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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by 릴라~ 2013. 7. 23.

 

(발췌)

 

과거에는 여가를 즐기는 계층은 소수였고 일하는 계층은 다수였다. 유한 계층이 누리는 편의는 사회 정의란 측면에서 볼 때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 결과 유한 계층은 압제적으로 되어갔고 자기들만의 공감대 내로 좁혀지고,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들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같은 점들도 이 계층의 우수성을 상당히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 계층은 이른바 문명이란 것을 담당하는 공헌을 했다. 예술을 발전시키고 과학적 발견들을 이루었다. 책을 쓰고, 철학을 탄생시키고, 사회적 관계들을 세련시켰다.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운동조차도 흔히 위로부터 일어난 것이었다. 유한 계층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결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의무를 지우지 않은 채 유한 계층을 대대로 세습하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이 계층의 구성원 그 누구도 근면하라고 가르쳐지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이 계층이 전반적으로 유별나게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이 계층에서 어쩌다 다윈 같은 사람이 하나 나왔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여우 사냥이나 하고 밀렵자를 벌주는 일 이상의 지적인 일에 대해선 생각조차 해본 적도 없는 시골 신사들이 수만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p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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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배곯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작가들은 기념비적인 대작을 내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감각적인 작품을 써서 주의를 끌어보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 마침내 대작을 쓸 수 있을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미 취향과 재능이 달아나고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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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p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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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사업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부자가 되길 원한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로는 이런 얘기를 자신 있게 하는 사람들은 현실주의자이기는커녕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계의 가장 명백한 사실들조차 보지 못하는 감상적 이상주의자들이다. 만일 사업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계속 가난하게 살도록 남겨 두고픈 마음보다 자신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정말로 더 크다면 세상은 금방 파라다이스가 될 것이다.

 

금융과 통과가 좋은 예다. 안정된 통화와 안전한 신용이 정착되면 업계 전반에 이익이 된다는 건 명백하다. 꼭 필요한 이 두 가지를 보장받기 위해선 단 하나의 세계적 중앙 은행이 있어야 하고 단 하나의 통화가 반드시 정착되어야 한다. 중앙 은행에서는 가능한 한 평균 물가에 변동이 없도록 지폐를 단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통화는 금 준비금에 기반을 둘 필요가 없으며, 하나의 중앙 은행을 재정 기관으로 거느린 세계 정부의 신용에 기반을 두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너무도 명백해서 세 살배기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안을 결코 내놓지 않는다. 왜? 국가주의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되는 것보다 외국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더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p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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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교육은 단순한 성장의 기회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 물론 교육이 그러한 기회도 제공해야겠지만 동시에 아이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정신적 도덕적 소양을 키워주어야 한다.

 

교육에 있어 많은 자유를 옹호하는 주장들은 인간의 타고난 선함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권위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다. 이 영향은 권위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과 권위를 누리는 자들 양자 모두에게 미치는 것이다. 권위에 종속된 사람들은 흔히 복종이나 반항의 태도를 나타내게 되는데 두 가지 모두 각각의 문제가 있다.

 

복종하는 사람들은 사고와 행동에 있어 창의력을 상실한다. 또한 저지당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생겨난 분노는 보다 약한 자들을 못살게 구는 데서 탈출구를 찾기 쉽다. 압제적 제도들이 자기 영속성을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버지에게서 고통받은 사람은 그 고통을 자기 아들에게 가하며, 자기가 공립학교에 다닐 때 겪었던 수치심을 기억해뒀다가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었을 때 '원주민들'에게 그대로 전한다. 이렇게 해서 과도하게 권위적인 교육은 학생들을 말과 행동에서 창의성을 주장하지도, 용인하지도 못하는 소심한 압제자로 만들어버린다.

 

한편, 반항적 태도도 필요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반항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며 그 가운데 현명한 측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갈릴레오는 반항자였으면서도 현명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은 사람들 역시 반항아들이었지만 그들은 어리석었다.

 

바람직한 것은 복종도 반항도 아니며, 선한 본성과 사람들 및 새로운 사상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의이다. 이러한 자질들은 부분적으로 선천적인 기질에서도 기인하지만-이를 구식 교육자들은 너무 등한시해왔다- 활기찬 충동들이 저지되었을 때 생겨나는 좌절된 무력감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아이들이 호의적인 어른들로 자라날 수 있기 위해선 자신의 주변을 호의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자면 아이의 중요한 소망들에 어느 정도 공감해 주어야 하고 아이들을 단지 신의 영광이나 국가의 위대함 따위의 추상적 목적에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일부 자유 주창자들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아이들의 집단이 성인이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방치될 경우, 거기엔 강자의 압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인 세계의 가장 심한 압제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기 쉽다.

 

두세 살짜리 아이들 둘이 함께 놀게 되면 두 아이는 몇 번 싸워본 다음 결국 어느 쪽이 늘 승자가 되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아이는 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숫자가 많을수록 하나 혹은 두 명이 완벽한 지배력을 획득하고 나머지 아이들의 자유는 줄어든다. 그 자유는 약하고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인들이 간섭했을 때 그 아이들이 누리게 될 자유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 저절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를 발휘하지 않고는 가르치기 힘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성인들이 포기해선 안 된다는 입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일 것이다. ...

 

나는 교육을 특정인에게만 전적으로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이 하루에 최소한 두 시간씩 교육을 해야 한다. 아이들의 사회는, 엄격한 규율이 부재한 경우엔 특히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 어떤 이론으로 무장한 교사라 해도 시달리다 보면 피곤해지고, 결국엔 짜증이 나게 마련이고, 짜증스런 마음은 어떻게든 표출되기 쉽다. 자기 조절만으론 필요한 호의를 늘 간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호의가 존재하는 곳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두고 미리 규율부터 내세우는 일은 불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호의라는 충동이 자연스럽게 올바른 결정으로 이끌고 갈 것이고 당신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이가 느낀다면 어떤 결정이든 대체로 올바를 것이기 때문이다. 규율이란 제 아무리 현명한 것이라 해도 애정과 접촉을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 (pp12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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