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이 되어서야 방학을 한 데다가, 하던 일이 연초까지 이어져 올해는 새해 햇님을 못 볼 줄 알았다. 1월 1일 새벽에 문득 잠이 깼는데 핸폰 날씨를 확인하니 '청명함'이었다. 다시 잠들기가 아까워 일어났다가 마침 준비 중인 아빠와 같이 가까운 뒷산에 올랐다.
이 동네 십년이 훨씬 넘게 살았고 뒷산도 수도 없이 올랐지만 이곳서 해돋이를 보는 건 처음이다. 어둑어둑한 산길을 한 시간 좀 넘게 올라가서 동쪽으로 트인 봉우리에 섰다. 400미터쯤 되는 나즈막한 동산에, 날씨는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포근해서 이처럼 편안하게 일출을 기다리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7시 반이 넘어가자 우주 저편에서 찾아온 손님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가 온전한 동그라미로 솟아올라 이 땅을 비추기까지 그 잠깐의 시간이 주는 경이로움에 나는 몸을 떨었다. 우리 마음의 긴 어둠을 통과해서 그가 가져다준 빛과 새로운 시간 앞에 감동했다. 2014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년 한 해는 모든 것이 꽉 막힌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대선후유증에, 논문은 방향을 못 잡고, 지도 교수는 청와대로 가고, 전문계고엔 도무지 적응이 안 되고, 인연은 풀리지 않는 데다가, 건강까지 자잘하게 탈이 났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다만 건강이 우선이란 생각에 공부를 포기하는 게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모든 일이 안 될 때는 앞으로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엄마가 위로했지만 그 마음을 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3월말 즈음부터 꼬인 매듭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더니 모든 일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좋은 분들의 지도를 받아서 논문 방향이 제대로 잡혀서 심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허리병 때문에 요가를 시작했는데, 역시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리와 어깨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고, 식도염으로 가슴이 답답한 증상도 없어졌다. 그 모든 일이 끝났을 땐 내가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고 감히 기대치 못했던 아름다운 시간이 삶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래서 2013년은 내게 가장 힘든 한 해인 동시에 가장 기쁜 한 해였다.
2014년, 새해 첫달이 벌써 반을 넘어간다. 연초에 너무 바빠 포스팅을 할 시간이 없었다. 올해는 특별히 이루거나 해야 할 목표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순간순간을 충실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 다음 주에 3년만에 떠나는 여행 잘 다녀오고, 공부하느라 못 읽은 책도 이제 실컷 읽고, 요리도 좀 배우고, 날씨 좋아지면 문학답사와 역사기행도 좀 하고, 좋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 대화하고, 정원을 가꾸듯 내 삶의 시간과 공간을 잘 가꾸자는 생각 뿐. 그리고 세상 속에서 작은 책임을 다하면서. 인류가 가꾸어온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싶을 만큼 풍부한 날들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삶에 어려움과 힘듦이 여전히 공존하겠지만 그것을 능히 넘어설 만큼의 '기쁨'을 창조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쾌락이 아니라 고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되 삶이 주는 온갖 기쁨들에 마음을 더 크게 열 수 있으면 좋겠다. 시간은 우리들의 웃음과 눈물, 우리가 겪는 다채로운 감정들로 수놓아지지만 그것의 최종적인 무늬는 언제나 기쁨일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