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중푸팅에서 만난 숲의 사람 (2) 오랑우탄 보호센터에서 리키캠프까지
▲ 탄중하라판의 오랑우탄
탄중푸팅(Tanjung Puting)에서의 첫 아침, 천지를 진동하는 새들의 노래 소리에 잠을 깨었다. 마치 딴 세상에 온 듯 신선하다. 운좋게도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커다란 ‘혼빌’을 볼 수 있었다.
날이 밝아 첫 번째 캠프 탄중하라판(Tanjung Harapan)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이곳 주민인 다약족은 오랑우탄 사냥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루테의 설득과 요청으로 마을은 공원 밖으로 이주하였고 이 지역은 1982년 이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현재 탄중하라판에는 오랑우탄 보호 센터가 있으며 네 살에서 다섯 살 정도의 새끼 오랑우탄들이 산다. 모두 어미를 잃은 고아들이다. 캐나다 출신의 비루테 골디카스는 십여년 동안 고아 오랑우탄들의 대리모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인도네시아 국립대학의 교수로 일하며 탄중푸팅에는 가끔 들른다고 들었다.
새끼 오랑우탄 넷이 식사시간이 되어 우리에서 걸어 나왔다. 바나나와 우유를 먹고는 근처 나무를 타고 장난치는 귀여운 모습을 신기해하며 지켜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꼭 사람 같다.
▲ 탄중하라판의 오랑우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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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계 언어로 오랑(orang)은 사람, 우탄(utan)은 숲이라는 뜻이란다. 처음 오랑우탄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그는 꼭 ‘숲의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천 오백만년 전, 우리 인간과 오랑우탄은 조상이 같았지만 그 후로 둘은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비루테는 이들 유인원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잊어버린 과거, 먼 선사시대의 인류를 이해하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인간의 사촌 뻘 되는 이 ‘숲의 사람’들은 인간이 지구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종이라는 사실, 수억만년에 걸친 생명의 역사, 그 마지막 가지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내게 뚜렷이 각인시켜 주었다.
탄중 하라판을 떠나 두 번째 캠프 폰독탄귀(Pondok Tangui)로 향했다. 가면서 때때로 배를 멈추고 물을 마시러 강가에 나타나는 긴코 원숭이 무리를 관찰했다. 네덜란드 원숭이라고도 불릴 만큼 코가 크다.
캠프에 도착, 공원 직원들이 바나나를 짊어지고 앞장을 섰다.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그 뒤를 따라 밀림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멈춘 곳은 야생 오랑우탄에게 먹이를 주는 장소. 직원들이 ‘우우우-’하고 오랑우탄을 부르는 독특한 소리를 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이 우기라서 숲 속에 과일이 많아서란다.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2월이면 야생 오랑우탄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다.
▲ Feeding place |
오랑우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남아 이 장소에 오지 않는 것이 공원 측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위안하며 캠프 사무실로 돌아왔다. 방명록을 들춰보니 한국 사람의 흔적은 없다. 유럽인이 대부분이고 일본 사람이 더러 보였다. 아직까지 우리의 인도네시아 여행이 자바와 발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오랑우탄은 철저히 혼자서 살아간다고 했다. 암컷과 수컷도 짝짓기할 때만 잠깐 만날 뿐 다시 헤어져서 각자 살아간다고. 한 스위스 커플이 정말 부럽다고 말해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오랑우탄의 이 놀라운 독립성은 철저한 위계 질서를 가진 마운틴고릴라와 구성원간 결집력이 그보다 다소 느슨한 침팬지와 확연히 구별된다.
미하엘은 동식물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어서 내내 훌륭한 동료 노릇을 톡톡히 했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마다 설명하느라 바쁘다. 훌륭한 자연 못지 않게 색다른 여행자들과의 만남도 탄중푸팅 여행의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들이 지닌 자연과 동물에 대한 해박함,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라 오지를 찾는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여행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캠프, 리키 캠프(Camp Leakey)로 가는 길은 가장 매혹적인 코스일 것이다. 강폭이 점점 좁아져 배가 겨우 지나갈 만한데, 물빛이 어느새 누런 황토색에서 빛나는 검은 색으로 바뀌어 있다. 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성분이 원인이라고 하는데 까만 빛깔이지만 박테리아가 살지 않는, 이 근방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물이란다. 강 전체가 거울처럼 숲과 덤불과 하늘과 구름을 그대로 비추어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뱃머리에 앉아서 강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리키 캠프라는 이름은 아프리카가 인류의 발생지라는 학설을 세우고 올두바이 계곡에서 초기 인류의 뼈를 찾는데 평생을 보낸 위대한 과학자 루이스 리키 박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리라. 그는 말년에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 마운틴고릴라, 오랑우탄에 대한 장기 연구를 계획했는데, 제인 구달, 다이안 포시, 비루테 골디카스가 바로 리키 박사의 제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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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 캠프는 탄중푸팅에서 유일하게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이어서 기쁨이 더했다. 카누를 타고 강가에서 빨래도 하며 여유로운 한 때를 보냈다. 여기에서도 숲 속, 야생 오랑우탄에게 먹이를 주는 장소로 갔는데, 예상했던 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꼭 보겠다는 마음이 그저 이기적인 욕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이 하나 둘이 아니기에. 어떤 땅은 인간의 발자취로부터 지켜져야 하고 그 온전한 성스러움이 보존되어야 하리라 생각했다.
다음 날 오전 내내 정글을 트레킹했다. 혹여 야생 오랑우탄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그러기엔 숲이 너무 넓었나 보다. 원숭이들, 이사하는 개미떼, 질주하는 노루만 스쳐갈 뿐, 아름드리가 넘는 열대 우림과 이끼 자욱한 습지 속에서도 오랑우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낮, 숲의 고요하면서도 힘찬 숨소리, 그 거대하고 당당한 생명의 소리만을 마음에 담은 채 클로톡으로 돌아와야 했다.
▲ 밀림에서 |
마지막 밤, 때마침 구름이 걷히면서 하늘에 번지는 수많은 별들. 신기하게도 별들이 내가 사는 고위도 지방보다 더 푸른 빛을 띈다. 여기가 적도와 가까워서란다. 그 아름다움에 감동한 나는 미하엘에게 ‘the Circle of life’를 믿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그것은 ‘믿음(belief)’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fact)’이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를 이룬 생명 에너지는 다시 저 강과 숲과 구름의 일부가 될 거라고.
살아있는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의 자리가 무엇이고, 인간의 삶이 과연 어떠해야 할까. 전세계적으로 열대 우림이 사라지고, 야생 동물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지금, 이 숲의 사람들은 언제까지 살아남게 될까. 파괴의 거센 물결 속에서 인간은 또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까.
날이 밝아 클로톡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흘 만에 다시 드넓은 쿠마이 강이 저녁 햇살에 빛나며 우리 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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