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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schooling

준성이의 압력솥

by 릴라~ 2017. 5. 7.

중학교 담임을 하면서 즐거운 추억 중의 하나는 학기말이나 학년말에 연례행사처럼 반 아이들과 요리를 만들어 먹던 일이다. 첫담임을 맡았을 때 우연히 시작한 것이 아이들이 워낙 좋아해서 해마다 하게 되었다. 메뉴는 다양했다. 떡볶이, 김밥, 케이크, 오무라이스.

교실에서 했다가는 다른 반 수업 방해로 난리가 난다. 조용할래야 조용할 수가 없는 활동이었다. 그래서 가정 선생님께 부탁해서 가사실을 빌리거나 했다. 완벽하게 청소해놓겠다고 약속드리면서. 모둠학습실도 많이 빌렸다. N중학교 모둠학습실은 교실과 떨어진 곳에 있었고 방음장치가 되어 있어서 아무리 시끄러워도 밖에서는 잘 몰라서 활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학교에 소문나서 좋을 것은 없었다. 나는 몰래 살금살금 아이들과 놀았다.

요리를 제일 많이 한 해는 한 달에 두 번 놀토가 생기면서 나머지 두 번의 토요일에 수업이 든 날이었다. 마침 그 해는 토요 수업 네 시간이 모두 담임 활동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토요일 네 시간을 아이들과 통째로 보내는 것은 정말 비극이다. 평소엔 사이이 좋았다가도 토요일만 지나면 서로 원수가 돌변할 만큼 방방 뜬 교실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예 네 시간 내내 활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그 해 토요일, 교실에서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책만들기도 하고, 선생님을 초빙해 알공예도 배우고, 요리도 이것저것 종류대로 만들어 먹었다. 오징어 볶음밥 같은 메뉴를 준비해온 조도 있었다. 이 시간은 아이들의 자발성의 실체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숙제 같은 것은 당부를 여러 번 해도 잊기가 일쑤인데, 이런 활동은 두 마디 말이 필요 없었다. 조를 나누어줄 필요도 없었다. 평소에 아이들은 종례가 늦어지면 아우성을 치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내일 하겠다, 한 마디만 하면 애들이 스스로 남아서 조를 짜고, 메뉴를 정하고, 역할을 분담했다. 준비물을 잊어버리는 일도 없었다. 안 챙겨오면 조원들의 원성이 쏟아지기 때문에 아이들은 완벽하게 준비를 해왔다.

한번은 김밥을 만들어먹는 날이었다. 겨울이라 날이 추웠다. 모둠학습실에 자리를 잡고 김밥 말기를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때는 3교시, 배가 좀 출출해지기 시작하는 때였다.

선생님, 저거 좀 보세요.”

준성이가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 조 아이들은 신이 났다. 준성이가 압력밥솥(전기가 아니라가스로 하는)을 통째로 학교에 가져온 거였다. 밥솥을 열자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났고 그 조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게 웬일이냐고 묻자 날이 추워서 어떻게 하면 더운 밥을 학교에 가져갈까 밤 12시까지 엄마와 같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압력솥이면 이 시간까지 밥이 따뜻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나. 그 조 아이들은 갓 지은 것 같은 따끈따끈한 밥을 김에 말아 먹었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준성이도 귀여웠지만 그 고민을 함께 해준 어머니가 더 인상 깊었다. 시험도 성적도 장래 희망도 아닌, 내일 따뜻한 밥을 학교에 가져가는 방법을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준 어머니가 말이다. 삶은 먼 장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모여 이루어짐을 아는 분이리리라.

준성이 어머니는 학기 초에 학교에 한번 다녀가신 적이 있었다. 준성이에게 공부 욕심은 전혀 안 낸다고, 우리 아이는 다른 길을 갈 것이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준성이는 플룻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준성이의 밝음이 이해가 되었다. 준성이는 뭘 야무지게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늘 어딘가 허술한 데가 있었고 어떤 일에 애살을 보인 적도 없었다. 행동도 조금 느리고 굼뜬 편이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답답해 보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준성이의 부모님은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키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도 준성이를 그렇게 받아들였다. 준성이가 뭘 매끈하게 못해도 비웃거나 하지 않았다. 쟤는 자기가 갈 길이 따로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학교에서 늘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 있다. 부모가 자기 아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곳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날 이후 준성이에 대한 내 생각은 바뀌었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이라면 밤 12시까지 고민하는 그런 따뜻하고 포근한 마음과 애정이 그 아이에게 있었다. 앞으로 이 아이가 뭐가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불편하지 않은 어떤 것을 찾아낸다면 이 삶을 예쁘게 가꾸어갈 것 같았다. 그 해 겨울의 토요일은 준성이의 따뜻함과 열정을 발견하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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