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화엄사까지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다.
대구에서 남원, 남원에서 구례, 구례에서 화엄사까지
이동에만 오전이 걸렸다.
다소 불편하고 느린 여정이었지만
마을과 마을을 하나씩 거쳐서 목적지에 이르는 즐거움이 있었다.
역이나 터미널은 한 도시나 마을의 관문이어서
그곳에서 받은 조금씩 다른 인상들도 여행의 소중한 일부가 된다.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광한루가 가까워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남강의 젖줄 요천과 광한루를 한 바퀴 산책해서 좋았고
남원에서 구례까지는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이어서 좋았다.
지리산 자락은 그 어디건 나를 감동시키지 않는 데가 없지만
그 산세의 웅장함과 더불어 화엄사의 위용과 아름다움도 기대 이상이었다.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 보제루 옆을 돌아 경내에 들어서면
국보 67호 화엄사 각황전이 예상치 못한 스케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중층 건물에, 다포양식으로 지어져
단청을 입히지 않았는데도 화려하고 웅장하다.
목조건물의 품격과 멋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이 각황전이었다.
각황전에 한동안 시선을 빼앗기고 나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은 각황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기품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의 석등과 불탑 또한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이 모두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이 당연하다 느꼈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화엄세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백제 때 창건되어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중수된
화엄사의 비대칭적이면서도 안정감 있는 독특한 가람 배치는
선조들이 꿈꾼 화엄세상, 모든 만물이 일체의 대립을 넘어 하나로 융화하는 경지를
예술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한다.
석조물을 제외한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이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으나 안타깝게도 전소되었다.
숙종 때 중건된 각황전도 한국전쟁 때 소실될 뻔했다.
지리산 일대의 사찰이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까봐 염려한 정부는 소각을 명했고
당시 명령을 받은 차일혁 경무관은 고심 끝에
'절을 태우는 데는 한 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며
각황전 문짝만 떼어내 불태우는 기지를 발휘한다.
당시 차일혁 경무관이 구하고자 한 것은 화엄사만이 아니었다.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로 빨치산 토벌대장을 맡은 그는
남부군 대장 이현상 사살에 공을 세우지만
적군을 정중히 장례 지내주었다는 이유로 훈장은커녕 좌천된다.
그는 빨치산과의 전쟁이 동족상잔의 비극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괴로워했고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적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줄곧 좌익 혐의를 받았으며
서른여덟의 이른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화엄사 입구에는 2013년에 제막된 차일혁 경무관의 공덕비가 있다.
이념 대립의 광풍이 지리산 구석구석을 휘몰아치던 때가 있었다.
지리산 화엄사는 그 비극의 소용돌이에서 동포를 살리고자 애썼고
그로 인해 핍박받았던 한 의인의 용기를 전해주면서
'화엄'의 참뜻을 돌아보게 했다.
화엄세상에의 염원을 그 어디에서보다 마음에 또렷이 새겨준 곳이
지리산 화엄사였다.
*여행한 때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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