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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다큐

<말하는 건축가>, 시간의 집을 짓는 사람

by 릴라~ 2012. 6. 25.

 

 

 

 

건축 하면 '공간'을 다루는 작업인 줄 알았다. 그런데 건축가 정기용은 자신의 건축이 '시간'을 설계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살아나는 공간, 삶이 회복되는 공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회복되는 공간.

 

그의 대부분 작업은 공공건축이지만 영화에는 그가 애착을 갖는 '자두나무집'이라는 개인 주택이 한 채 나온다. 사랑하는 딸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숨어서 자기만의 아늑한 공간을 갖고 싶었던 안주인을 위해 건축가 정기용이 특별히 설계한 집이었다. 규모가 꽤 큰 편인데도 밖에서 보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눈에 띄지 않게 나즈막하게 만들었다.

 

이 집을 그는 '시간이 머무는 집'이라 불렀다. 도시는 시간이 손에 잡히지 않고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곳이라면 그곳에선 우리가 하루하루 지내면서 느끼는 감정과 추억들이 우리 곁에 가만히 머물게 되므로. 햇살 한 자락과 햇살 뒤로 어른거리는 그림자까지 그 공간과 함께 우리의 시간 속에 깃드는 집이었다.

 

그는 겉보기에 화려한 디자인을 추구하지 않았다. '보는 건축'이 아니라 '읽는 건축', 그 공간에 깃들어 사는 사람이 살면서 하나하나 느낄 수 있는 '감응'의 건축을 추구했다. 무주공공 프로젝트나 기적의 도서관이 그렇다. 기적의 도서관은 구석구석에서 아이들이 작은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무주 면사무소를 지을 때는 목욕탕이 없어 일 년에 몇 번 도시로 가는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1층에 목욕탕을 짓고, 공설 운동장 스탠드는 주민들을 위해 등나무 그늘로 전부 둘러쌌다.

 

건축가로서 그의 특별한 면모는 그가 건축을 화두로 인간과 세상, 삶을 깊게 고민했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하는 건축가는 단순히 집을 짓는 이가 아니라 한 시대를 걱정하는 사람이고, 시대의 모순을 고민하는 사람이며,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평생 월셋집에 살았지만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감'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겉만 번드르한, 평당 이천만원이 넘는 서울시의 건설 사업에 회의하고 녹색 성장을 빙자한 이 정권의 건설 횡포에 욕을 써가며 분노하고, 인간과 자연이 아름답게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을 고민했다.

 

그가 창문을 일종의 프레임이라 본 점은 특히 인상 깊었다. 카메라가 특정 풍경을 잘라서 포착하듯이 그는 바깥 풍경이 인간의 시야에 가장 아름답게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의 방향과 크기를 설계했다. 인간과 외부 세계가 가장 아름답게 마주칠 수 있는 접점으로서 공간의 역할을 사유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는 아직 공간을 창조한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늘 어떤 공간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미술보다 건축이 훨씬 중요하다고 본 정기용의 건축관은 그의 애정어린 실천과 맞물리면서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었다. 건설업자가 판을 치는 이 척박한 나라에서 이런 철학을 지닌 건축가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감동했다.

 

영화는 정기용의 건축 철학과 그의 건축 작업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일민미술관에서 단독 전시회를 여는 과정을 담아낸다. 대장암 말기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마지막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건축가로서의 그의 삶 전반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작업과 고민을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간 쌓여온 수많은 노트와 스케치들은 그의 말들이 오랜 사유의 결과임을 증명해준다. '대가의 삶'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대가의 죽음은 맑고 가볍고 따스하고 평온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여러분, 감사합니다. 바람, 햇살, 나무 모두 감사합니다." 였다. 거기에 그는 아무 욕심 없이 그가 세상에 전하고픈 따스한 마음과 감사의 정만을 담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그것을 담아내는 건축에 대한 진한 애정을 평생 구현하고자 애썼다는 사실을.

 

그 삶을 통해 그는 단순히 건축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살아간다는 건 사람과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간직하고, 그 시선으로 시대의 모순을 고민하고 자신이 창조할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깊은 인간미와 진지한 성찰과 실천적 작업을 한데 아우르며 맑은 향기를 남기며 살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건축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본질로서 마주할 수 있는 멋진 영화다.

 

 

 


말하는 건축가 (2012)

Talking Architect 
9.3
감독
정재은
출연
정기용, 승효상, 유걸
정보
다큐멘터리 | 한국 | 95 분 | 201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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