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에 관한 책은 대학 시절에도 본 적이 있는데 당시엔 별로 와닿지 않았다. 내게 딱 맞는 항목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람을 유형별로 구분하는 것이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았고, 그것이 인간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른 바오로딸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에 눈길이 갔다. 서문을 읽는데 저자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에니어그램은 중년 이후의 과제라는 것이다. 인생의 전반기 30년 정도는 세상으로 뻗어나가면서 '경험적 자아'를 발달시키는 시기이기에 내적 작업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타고난 본성을 발현하면서 자아를 형성하는 시기이지, 그 형성된 성격 구조의 빛과 그림자를 통찰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에니어그램은 우리 인격을 지배하는 힘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중년에 이르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성격적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왔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한 부분에 고착화된 자아를 넘어서 새로운 종류의 힘을 우리 내면에서 끌어냄으로써 더욱 통합적인 자기를 추구해야 하는 과제가 중년에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에니어그램은 9가지 자기 이미지를 제시하면서(1. 나는 옳다, 2. 나는 돕는다, 3. 나는 성공한다, 4. 나는 다르다, 5. 나는 꿰뚫어본다, 6. 나는 의무를 다한다, 7. 나는 행복하다, 8. 나는 강하다, 9. 나는 만족한다) 이 각각의 유형이 지닌 강점과 약점을 설명하고 있다.
9가지 유형은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힘이고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해 있지만 우리는 본성과 환경에 따라서 그 중 한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에니어그램은 9가지 유형 중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성격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우리가 특정 방향으로 자아를 형성하는 동안 우리 안에 접혀진 날개들이 무엇인지 통찰하게 하고, 우리가 발전시켜온 각각의 유형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다른 유형의 날개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예컨대 완전을 추구하는 1번형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4번 날개가 강화되면 타인을 통제하는 인간으로 변하기 쉽다. 하지만 1번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7번 날개의 도움을 받으면 자기 책임을 다하면서도 타인을 수용하는 너그러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예술가형인 4번형은 이타주의자인 2번 날개가 강화되면 고립을 피하고 만족을 얻고자 타인에게 집착하는 쪽으로 퇴행하게 되지만, 계획성 있는 1번 날개가 강화되면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면서 자신의 영감에 적절한 형식을 부여하면서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다.
작년 12월 31일까지만 해도 내가 마흔이 될 줄은 몰랐고(만 나이로는 2년 남았지만), 그래서 무척 당혹스러웠는데, 진정한 자기 인식과 성장이 중년에 시작된다는 것이 내 앞에 놓인 여정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에니어그램을 단지 심리학적 차원이 아니라 가톨릭을 배경으로 한 영성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도 좋았다. 에니어그램의 자아 해석은 우리가 삶을 통합적 자아를 찾아가는 신적인 순례로 여길 때 그 풍부한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책 말미에 있는 질문을 가만히 되새겨본다.
지금 나를 지배하는 것은 진정한 자부심인가 거짓 자만심인가?
진정한 자기애인가 나르시시즘인가?
영적인 죄의식인가 신경증적 죄책감인가?
완벽한 기쁨인가 조작된 쾌락인가?
아첨하는 영인가 성숙한 복종인가?
성숙한 사랑인가 공생하는 맹목적 찬양인가?
창조적인 회개인가 결실 없는 자기 연민인가?
진정한 고통의 인내인가 어리석은 순응주의인가?
죽음으로 이끄는 세상의 슬픔인가 아니면 기쁨에 찬 회개를 하게 하는 성스러운 슬픔인가? (pp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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