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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펌 자료

펌) 젊은 무명 교사의 죽음에 대하여 / 곽은주 (따돌림사회연구모임)

by 릴라~ 2023. 8. 22.

송승훈 쌤의 페북에서 보고 옮겨놓는다.
교사들이 가장 힘들어하고 마음 아파하는 건 악성 민원이나 교권침해 그 자체가 아니라
교실을 배움과 성장이 있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가꿔나가지 못할 때다.
못된 아이들이 장악한 폭력적인 교실에서
가장 깊은 절망과 슬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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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무명 교사의 죽음에 대하여“  / 곽은주(따돌림사회연구모임)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폭력적인 교실이다.

혹자들은 서이초 사건의 원인은 악성 민원을 넣는 학부모의 갑질이므로 교장이나 교감에게 민원을 일원화시키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동학대로 신고당할까봐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지도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아동학대법의 개정을 요구한다. 그래서 악성 민원과 아동학대 신고로 무력화된 교사의 생존권과 인권을 지켜달라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두 가지가 해결된다고 해서 과연 교사의 고통이 사라질까?

무엇이 고인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곰곰이 더듬어보면 아동학대로 신고당할까 두렵거나, 학부모 갑질 때문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인처럼 아이들을 사랑하고 잘 가르치고 싶었던 교사는 적극적으로 교장, 교감에게 상담을 요청했을 것이고 학부모를 설득하려고 했을 것이다. 고인을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은 것은 바로 ‘못된 아이들이 장악한 교실’에서 교사로서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슬픔이었을 것이다. 고인의 유족은 집회에서 “물건을 던지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폭력적인 행동을 했던 몇몇 아이들의 모습과 동료 교사들이 힘든 상황을 당할 때마다 동생은 자기 일처럼 괴로워하고 무서움에 떨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고인의 업무수첩에는 교사에게 막말을 하는 학생과 가위질을 하다가 수틀리면 소리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학생의 문제행동, 학급 붕괴를 걱정하는 내용, ‘아이가 뭘 하든 놔둬야 하나’라는 고민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보도되고 있다. 그런 고민을 동료 교사에게 호소했을 때 동료들 역시 고통받고 있거나 그 해 운으로 돌렸을 터이고, 교감에게 상담을 요청했을 때 ‘전화번호 바꿔라, 학부모에게 상담 치료를 권유해라’ 정도의 소극적인 방어밖에 안되는 조언만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이겨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못된 아이들이 장악하는 교실에서 교사는 매일 집단린치를 겪는다. 하지만 그곳은 피할 수 없는 교사의 일터이다. 필자는 서이초 사건의 이면에 ‘학교폭력’이 있었고 교사와 다른 선량한 학생들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건이었다고 판단한다. 못된 아이들의 난장으로 인해 선량한 아이들이 수업을 듣지 못하고, 못된 아이들을 바르게 훈육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고인은 매우 괴로워했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폭력적인 교실의 모습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누구보다 뜻을 가지고 교사가 되었건만 자신의 교육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했을 것이다.

20년 차 중학교 교사인 필자도 15여 년 전부터 교권 침해를 당해왔고, 사례 부자라고 할 정도로 건수도 많다. 그때에도 교사는 강자가 아니었다. 강자에서 약자로 가는 그 중간쯤이었던 것 같다. 학생이 마음대로 자리를 바꾸어서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했더니, 자는데 깨웠다며 모두가 있는 교실에서 의자를 던졌다. 처음 그런 일을 겪었을 때는 필자가 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무척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사건의 본질을 분석해보면 학생이 다른 학생을 관객 삼아 센 척을 하려는 욕구가 과하여, 교사를 약자로 만들고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 지위를 높이려는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년범죄의 경우, 과시 욕망과 결합 되어 가해자들 스스로 범죄사실을 공개하고, 피해자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더 잔인한 가해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교권 침해는 학교폭력과 맥을 같이 한다. 만약 필자가 이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면 필자는 학교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교사의 교육이 학생의 폭력적인 욕망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학교의 현실이고, 이로 인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학교폭력 피해 학생과 교권을 잃어버린 교사일 것이다. 학생의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학부모가, 학생이 중고등학생이 되면 학생 자신이, 자기의 이익과 자유를 최대치로 만들기 위해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현장에서 많은 교사들이 숨죽인 채 울고 있다. 혹은 교권보호위원회에서도 온전히 보호받지 못한 채 학생 지도 못한다고 비난받거나, 심지어 교육청의 직위해제로 교육자로서의 생명을 놓게 되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더 이상 무력할 수는 없다

교사들이 언제부터 아동학대를 걱정하고 악성 민원을 두려워해야 하는 현실에 놓이기 시작했을까? 대개의 경우 아동학대 이전에 학생들의 교권 침해나 교육 활동 방해가 있었고, 학교폭력 가해 행위가 먼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교장, 교육청, 정부는 학생의 뻔뻔함과 폭력성, 모욕적인 행동으로 교사가 힘들어할 때 교사라면 당연히 참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을 조장했다.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고작 ‘교무수첩에 기록해라(우리는 전문용어로 ‘적자생존’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는 아동학대로 신고될 수 있으니 안 당하도록 조심해라‘, ’학생 인권 침해이니 이런 경우는 안 건드리는 게 좋다’ 등 교사의 생활지도를 인권 침해로 축소해버렸다.

교권보호위원회나 선도위원회가 있지만 초등에서는 거의 열리지 않고, 중등에서는 관리자들이 자신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예상되는 학부모의 반발을 나열하는 것으로 은근히 만류한다. 그것은 피해 교사에게 보호받을 수 없겠다는 두려움을 주었다. 그러는 사이 교사들은 아이들의 경미한 폭력(장난을 빙자한 폭력, 일상적인 놀림과 비하,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는 폭력)은 지나치거나, 수업 시간에 자도 깨우지 않고, 교칙을 어겨도 학생이 반발하지 않게 좋게 말하고 넘어가는 등 점차 생활지도를 소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수업 중 자는 학생을 깨우거나 생활지도를 하는 교사는 교권 침해를 당하기도 하고, 아이나 학부모에게 아동학대로 신고당하거나 신고하겠다는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학생의 가해 행위와 교육 활동 방해 행위가 아동학대 신고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게다가 학부모가 교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유명 웹툰 작가 사건이 그 예이다. 그는 입장문에서 교사를 고소하면 중재가 될 줄 알았다는 상식 밖의 말을 했다.), 그로 인해 피해, 2차 피해를 입은 교사가 학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맞고소를 하기는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아마도 고인은 못된 아이들이 장악한 교실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학생 교육을 위해 학부모와 교장, 교감의 협조와 지지를 구했지만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해 길을 잃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만약 학교 내에서 평화 학급을 위해 집단적인 대책을 세웠다면 희망을 찾을 수 있었을까?

필자 역시 못된 아이들이 장악해버린 학교를 경험했다. 학교폭력대책위원회 건수가 교육청의 학교평가에 반영되었던 때라, 학교폭력에 대한 축소 은폐가 비일비재하던 때였다. 하여 우리 학교는 선도위원회, 학교폭력자치위원회 건수가 0건이었다.(예전에는 교육청 단위가 아니라 학교에서 학폭위를 열었다.) 각 반에 못된 아이들은 4~5명 정도 되었고 10개 학급이었으니까 합치면 50명 가까이 되었다.

이들은 교사의 정당한 지시와 교칙에 불응하기 일쑤였다. 분노조절을 못하는 척하면서 문짝을 부수거나 수업 중에 뛰쳐나가 다른 반 수업을 방해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을 자랑하듯 교실 바닥에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만 피해자가 되는 건 아니다. 숨겨진 거대한 폭력의 뿌리들이 감자 알갱이들처럼 땅 밑에서 자라고 있었고, 겉에서는 드러나지 않기 위해 숨죽여야 했던 피해 학생들이 투명 인간처럼 표정 없이 수업을 지켰다.

필자와 동료 교사들은 선량한 아이들의 피해에 아파했고 아무 조치를 하지 않는 학교에 대해 분노했다. 그리고 학년에서 힘을 합해 역할 분담을 했다. 선도위원회 결재가 나지 않으니 학년부장을 중심으로 자체 선도를 했고, 아이들에게 설문을 하여 숨겨진 피해 사실을 받아냈다. 교육적 처벌과 반성문, 사과 교육도 했다. 학년에서 10명의 동료교사들이 역할을 나누어 맡았고, 필자의 역할은 학부모와 학생이 이해할 수 있게 교칙과 법을 설명하는 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이 사례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당시 동료 교사들은 아동학대고 뭐고 이런 교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살기 위해 더 이상 무력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뭉쳤던 것이다.

우리가 서이초 사건을 한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문제, 사회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대다수의 교사가 폭력 교실 속에서 고통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학부모 갑질도 아니고 아동학대법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원인 중 하나지만 본질적 원인이 아니다. 본질적 원인은 교실에서의 폭력이다. 교권 문제는 학교폭력을 해결해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교실을 장악하고 센 척으로 인정받으려는 아이들의 욕망과 내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손해봐서는 안된다는 나르시스트 학부모들이 교실을 무너뜨리고 교사를 약자로 만드는 현상을 막지 않으면 교사의 고통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사에게 학생 생활지도권을 포함한 교육권을 부여하고 선도위원회를 법제화시키며, 가해 학생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학생과 교사를 우선 보호하는 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학교폭력법은 교사를 신고의 의무만 가진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일상에서 아이들 간 괴롭힘을 상담하고 중재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교사뿐이며, 선량한 피해 학생을 돕고 안타깝게 폭력의 길을 가고 있는 학생들을 선도할 사람도 교사뿐이며, 내 자녀가 타인과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학부모를 설득할 사람도 교사밖에 없다는 것을 교사들은 다 안다.

교육 당국이 교사를 방어만 할 수 있는 약자의 위치에 묶어두고 몇 가지 제도만 개선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교사가 적극적으로 가르칠 권리를 법적으로 명시하여 권한을 주어야 한다. 권한이 있을 때 교사 역시 전문성을 키워 폭력 교실을 평화 교실로 만들 수 있다.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교권 침해 피해 교사를 관료적으로 대하는 교육청과 학교 관리자의 2차 가해의 사례가 너무나 많다. 학교폭력과 교권 침해가 상통함을 이해하고, 학교폭력 피해 학생과 교권 침해 피해 교사를 우선 보호하는 법의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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