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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내려가는 삶

by 릴라~ 2013. 6. 16.

 

 

 

 

경사가 급한 산사면을 미친 듯이 올라가다가 아직 오르막이 많이 남은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하산길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평탄하지만, 올라간 시간보다 아마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법한 그런 하산길입니다.

 

논문 심사와 최종 발표까지 모든 게 끝이 났네요. 주말에 이렇게 느긋하게 쉬어본 것이 그 얼마만인지. 마무리 작업은 꽤 남았지만 가장 긴장되는 순간들은 지났습니다. 주제와 관련하여 너무 오랜 시간을 헤맸고, 올 1월까지만 하더라도 과연 이 주제를 밀고 나갈 수 있을까 거의 포기 직전이었는데, 되려고 하니 이렇게 금새 진행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돌아보니 산을 오른 시간보다 산 주위에서 배회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정상에서 어떤 특별한 풍경을 보지는 못했어요. 내가 오른 것은 사실 정상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수많은 고원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해요. 그 길에서 내가 얻은 것 또한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경관이 아니라 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고원들의 존재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우리 삶에는 에베레스트처럼 단 하나의 유일한 정상이란 없다는 사실, 나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있지만 우리 모두에게 절대적인 어떤 길은 없다는 인식이예요. 하나의 산에 이르는 다양한 루트가 아니라, 이리 저리 얽혀 있는 다양한 길들과 크고 작은 다양한 고원들을 바라보았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수많은 고원들이 있지만 우리 머리 위의 하늘은 하나겠지요.

 

그럼에도 누군가가 풍경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묘사를 요구한다면, 이 두달간의 여행이 제게 준 선물은 어떤 외적 풍경이 아니라 책상 위에서 보낸 '격렬한 고요'의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예술가의 자기 탐구의 서사는 나 자신을 다시 보는 드문 순간들을 열어주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현재 속에 불쑥불쑥 출현하는 과거의 흔적들과 마주치는 것은 잃은 것을 되찾은 기쁨이기도 하고 그것이 현재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슬픔이기도 했어요. 그 다채로운 감정선들이 만들어낸 최종적인 무늬는 삶에 대한 따스함입니다. 그 따스한 느낌은 무상함과 비애의 감정까지 자신의 무늬 안에 끌어들여 전체적으로 환한 색조를 띠면서 내 안에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올라가는 삶'을 멈추고 '내려가는 삶'을 살자는 내 안의 한 목소리가 바람의 속삭임처럼 다가왔어요. 지금까지도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특별히 애써왔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다수가 그렇듯이 취직을 위해, 학위를 따기 위해, 원하는 어떤 경험을 위해 끊임없이 젊음과 시간을 지불하며 달려온 것은 사실이에요. 이젠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은 더이상 원치 않는다고 내 마음이 가만가만 말하고 있어요. 한정된 자리를 두고 타인과 경쟁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고. 산을 남먼저 오르는 기술이 아니라 산의 풍경을 가슴에 담고 내려가는 이의 넉넉함을 배울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삶의 매 순간마다 조용조용 소리없이 자라나는 시간의 열매들을, 그 아름다움들을 거듭 느끼고 해석하는 것이에요. 그것은 누군가를 가슴에 품는 것,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 거라 생각합니다. 내게 있어 그 사랑의 표현은 경험의 개인적인 부분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삶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가장 자기답게 뻗아갈 수 있는 표현의 영역을 찾는 과정이며 그래서 그 자체로 사랑의 전개이고 사랑의 표현이지요. 사랑의 종말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의 표현이 더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배움은, 모든 여행은 '사랑의 탐험'이라 말할 수 있어요. 제 사랑의 탐험 또한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이 그간의 모든 비애의 감정을 몰아내고 마음 속에 한 줄기 햇살을 드리워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빛이 꺼지지 않기를. 이 빛이 혹여 다가올 지 모르는 모든 우울한 나날들을 밝혀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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