도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절망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무덤에서 나간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내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전설이 아닙니다.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초창기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그것은 기적이며, 신비로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죽음을 이긴 것과, 이후 모든 인류는 이 죽음을 이긴 '사랑'의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종종 '무'를 동경하며 혹은 시간 안에 다시 태어나고 싶어한다. '신' 안에서의 불멸과 부활은 너무나 숭고해서 믿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예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도 산상설교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것이 사랑의 출현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창조이며, '사랑'의 계시입니다. 그 총체성 안에서 인류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재능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건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복음서들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당신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냐는 베르그송의 질문에 그는 답한다.
--사도들의 의심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들의 믿음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초현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무능력한 하늘을 향해 침을 뱉고, 인간의 계급투쟁을 위해 사는 데 우리의 노력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3. 가톨릭은 무엇인가?
--개별적인 모든 연결은 보편적인 우정을 향해 열려 있지 않은 한 깊이가 없습니다.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전체적인 연결이야말로 무한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교황은 그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왜 신을 믿는지, 그리스도교를 믿는지가 아니라 왜 가톨릭교도가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그는 몹시 어렵게 답을 한다. 가톨릭은 순종해야 한다고 들은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가톨릭 신앙은 최고도의 자유를 요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유에 대한 사랑을 계발시키는 순간, 그것은 '신'에 대한 순종을 말하기 시작하는 종교입니다. ..... 그것은 인간에게 인간은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신'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교황은 묻는다.
--당신은 인생을 이겼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신'이 내게 말해 줄 것입니다.
--기통, 벌써 다 죽은 사람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시간은 아직 다 소모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은 미결입니다.
저자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러나 교황은 신의 이름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다.
--교황님, 나에게 아직도 사랑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시간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시간이 있는 법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싸웠고, 탐구했고, 믿었고, 또 깨달았지만, 사랑을 늘 다음으로 미루어왔다고 말한다. 자신의 마음은 닫혀 있다고. 교황은 그에게 사랑의 고백을 요구하고 그가 그 말을 내뱉는 찰나에 임종이 닥친다.
4. 악의 문제에 대한 고찰
--영광이란 두려움도 없어지고, 보답할 수도 없을 때 오는 것입니다.
--기통, 비겁함이란 무엇입니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남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치가 아닌 순응이지요.
--나는 다른 이들의 눈에 나를 정당화시키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드골은 사람들이 '악' 때문에 신을 믿지 않게 되어 피안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것은 궤변이라고 반박한다.
첫번째, '신'은 없고 피안은 있는 경우는 의미가 없다. 만약 누가 고래의 뱃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두번째, '신'도 피안도 없는 경우, 악은 있는데 악의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의미의 부재를 고통스러워 한다.
세번째, 피안은 없고 '신'은 있는 경우, 그것은 죽기 전의 행복 즉 무 앞에서의 행복이다. 이때 인간은 반드시 반항하게 된다. 기통은 사람들이 무신론자라고 말할 때 그렇게 반항한다고 말한다.
네번째, '신'도 피안도 있는 경우, 기통은 악과 악의 문제를 제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악이나 악의 문제를 부정하면, 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것의 해결은 불가능하지만 제안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신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다.
드골은 진정한 문제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는 '신'을 믿지만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 네 가지 변증법이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며 죽은 딸 아이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 아이를 절망적으로, 그리고 절망을 넘어 내 마음의 눈물로 얼룩진 허무 안에서 사랑했습니다. 나는 내 영혼의 불멸에 대해선 거의 믿지 않았지만, 그 아이의 영혼의 불멸만은 언제나 믿었습니다.
그러자 저자는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을 들려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 너는 죽지 않을 거야."
5. 사랑, 그리고 그 안에서의 영혼의 불멸
저자는 자신의 장례식을 지켜본 후 철학의 왕자 소크라테스를 만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오만의 죄를 지었음을 이야기한다. 오만이란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원하고, 누구도 신뢰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 그는 진리는 자신의 마음 속에 늘 있어 왔지만 본질적인 것은 타인에게서 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것은 기통,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당신을 당신이 아닌 모든 것과 연결시키는 현실적인 끈이며, 그것은 타인이 당신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또 제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주는 증여에서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닫혀 있고 독립적이라면, 당신은 전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은 지식과 의지를 연결시키는 하나의 형태입니다.
--기통, 자신의 사상을 퍼뜨린다고 해서 젊은이들에게 일생을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죽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수천 수입억의 사상들도 단 한 사람의 가치만 못합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살아야 하고, 또 죽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희망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당신은 영원에 대한 욕망이 없습니다. 당신이 유죄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강한 애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왜냐하면 나는 불멸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무를 확신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당신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기통,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명료함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무를 확신케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거대한 절망의 무게이지요.
그리고 이때 모리스 블롱델이 찾아와서 영혼의 불멸에 관한 대화를 전개한다. 저자는 우리가 비인격적 절대의 한 부분일 때 인간 개개인의 삶은 단순한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개개인의 인격 역시 의미를 지닐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신이 인격을 지닐 때, 인격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으며, 나머지 모두의 존재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당신에게 있어서 영혼의 불멸은 자명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확실해 보이는 진리와 논리적으로 동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블롱델, 그것은 자명합니다.
--설명해 보십시오.
--우리가 범신론자이거나 유물론자일 때(그것은 종종 같습니다), 우리는 더욱더 '끝없는 공간의 영원한 침묵'에 대해 사색하려고 애씁니다.분명히 아무 의미도 없는 무 안으로 거의 증발되어 가다시피 하면서, 우리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고 믿기에 이릅니다. '절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비의식적인 것, 비인격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간 개개인은 이제 신적이며 무의식적인 이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개개인의 인격적 영속이라는 개념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겠습니까?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습니다, 기통.
--그러나 '신'이 인격을 지닐 때, 우리는 인격보다 더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블롱델, 그 나머지 모두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인격이 됩니다. 따라서 당신이 '신'을 믿는 그 순간부터, 아니 인격적인 '신'을 믿는 그 순간부터 당신은 당연히 인격의 불멸을 믿게 되고, 인격의 소멸이라는 관념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결국 장, 당신의 의견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영혼의 불멸은 인격적 '신'의 존재의 필연적 귀결에 지나지 않거나 논리적 등가물이 됩니다. 두번째 논증도 있습니까?
--네, 바로 이것입니다. 나에게는 '신'을 믿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후에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를 아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 말을 믿습니다.
저자는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영속이 당연한 일임을 이야기한다. 자기 영혼의 깊은 굴곡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있어 영혼은 불멸의 것이며, 그 영혼에서 우리는 신의 눈길을 만난다.
--나는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영속이 매우 단순한 일임을 압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신'과 합체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벌레나 땅 표면에서 솟아나는 곰팡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바깥에서 관찰하고, 지나치게 그들의 육신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블롱델, 내면에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간직한 기억의 깊은 굴곡을 주파해 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영혼 하나가 우주 전체보다 더 넓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저자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한다. 동물에게 삶의 의미는 존재의 유지와 종족의 번식, 우주 생태계 질서 안의 자리잡음이지만 인간은 다르다고 말한다.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블롱델. 그는 '사슬 위로의 도약'을 하였습니다. 분명 인간도 삶을 영위하고,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키고, 세상과 세상의 필요에 봉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개인적인 운명의 성취에 종속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스스로 초월하기를 갈망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세상의 피안, 사회의 피안, 시간의 피안을 겨냥하는 하나의 인생을 입증합니다. 1백 세가 되어도 그는 언제나 20세인 것입니다.
--인간이 언제나 젊은 채로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앞에 영원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조건하에서는 그렇습니다.
저자는 사회가 지나치게 빈곤하거나 지나치게 풍요로운 경우에 사람이 허무를 지향하게 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때 사람은 존재하려는 꿈, 행복하려는 꿈을 포기하고 인격의 망각을 통한 초월을 꿈꾼다.
--장, 인격의 망각을 통해 구원을 실현하는 종교철학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은 의식의 폐지와 개성의 붕괴를 통해 구원을 실현합니다.
--그들은 지나치게 폐쇄되고 빈곤한 사회와 일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 전체가 사람을 지나치게 억누를 때, 사람은 세계를 지배하고,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꿈을 포기합니다. 사람은 존재하는 것조차, 또 행복을 추구하는 꿈을 포기합니다. 사람은 허무를 지향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일자'와 일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나치게 자유롭고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미 우리는 그것과 맞서 싸우고, 거기에서 일하고 충동을 억제할 이성을 볼 수 없습니다.장애물과 물질과 법이 결핍되어 개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즐기기 위하여 거기에 있을 때, 우리는 허무를 필요로 합니다.
저자에게 완전한 '무'라는 관념은 허위이지만, 그것을 통과한다면 길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결론은 신이 우리 영혼을 비추는 한 영혼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이 인격체라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완전한 '무'라는 관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약 거기서 멈춘다면 블롱델,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을 지나간다면, 그것은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에서 완전한 '무'가 허위의 관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당신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이것입니다, 블롱델. 즉 '신'이 그것을 무화시키지 않는다면, 영혼은 불멸합니다. 또 '신'이 그것에 말을 걸고 그것을 비춘다면, 영혼은 저세상에서도 생각을 계속할 것입니다. '신'이 인격체라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드디어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마리 루이즈를 만난다.
--인간의 사랑은 무엇이지요?
--반사되고, 내면화되고, 정신적인 것을 향해 올라가는 생의 도약이죠. 표면에 있는 것은 젊음, 미모, 열정, 쾌락이에요. 첫번째 심층부에 있는 것은 기쁨, 명예, 신뢰, 존중, 사랑의 존경, 부드러운 관용, 굳건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애정이지요.
--그럼 심해에 있는 것은?
--심연을 부르는 심연이죠.
그리고 단테와 함께 사랑과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단테, 인생에 심오한 것이 있습니까?
--'사랑'의 놀이와 '하느님'의 놀이입니다.
--어디에 '신적인 사랑'이 있습니까? 어디에 인간적인 사랑이 있습니까?
--기통, 그의 시선 안에서 당신은 불타오르는 두 개의 불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좀더 크고 눈부시며, 다른 하나는 좀더 작고 춤추는 것이었습니다.
--단테, 당신은 삶과 젊음,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리고 광기와 매력, 관능에 대해서는?
--그런 것들은 작은 불꽃의 반짝거림입니다.
--인생은 무엇입니까?
--..... 시간의 모든 아름다움은 영원한 숭고 안에서 거합니다.
--그럼 순간은?
--모든 반짝임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에서 분출되는 것인 한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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