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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아버지의 미소

by 릴라~ 2011. 8. 3.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후, 지하철 신매역에서 내려 아파트 사이의 작은 숲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오는 이가 낯이 익다. 평범한 체구에 짙은 우산을 쓰고 반바지에 슬리퍼, 그리고 머리가 거의 사라진 정수리, 바로 우리 아빠다.

두 눈이 마주치고 서로를 알아보자 아빠가 반갑게 미소를 지으신다. 엷은 미소였지만 순간 내 마음에 전해지는 그 따스함의 크기라니.... 무언의 격려, 격정이 없는 애정, 절대적인 지지, 계산하지 않는 평온함, 한결 같은 반가움이 담뿍 배인 미소. 나도 '아빠'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보내며 집으로 향하는데, 걸어오는 내내 그 미소가 마음에 가득 찼다.

이 세상에 어떤 남자가 저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내게 지어보일 수 있을까 했다. 이렇게 쓰고보니 완전 서른 넘어서도 부모 품을 못 벗어난 마마걸, 파파걸 같긴 하다. 내 감정은 그런 건 아니고, 타인에게 부모와 같은 사랑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 자식 지간을 떠나 떠나 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상대방을 그처럼 마음 깊이 환영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신비로웠다. 

저런 든든한 미소를 이성으로부터 받아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있다. 그런 작은 표정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남을 나이가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욕망과 갈애가 사라진, 상대방에게 그늘이 되어 주고 여백이 되어주는 그런 표정은 젊은 남자가 지니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를 향한 많은 미소를 보았지만 아빠의 오늘 그 미소만큼 정감 어린 표정은 잘 못 본 듯하다.


나 또한 그처럼 따스한 미소를 상대방에게 전한 적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런 절대적인 격려와 지지는 어쩌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부모의 애정을 특별히 우상화하고 싶진 않다(난 한국적 가족 관계에 대해 좀 시니컬한 편). 하지만 우리 부모의 자식에 대한 염려 섞인 애정은 내 마음을 살짝살짝 울릴 때가 있다. 특히 요새 그렇다. 학생 때는 자주 싸웠고 나도 무지 바빴고 우리 부모도 젊고 자기 일로 바쁘고 해서 그런 걸 많이 못 느꼈다.

은퇴하신지도 이제 꽤 지났고 몇 년 있으면 칠순이니 언젠가 돌아가실 날이 올 것이다. 운이 좋다면 이십 년쯤 더 사실 수도 있지만, 지금 건강해도 언제 갑자기 가실 지 모르는 그런 연세다. 떠나시고 나면 참 많은 것들이 생각나겠지만 아빠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오늘의 그 다정한 미소로 내게 남을 것 같다. 그 미소를 가능하면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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