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이 책의 각 장을 읽어나가는 것은 마치 조각 그림을 하나씩 맞추어가는 것과 같았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아이디어가 워낙 풍부해서 각 장을 읽을 때는 전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장을 읽을 때에야 내 마음에서 비로소 열 두 조각이 다 연결되는 통섭이 일어났고, 저자가 왜 그토록 통섭을 강조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12장은 내게 인간의 전망에 대한 인문학의 어떤 텍스트보다 훨씬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 존재가 이 우주 전체와 맞물려 있음을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어떤 철학자보다 더 확고한 토대를 갖고 설명한다.
저자는 과학 문화와 과학 이전 문화 사이의 간극이 엄청남에 주목했다. 과학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는 우리는 신비주의를 통해서만 미지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내성으로만 시작된 논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이제는 과학의 도움으로 인간은 인지의 감옥에서 벗어나 가리워져 있던 세계의 한 부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 결과 낱낱이 쪼개어져 제대로 탐구되지 않았던 인간 본성 및 인간이 이룩한 학문과 문화 전반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제대로 추적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획득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인류의 출발점을 되짚어 보다 보면 생물의 진화사를 만나게 되고, 생명의 탄생을 탐구하다 보면 지구라는 별의 생성 역사, 우주의 역사와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대한 이해로, 생물학에 대한 이해는 이 세계의 물리적 토대에 대한 이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학문의 모든 분과는 연결되고, 이러한 학문의 인과관계에 대한 전망이 통섭이다. 그리고 통섭의 핵심은 모든 현상이 물리적 토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본성은 유전자의 토대를 두고 있지만, 유전자 자체가 아니며, 그렇다고 문화 그 자체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전자와 문화를 연결해 주는 것, 그것은 후성 규칙이다. 후성 규칙은 문화의 진화를 한쪽 방향으로 편향시켜 유전자와 문화를 연결하는 정신 발달의 유전적 규칙성이다. ‘유전자->후성규칙->문화->유전자->후성규칙->문화->...’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가 일어난다.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진화의 산물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예술과 종교 및 윤리도 인간 뇌의 유전적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성규칙이 유전자와 문화를 연결해 주듯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인과 관계의 고리들이 탐구되기를 저자는 꿈꾸며 이 책에서 전체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인간 마음의 물리적 기초를 살펴보고, 우리의 합리적 이성이 감정의 도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작용임을 설명한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과학과 예술은 ‘상보적 관계’이다. 인류는 다른 종과 달리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뇌기능을 계발했다. 인간의 지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 인식에 대한 충격과 심리적 추방감을 경험하게 했다. 그러나 지성(과학적 세계 인식)은 매우 느리게 진화했고 그래서 인간은 두려움과 위협으로 가득찬 세계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단이 필요했다. 즉 지성이 야기한 혼돈에 질서를 부과할 필요성 때문에 인류는 다양한 형태의 집단적 제례와 주술을 창조한 것이다. 그 주술이 예술의 뿌리이며 이는 진화가 부여한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다.
과학과 예술 모두 이 세계의 ‘어떤 패턴을 끄집어내 기술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전개 방향이 다르다. 과학은 실재로부터 보편적 원리(질서)를 끌어낸다. 예술은 그 원리(질서)를 구체적인 창조물로 재현해 낸다. 과학은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고 예술은 세계의 질서를 인간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것이다.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인간 본성의 양 날개이다. 우리는 두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다. 어느 한 쪽의 날개만으로는 비상이 불가능하다.
2.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내 마음속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인가. 우리의 고향은 이 지구인가, 아니면 저 너머 초월적 세계인가. 내 마음은 답을 한다. 우리의 고향은 여기, 지구라고.
짧은 생을 살아야 하는, 자기 존재의 비극성을 인식하는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이 세계를 떠나 초월을 꿈꾼다. 인문학과 윤리, 종교의 많은 부분들이 경험론보다는 초월론에 치우쳐 있다. 그러나 인간 실존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두 발은 땅을 딛고, 우리의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를 넘나드는 존재이지만, 그 모든 운동은 우리가 '생명체'이기에 가능하다. 생명의 역사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바라보는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시점은 ‘의지적인 진화’의 단계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유전성을 결정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고 직면해온 선택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지적,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한다. 인류의 ‘어린 시절은 끝났다.’
저자는 인류에게 두 가지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인간이란 종이 수백만년의 생물학적 시행착오를 통해 형성한, 자기 존재를 규정하는 핵심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다른 생명들을 최대한 살리면서 이 세계를 보전하는 것이다.
12장의 논의는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Collepse’의 연장선상에 있다. 'Collepse’는 과거의 멸망한 문명들이 처한 조건을 연구했고, 문명 파괴의 주된 원인이 인구 증가와 자원 고갈, 환경 파괴임을 밝혀내었다. 그리고 현대 지구 전체의 문명 역시 그러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생물 다양성의 손실은 6500만년 전 중생대 말 이래로 최대 규모이다. 우리가 저지르는 멸종 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21세기는 신생대의 종말이 될 것이며 '고독의 시대', 혹은 '공생대'로 불러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위기는 심각하며,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우리는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밝혀야 한다고. 이는 개인에게 완전한 자율을 부여한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통합된 지식만이 현명한 선택을 가능케 한다는 실존주의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통섭은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다.
인간은 지구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종이다. 지구상의 수많은 동식물들은 인간을 낳은 어머니이다. 동물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이 지구를 진정한 고향으로 여기고, 이 세계의 생명과 아름다움을 살리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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