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강에 기말 시험까지 모두 끝났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시험 후에 날을 잡아서 뒤풀이를 했다. 그러고나니 그래도 뭔가 마무리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험은 공부할 주제를 미리 알려주었다. 3, 4학년이라 전공 과목으로 다들 힘들어하고 있어서 부담을 줄여주려는 의도도 있고, 또 이 주제에 대해 미리 좀 깊이 생각하라는 의도도 있었다. 대략의 방향을 제시해서 그런지 학생들이 답을 모두 진지하게 잘 적어내었다. 수업 시간에 다룬 개념을 활용해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는 류의 문제였기 때문에 읽으면서 참 재미있었고, 나 자신도 다시 생각하고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학생 수가 적어서 균형평가(의무적으로 C 30% 등을 주는 제도)를 안 해도 된 것이 큰 이유이기도 하다.)
3~5월, 일주일에 한 번, 너무 짧은 만남이긴 했지만 대학생들은 지식을 자기화할 수 있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가장 전력 질주해서 공부할 시기는 중고교가 아니라 대학이라는 생각도 했다. 고등학교 공부도 수능 문제풀이가 아니라 대학처럼 좀 더 깊은 주제를 다룰 수 있으면 학생들이 많이 발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중고교의 '무거운' 만남의 형식에 익숙해 있던 터라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대학의 '가벼운' 만남의 형식이 처음엔 낯설었는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 나라 중고교의 담임 체제가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떠맡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하루 종일 학생들을 붙잡아두는 건 물론이고, 학생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담임이 모두 책임져야 하는 구조가 과연 정상일까 싶기도 했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담임이 마치 부모처럼 모든 걸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구조. 만남의 형식은 무겁고 단단하지만 그것이 질적 소통과 교류까지 담보된다고 볼 수 있을까.
강의의 경우, 만남의 형식은 가볍지만 소통의 질까지 가볍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삶의 내용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형식. 그 누구에게도 크게 얽매이고 의존하는 것이 없이 책임이 스스로에게 부여된 만남의 형식. 좀 더 자유롭고 열려있는 만남. 굳이 선생과 학생을 가르고 스승과 제자를 찾을 필요 없이, 잠시 잠깐 함께 걸어가고 또 각자 스스로의 길을 따라 헤어지는 것. 이게 더 좋지 않을까. 불과 3주만에 바뀐 생각이다.
그러고보니 비정규직 교수의 '자기 자리 없음' 역시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온갖 행정 업무와 기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으로 강의만 해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경제적 상황이 허락하고, 내 경우처럼 주업이 따로 있어서 학과 내 각종 인간 관계를 신경 안 써도 되는 입장이라면. '자발적 가난'을 수용할 수 있다면 정규직은 가질 수 없는 자유를 누릴 수도 있었다.
물론 나를 포함하여 우리들 대부분은 그 자유를 스스로 채울 능력이 부족하다. 돈으로, 나 바깥의 어떤 것으로, 소비적인 활동으로 삶을 채우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사회적 자리가 부과하는 책임감과 존재감 없이 자기 삶의 빈 자리를 스스로의 정신적 깊이로 채워가긴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르트르나 한나 아렌트, 소로-이들은 모두 비정규직이었다-처럼 철학자에게나 가능한 일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만.
십여 년의 공무원 생활 끝에 나 자신 너무 틀에 박힌 사람이 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프레이리가 강하게 비판했던 '마음의 관료화'가 내게도 많이 진행된 건 아닌지. 나도 모르게 미리 정한 커리큘럼/진도에 계속 얽매였기 때문이다. 여행은 하다보면 경로를 수정할 수 있는 것인데도.
강의 중반 무렵 밖에서 한 번 모여 논 일이 있었다.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 학생들이 그 다음 시간엔 각자 먹을 걸 싸와서 학교 잔디밭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남은 기간 동안 다루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뤘는데 결국 시간이 부족해 하지 못했다. 내 설명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 추억거리를 놓쳤을까. 그때 그때의 우연에 따라 방향을 새롭게 고려하며 학생들의 다양한 욕망을 다 수용하면서 나아갈 수도 있었는데, 정해진 틀을 너무 고수했던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이다.
중고교의 획일성과 대학의 자율성, 이 두 공간의 차이가 내게 자유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새롭게 던져준다.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여기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좀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하고 싶다.
시험은 공부할 주제를 미리 알려주었다. 3, 4학년이라 전공 과목으로 다들 힘들어하고 있어서 부담을 줄여주려는 의도도 있고, 또 이 주제에 대해 미리 좀 깊이 생각하라는 의도도 있었다. 대략의 방향을 제시해서 그런지 학생들이 답을 모두 진지하게 잘 적어내었다. 수업 시간에 다룬 개념을 활용해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는 류의 문제였기 때문에 읽으면서 참 재미있었고, 나 자신도 다시 생각하고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학생 수가 적어서 균형평가(의무적으로 C 30% 등을 주는 제도)를 안 해도 된 것이 큰 이유이기도 하다.)
3~5월, 일주일에 한 번, 너무 짧은 만남이긴 했지만 대학생들은 지식을 자기화할 수 있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가장 전력 질주해서 공부할 시기는 중고교가 아니라 대학이라는 생각도 했다. 고등학교 공부도 수능 문제풀이가 아니라 대학처럼 좀 더 깊은 주제를 다룰 수 있으면 학생들이 많이 발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중고교의 '무거운' 만남의 형식에 익숙해 있던 터라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대학의 '가벼운' 만남의 형식이 처음엔 낯설었는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 나라 중고교의 담임 체제가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떠맡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하루 종일 학생들을 붙잡아두는 건 물론이고, 학생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담임이 모두 책임져야 하는 구조가 과연 정상일까 싶기도 했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담임이 마치 부모처럼 모든 걸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구조. 만남의 형식은 무겁고 단단하지만 그것이 질적 소통과 교류까지 담보된다고 볼 수 있을까.
강의의 경우, 만남의 형식은 가볍지만 소통의 질까지 가볍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삶의 내용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형식. 그 누구에게도 크게 얽매이고 의존하는 것이 없이 책임이 스스로에게 부여된 만남의 형식. 좀 더 자유롭고 열려있는 만남. 굳이 선생과 학생을 가르고 스승과 제자를 찾을 필요 없이, 잠시 잠깐 함께 걸어가고 또 각자 스스로의 길을 따라 헤어지는 것. 이게 더 좋지 않을까. 불과 3주만에 바뀐 생각이다.
그러고보니 비정규직 교수의 '자기 자리 없음' 역시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온갖 행정 업무와 기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으로 강의만 해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경제적 상황이 허락하고, 내 경우처럼 주업이 따로 있어서 학과 내 각종 인간 관계를 신경 안 써도 되는 입장이라면. '자발적 가난'을 수용할 수 있다면 정규직은 가질 수 없는 자유를 누릴 수도 있었다.
물론 나를 포함하여 우리들 대부분은 그 자유를 스스로 채울 능력이 부족하다. 돈으로, 나 바깥의 어떤 것으로, 소비적인 활동으로 삶을 채우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사회적 자리가 부과하는 책임감과 존재감 없이 자기 삶의 빈 자리를 스스로의 정신적 깊이로 채워가긴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르트르나 한나 아렌트, 소로-이들은 모두 비정규직이었다-처럼 철학자에게나 가능한 일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만.
십여 년의 공무원 생활 끝에 나 자신 너무 틀에 박힌 사람이 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프레이리가 강하게 비판했던 '마음의 관료화'가 내게도 많이 진행된 건 아닌지. 나도 모르게 미리 정한 커리큘럼/진도에 계속 얽매였기 때문이다. 여행은 하다보면 경로를 수정할 수 있는 것인데도.
강의 중반 무렵 밖에서 한 번 모여 논 일이 있었다.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 학생들이 그 다음 시간엔 각자 먹을 걸 싸와서 학교 잔디밭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남은 기간 동안 다루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뤘는데 결국 시간이 부족해 하지 못했다. 내 설명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 추억거리를 놓쳤을까. 그때 그때의 우연에 따라 방향을 새롭게 고려하며 학생들의 다양한 욕망을 다 수용하면서 나아갈 수도 있었는데, 정해진 틀을 너무 고수했던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이다.
중고교의 획일성과 대학의 자율성, 이 두 공간의 차이가 내게 자유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새롭게 던져준다.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여기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좀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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