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쉽고, 걷기 코스라고 생각하면 만족스러운 길이다. 욱수골은 400미터 정도의 나즈막한 야산이지만 대구와 경북의 경계 지점이라 골이 매우 깊다. 겹겹의 산들이 끝모르게 이어진다.
그동안 나는 이 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잡목이 너무 많아서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청에서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근래에 산이 많이 좋아졌다. 나무들을 솎아내면서 숲이 훨씬 밝고 건강해졌다. 더 푸르러지고 싱싱해지고. 체육공원까지 가로등을 설치한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전체적으로는 숲도 좋아지고 등산로도 잘 정비되었다.
욱수체육공원에서 만보정, 욱수정 지나서 경산 성암산을 거쳐 덕원고교까지 약 여섯 시간 정도 걸은 것 같다. 큰 산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집 가까이 이렇게 길게, 종일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두 시간 정도 걷는 것은 산책이다. 휴식이고 기분 전환이다. 하루 정도 걷는 것은 다르다. 세 시간을 넘어서면 몸이 점점 가벼워지고 상념이 비워진다. 우리의 신체가 비로소 일상과 다른 리듬을 타게 된다. 평소에 잘 쓰지 않던 몸을 전체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인지, 자연의 생기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존재의 기쁨이라 할 만한 어떤 생기가 우리 몸과 마음을 채우기 시작한다.
일주일쯤 걷는다면 어떨까. 안나푸르나에서 여드레를 걸으며 참으로 행복했다. 우리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 같은 것이 부서지면서 마음이 맑고 가벼워졌다. 근육 속에 몰래 웅크리고 있던 상념의 덩어리들이 사라진 것 같았다. 걷다보면 알게 된다. 일상의 중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를 한계 짓고 있음을. 한달 쯤 걷는다면 어떨까. 정말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도보여행은 일종의 순례이다.
오체투지하면서 육개월 이상을 순례하는 티벳 사람들은 늘 경이의 대상이었다. 스무 살 때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길이 끝날 때까지 걷는 것이었다. 끝없이 걷다가 지쳤을 때 그 자리에서 죽는 것. 하지만 방황도 방랑도 원껏 하지는 못했다. 때에 맞춰 취직했으며 일하는 사이사이 여행을 했다. 더 가고 싶을 때 늘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상의 해야 할 일들이 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긴 여행이 부담스러워지는 일이 생겼다. 놀랍게도.
여행이 시시해지는 건, 이미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집 때문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경험이 지혜로 이어진다면, 그는 그 어떤 곳에서도 열린 마음을 유지하며,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경험은 아집으로 이어지고, 낯선 곳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의 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요즘 느낀다.
굳이 떠나지 않아도 좋지만, 떠났다면 순간순간 열려 있고 깨어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신의 틀과 맞지 않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마음. 틀을 버릴 줄 아는 마음. 그렇게 일상에서도 일상 밖에서도 부드럽고 민감하고 열려 있을 수 있다면, 누추한 곳에 머물지라도 삶은 빛날 것이다.
비가 내리진 않았지만, 종일 습한 날이었다. 축축한 숲속을 걸으면서 내 피부와 심장도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 이 탑을 쌓은 사람의 소망이 이루어졌기를..
-> 덕원고로 하산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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