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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인간과 상징 - 카를 구스타프 융

by 릴라~ 2011. 9. 2.

 

기회 되면 융 전집을 한번 읽어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이 책을 먼저 골랐다. 융이 일반 대중을 위해 쓴 단 한 권의 책이며 죽기 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이다. 융과 그의 제자들이 한 꼭지씩 맡아서 저술했다. 이윤기씨가 번역했는데 번역도 매끄럽고, 내용도 어렵지 않다. 좋은 책이다.

융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떤 책을 읽어도 마음에 남아 있는 약간의 허전함 때문이었다. 정치/사회학은 기본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역동적 관계에 주목한다. 사회가 개인을 규정하는 방식이나 반대로 개인이 사회에 영향을 주는 방식에 관한. 철학은 존재와 인식의 문제를 다루지만 논리로 사유하는 것이며 문학은 인간의 마음과 감정과 운명을 다루지만 그 지평이 시대와 역사를 넘지 않는다.

융 심리학은 논리와 과학으로는 다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탐사하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종교/예술적 표현에 드러난 상징과 그것을 창조해낸 인간 마음의 시원을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은 오랜 진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근대 사회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선사시대 이전부터 오랜 세월 동안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 숱한 세월 동안 인간의 마음은 꿈과 환상, 신화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해왔는데 그것은 논리적 언어가 아니라 '상징'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마음은 상징을 창조해왔고 그것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다. 융에 따르면 우리가 상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상징이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잠재의식의 전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고대인과 달리 자연과의 신비적 연결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그것은 '꿈'으로 나타난다. 꿈은 개인의 삶에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의 언어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지만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써 삶을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존재한다. 융은 이것을 생명체로서의 타고난 생명 현상의 일부로 보았다.

융에 의하면 우리 존재에는 어떤 '내적 중심'이 있다. 융은 그것을 '자기'라고 불렀는데 이는 우리가 지금처럼 삶의 온갖 편리를 누리기 전, 원시인들이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깊이 귀를 기울였던 자기 내면의 소리였다. 그것은 외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자신이 이 우주 속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깨닫는 삶의 의미를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오늘날 그 소리에 의지하지 않고도 삶은 가능하지만 그 결과는 의미 상실이다.

그 내면의 소리는 꿈을 통해 현대인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꿈은 본성의 객관적 표현으로서 주관적 생각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의식에서 밀려난 무의식의 '그림자'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성의 모든 측면을 두루 포함하는데 그 중 부정적인 것이 인격화된 것이 '그림자'이다. 전통적으로 자신의 삶을 찾는 여정은 그림자와의 싸움을 동반한다. 신화에서 괴물과 맞서 싸우는 모습으로 흔히 나타나는 대목이다. 그림자와의 대면은 한 인간이 자신의 전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이다.

융은 이처럼 의식적으로 '자기'와 대화하기 시작하는 것을 '개성화 과정'이라고 불렀다. 휴식도 일도 더 많은 교제도 취미 생활도 아주 조금밖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한 개인이 자기 삶의 신화적 의미를 찾아나서는 과업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인격이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으면서 시작되고, 어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무의식에 주목하면서 자기를 통합해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고대인에게도 현대인에게도 삶은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기의 '신화'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밤하늘을 채우는 무수한 별들처럼 인간 각자도 자신이 살아내야하는 삶의 심원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꿈과 환상은 물질적 세계만큼이나 분명한 실재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흔히 타인에게 투사하는), 그리고 우리의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예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 개성화 과정에서 우리는 반쯤 가려져있던 자신의 그림자를 비롯하여, 역시 자신의 무의식이 다른 성의 모습으로 인격화한 아니마/아니무스를 대면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기'의 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는 물론이고 '자기'의 소리마저도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들과 지향해야 할 것들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꿈은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의식적 통찰을 필요로 한다. 때로 우리는 내면의 물결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에 궁금했던 것이 이 부분이다. 내 마음의 소리가 내 본능의 소리인지, 더 깊은 지혜의 소리인지 항상 헛갈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자가 더 많은데, 경험적으로도 그랬지만,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를 충분히 대면하고 극복했을 때 '자기'의 소리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융은 때로는 '공리주의'를 버려야 할 만큼 이 과정이 저마다 독특한 개인적 과제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융 자신이 꿈과 무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개괄적 설명을 하고 2장은 고대 신화에 드러난 상징을, 3장은 개성화 과정을, 4장은 시각예술에 나타난 상징에 대한 해석, 5장은 개인 분석을 통해 상징의 언어를 설명한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1장과 3장이다.

특히 아니마/아니무스에 대한 부분은 예전에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해설이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1차 텍스트가 갖고 있는 힘이다. 대중서지만 500페이지 분량으로 충분히 서술되어 있고 이해를 돕는 화보도 많아서 좋다.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그 개인에서 분리되어 인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향하면 향할수록 우리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요즘 같은 사회적 동란과 변화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개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너무 많은 것들이 개인의 정신적, 도덕적 자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을 바르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현재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신화나 상징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pp81)

무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정동적으로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자아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기능을 계속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누구나 평범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의식하고 있어야만 무의식의 의미심장한 메시지의 내용이나 개성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전 우주와의 일체감을 갖는 동시에 이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갖는다면 이 긴장감은 참으로 대단하지 않겠는가? 한편으로는, 자신을 비하하여 통계 자료에 불과하다고 할 경우 그 사람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개인을 넘어서는 보다 거대한 진리의 일부라고 믿게 될 경우 그 사람은 땅에 발 딛고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같은 내적 대극을 어느 한쪽 극단에 치우치게 하지 않고 올곧게 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p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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