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한다는 것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17세기 유럽인데요. 이 책은 그 17세기를 대표하는 두 명의 철학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삶과 사상을 나란히 들여다보는 책입니다. 600페이지를 단숨에 읽게 될 만큼 저자는 이 두 명의 삶을 매혹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상반되는 삶을 통해 한 시대의 총체적인 그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답니다.
마흔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스피노자는 매우 일찍이 높은 수준의 자기 인식에 도달했던 철학자입니다. 아마 그가 이른 나이에 유태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과 철학의 운명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네덜란드에 정착합니다. 안경 세공 기술을 익혀 낮에는 렌즈를 갈고 그 외의 시간은 철학에 바칩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만물을 떠난 초월적 존재가 아닙니다. 만물이 자신에게 내재한 본성을 펼치는 과정에서 그 존재가 발현하는 것이 신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는 신이 이 세계의 단일한 '실체'이며 만물은 그 신이 펼쳐지는 다양한 '양태'가 됩니다. 만물이 자기 본성에 따라 행위할 때 신과 더불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일찍이 그러한 인식에 도달했고 그의 내면은 평온했으며 그는 삶에서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그 자신이라는 점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세계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간주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삶의 훌륭함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지요.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모든 면에서 스피노자와 정반대되는 개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천재인 라이프니츠의 관심 영역은 다빈치 이외에는 비견될 자가 없을 만큼 다방면에 걸쳐져 있습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갖고 왕과 제후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계획과 사업들을 제안했으며(그의 정책적 제안이 적힌 15만장의 종이가 아직 편집이 완료되지 않았다 합니다), 부와 명예를 비롯하여 살아가는 데 많은 것을 필요로 했던 외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채운 그 많은 다채로운 무늬들 아래에 그의 본질적 관심사를 보여준 것은 그가 말년에 전개한 '모나드론'으로 대표되는 형이상학입니다. 라이프니츠는 서른 살에 스피노자를 직접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로 여행합니다. 저자는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와의 만남이 남긴 정서적 충격을 소화하고 그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표출하게 되는 데에 40년이 걸렸다고 설명합니다.
이 세계 밖의 그 어떤 초월성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만물에 내재한 신을 이야기했던 스피노자에겐 인간 또한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한 양태입니다. 라이프니츠가 줄기차게 거부하고자 애썼던 것이 바로 스피노자였습니다. 궁정 대신으로서 17세기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에게서 본 것은 스피노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신에 미쳐 있던 남자였지만,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의 사상으로부터 예감한 것은 신 없는 근대성의 출현이었지요. 그는 그것을 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입니다. 인류는 자기 힘을 무한히 확장해가면서도 그것을 사익에만 귀속시키고 진정한 삶의 목적 의식을 잃어버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에게 마음은 물질적 과정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영혼의 불멸성을 입증하고자 했으며 인류의 비범함을 지켜내고자 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라이프니츠에게는 인간이 전부였다 할 수 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의 표현인 '모나드론'은 이 세계가 단일한 실체의 양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다양한 실체들, 즉 불멸하는 모나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나드는 일종의 씨앗 같은 것으로서 삶은 모나드들이 그 안에 원래 담고 있는 것을 펼치는 과정이지요. 신이 번쩍하는 순간 이 세계의 수많은 모나드들이 창조되었고, 각각의 서로 다른 관점으로서의, 각기 다른 본질로서의 모나드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우리는 모나드들입니다.
"두 철학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사랑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오히려 우리를 향한 신의 사랑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라이프니츠는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믿음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pp469)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피노자보다 더 깊이 무신론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신이 초월적 존재라면 이 세계 말고 신이 가능한 모나드들을 창조할 수 있는 더 높은 세계를 상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그 우선적인 세계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모든 세계들이 신이 창조한 하나의 참된 세계를 구성하는 특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결과적으로 만물이 신이라는 단일한 실체의 양태라는 스피노자주의와 가까워집니다. 반면에 여러 차원의 세계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신은 자신의 본성이 아니라 그 세계의 본성에 따라 행위하는 행위자에 불과하게 됩니다.
라이프니츠가 말한대로 신이 '모나드 중의 모나드'라면 각각의 모나드는 저마다 불변하는 본질을 갖기 때문에 신은 모나드들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모나드는 '창 없는 방'처럼 각각 독립적이며 서로 다른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나드들의 조화로 이루어진 우주는 엄격한 필연성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고 결정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엔 라이프니츠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문제가 잠재해 있습니다. 우리 삶의 활동이 마음 모나드, 신체 모나드 등 각각의 무한한 모나드들의 작용으로 설명된다면, 라이프니츠는 자신도 모르게 개체성 그 자체의 해체에 연루되면서 그가 성취하고자 한 불멸성이 내파되게 됩니다.
저자는 결국 모나드론이 라이프니츠의 삶을 닮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과학학술원을 비롯하여 인도주의적 정신이 담긴 많은 것을 기획했지만 그것이 결코 인간의 자비에 호소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았고 제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가 이 세계에서 목격한 풍경은 인간은 서로를 믿을 수 없으며 깨어지기 쉬운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모나드론은 세속의 세계가 아니라 그가 동경하는 세계를 묘사하고자 했지만 그 세계는 결국 그가 세상에서 본 풍경들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는 모든 모나드들이 서로 평등한 자격을 지니면서 신의 '예정 조화'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꿈꾸었지만, 이는 또한 각자가 '창 없는' 모나드에 갇혀 있으면서 모나드들끼리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그런 세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저자는 잔혹한 현실의 경험 세계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진리를 입증하고자 했던 라이프니츠의 삶이 끝없는 도전으로 점철되어 있는 굉장히 '인간적인' 성격의 것인 반면, 이 세계 밖의 어떤 초월적 진리도 없다고 본 스피노자의 삶은 이미 그 자신이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고, 삶에서 그 이상을 원하지 않은, 철학자가 지닐 수 있는 정신의 가장 고귀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도 물질적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 스피노자가 가장 정신적인 삶을 살았다면, 정신의 불멸성을 입증하고자 했던 라이프니츠가 현실 정치의 한복판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자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묘한 역설입니다.
저자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근대의 두 얼굴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가 스피노자의 세계가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처음 목격한 근대의 풍경과 더 가깝다고 말합니다. 실존을 설명하는 탈근대적인 담론들, 존재, 생성, 의지, 생의 강조 또한 "자연에 존재하는 신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스피노자주의로 기울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웰빙 열풍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에 대한 천착, 혹은 허무와 활력의 결합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지닌 정직한 이성으로 세계의 본질을 탐구했지만 그는 스피노자가 가진 '자연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스피노자주의에 기울었지만 스피노자의 삶을 닮을 수 없었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두 얼굴이라 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만물에 관한 은밀하거나 초월적인 진리는 없으며 대신에 수없이 많은 진리들이 느리지만 꾸준하게 축적되고 있는 것이 그가 보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는 라이프니츠가 말한 것처럼 우리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모나드들이 잠재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길 중에서 스피노자는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모나드론을 거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본질을 자신의 삶의 모든 표현 속에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용어를 굳이 빌린다면 스피노자는 자신의 모나드들을 깊이 이해했고 그것을 다 펼쳐내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그의 언어와 그의 삶 전반에 걸쳐 구현했으며 그래서 아버지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포기하고 유대공동체로부터의 파문을 감당했음은 물론 전유럽의 비난과 박해를 의연하게 견디며, 렌즈를 갈아 밥벌이를 하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결국은 그 유리 알갱이들이 폐에 들어가 젊은 날에 죽고 말지요. 하지만 자신의 책상을 지켜달라는 그의 유언은 실현되어 친구들은 그의 유고집이 담긴 책상을 교회로부터 지켜내어 출판업자에게 몰래 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삶이 그의 안에 숨쉬고 있는 신의 펼쳐짐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심원한 선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을 숨기지 않았고 그 자신으로 살았으며 삶에서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의 유고인 <에티카>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드물다."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세속 정치의 작동 원리를 잘 알았고 그래서 항상 그 자신의 의도를 숨겨왔습니다. 그의 제안에는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많은 아이디어가 담겨 있고 실제로 인류에 기여했지만 그 하노버의 궁정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주 많은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캐릭터를 소화하며 삶을 편력합니다. 라이프니츠가 보여준 '인간적인 곤궁'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빈곤한 근대성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안내하는 17세기의 여행을 끝내면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치유해줄 열쇠는 어쩌면 스피노자가 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그의 인식은 자연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물질적인 지각으로부터 우리의 감정과 지성이 형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물질은 기계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펼쳐짐이고 그 생명의 펼쳐짐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성은 이 세계를 떠난 진리가 아니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진리도 아니며, 만물이 그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이 세계 속에 펼쳐내는 것입니다. 추상적 관념이나 교의 혹은 도그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의' 세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선'입니다. 스피노자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한 사람이 지닌 특별한 종류의 평화를 보여주고 있어요. 그 평화는 우리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이 우리의 자아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듯이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드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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