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새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한 학생이 이유 없이 결석을 했다. 아직 새로 맡은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도 눈에 익지 않은 때라 '대체 무슨 일이지?' 했다. 옆 반의 정선생이 결석한 학생의 이름을 듣더니, "아, 그 녀석이군요" 한다. 박상혁. 작년에 전학을 왔는데 전학 오기 전 1학년과 전학 온 이후인 2학년 때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무단결석이 수십 일이 넘었다고 했다. 올 한 해 힘들겠구나 싶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왔다.
상혁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상혁이 어머니와 통화가 되었다. 학생과 연락이 안 될 때 학부모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제일 답답한데 연락이 닿아 다행이었다. 나는 상혁이 어머니께 학생, 학부모 상담을 다 요청했다. 상혁이 어머니는 상혁이와 따로 살고 있었는데 내일 아이를 직접 데리고 학교에 오시겠다고 했다.
다음 날 10시, 상혁이와 어머니가 상담실에 도착했다. 상혁이 얼굴을 보고 아 그 녀석이구나 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키가 180은 족히 되는 덩치 큰 녀석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표정 자체가 굉장히 굳어 있어서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다. 상혁이 어머니는 그 반대였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젊은 분이었는데 말씀도 부드럽고 마음결이 고와 보이는 분이었다. 상혁이를 보고는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상혁이 어머니의 온화함이 내 걱정을 조금은 누그러뜨려 주었다.
상담은 따로 진행했다. 상혁이 부모님이 이혼하고 처음에는 어머니가 상혁이를 데리고 외삼촌 집에서 지냈다고 했다. 그런데 상혁이의 행동에 대해 외삼촌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서 아이와 틀어졌다고 했다. 아이가 아버지와 살기를 원해서 아버지 집에 보냈는데, 아버지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다보니 학생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따로 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상혁이의 학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고는 어쩌면 희망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 아이를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상혁이 어머니는 상담은 아이가 원치 않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무터 학교 상담은 물론이고 병원에도 다녀보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아이가 상담에 대해 거부감만 갖고 있다고 했다. 상담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할 지도 예측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학교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상담은 뺐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씀드렸다.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때도 이렇게 무단결석이 많다면 머리 굵어진 3학년 때는 더하다고, 이대로 내버려두면 학교를 안 다닐 확률이 90퍼센트라고 말씀드렸다. 부모님들은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드릴 때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공고에서 그런 아이들을 만난 경험을 설명 드렸다. 일주일만 놀다 보면은 학교를 다니기 싫고 다니려는 의지도 잃어서 결국 자퇴 수순을 밟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중학교는 자퇴가 없으므로 유급이 될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특단의 대책을 취하지 않으면 이 아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말씀 드렸다. 그래서 어머니께 매일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드렸다. 다른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어머니께서 아이를 잡아주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과연 실천하실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지금껏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단 한 분의 부모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그 아이들은 자퇴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하실 수 있는지는 불투명했지만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정답은 알려드리는 게 교사의 책무다 싶어 자세히 설명 드렸다.
희망을 드리는 것도 중요했다. 공고에서 그렇게 방황하던 아이들도 학교에 남아 있기로 한 아이들은 고3이 되면서 대부분 철이 들었다. 학교만 나오다 보면 조금씩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을 갖고 말씀 드렸다. 지금 이 시기가 상혁이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지금의 고비만 넘기면 다 잘 될 수 있다고, 일 년만 고생해주시면 이후 몇 십년이 평화로울 거라고 간곡히 말씀 드렸다.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내 말을 경청하던 상혁이 어머니가 선선하게 답을 주셔서 무척 감사했다. 같이 살지 않고 서로 관계도 매끄럽지 않은 아이를 매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출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혁이에게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의 눈빛과 표정을 보니 이 아이가 열 여섯 살이지만 어쩌면 나보다 더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설픈 위로나 조언은 아니 한 만 못했다. 그래서 행정적인 절차만 간단히 설명했다. 당시 초등학생이 장기간 등교하지 않았는데도 학교에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것이 이슈가 되어 학교에 메뉴얼이 도착한 상태였다. 사흘만 무단 결석을 하면 교사가 가정방문을 하고 일주일 안 나오면 동사무소와 경찰에 연락하여 아이를 살피고 8일 넘으면 교육청에 이관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상혁이에게 그 내용을 확실히 인지시키고자 했다. 올해는 관련 규정이 바뀌어 1, 2학년 때처럼 결석해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학교에서 이러이러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아울러 중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설명했다. 상혁이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미래에 영 관심 없는 아이가 아니라면 마음이 조금은 움직였으리라 생각했다. 교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고, 나머지는 상혁이 본인의 의지와 어머니의 협조에 달린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어머니가 상혁이를 등교시켰다. 나는 어머니께 매일 두 차례 문자를 보냈다. 아침이면 상혁이가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고 하교 후에는 무사히 집에 갔다고 문자를 보냈다. 어머니로부터도 문자가 왔다. "내일도 등교시키겠습니다" 라고. 나는 "오늘은 도서실에서 책을 한 권 빌려갔습니다." 등 생활 모습을 간단히 문자로 알려드리기도 했다. 공고에서의 경험을 돌아볼 때 첫 일주일, 첫 한 달이 중요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아이를 붙들기가 어려웠다. 첫 일주일, 첫 한달 동안 습관을 확립하지 않으면 일 년 내내 학교를 왔다가 말았다가 하기가 십상이었다.
상혁이는 우리 반에서 제일 일찍 등교했고 교실에서 늘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핸드폰은 별로 안 했다. 클레이를 가지고 놀거나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많았다. 집중할 것이 있다는 것은 괜찮은 징조였다. 시간을 덜 지루하게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대화 나눌 친구가 없는 상황에서 혼자 있는 것의 어색함을 줄여줄 것이었다.
다른 선생님들께도 부탁드렸다. 아이의 상황을 설명하고 수업 시간에 무엇을 하든 허용해주고, 교과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봐달라고 했다. 나 또한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잔소리를 할 일이 없었다. 학교에만 적응하지 못했을 뿐 상혁이는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말이 통하는 아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보름 쯤 지났을 때 첫 고비가 왔다. 상혁이는 언제나 일등으로 등교했기에 교실에 들어갔을 때 상혁이가 없는 날은 안 오는 날이었다. 7시 50분쯤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요. 상혁이 오늘 학교 안 갈 겁니다. 제가 잔소리 했다고 기분 나쁘다고. 저도 더이상은 어떻게 하지를 못하겠네요. 내일부터 오지 말라고 하네요.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니께서 잔소리를 해서 안 온 것이 아니고 오늘 월요일이라 학교 가기 싫은데 상혁이가 괜히 핑계를 댄 거예요. 너무 상심 마시고 아이가 뭐라 하든 개의치 않고 그냥 학교 데리고 오시면 됩니다. 오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
그렇게 문자를 드리고는 비는 시간에 통화를 했다. 상혁이가 어머니한테 워낙 화를 많이 내고 폭언을 하여 도저히 데리고 올 수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쌓인 감정을 풀어놓은 것이니 마음에 담아두시지 말라 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상처받지 않고 의연하게 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 드렸다. 그리고 상혁이가 학교에서 생활을 잘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예의 바르고 충분히 괜찮은 학생임이 사실이었다. 상혁이는 누구를 괴롭히거는 등 자기 삶의 스트레스를 타인에게 푸는 학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오후가 되자 마음이 누그러워지셔서 내일 다시 아이를 데리러 가겠다고 하셨다. 다음 날 상혁이는 학교에 왔다.
한 달쯤 지나자 상혁이의 등하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상혁이는 가끔씩 웃는 모습도 보였는데 웃을 때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4월 중순 경이 되었을 때 상혁이 어머니로부터 이런 연락이 왔다. 상혁이가 하교하면서 매일 전화를 하니 선생님이 문자 안 주셔도 괜찮다는 거였다.
상혁이는 우리 반에는 친한 아이가 없었다. 교사가 인위적으로 교우관계를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뭐든 자연스러운 게 최고였다. 점심 시간에 남학생들은 대개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데 상혁이는 늘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가만 보니 점심 시간이면 도서관에 직행하는 다른 반 3학년 남학생이 3명 더 있었는데 다 괜찮은 녀석들이었다. 내성적이면서도 차분한 성품의 학생들이었다. 그 학생들을 따로 불러 상혁이에게 좀 잘해달라고 했더니 "아이, 쌤. 저 원래 잘해줘요." 해서 조금 안심했다.
그렇게 상혁이는 교실에서는 하루 종일 클레이를 하고, 점심 시간에는 도서실에서 만화책을 읽으며 생활했다. 도서실에 오는 3인방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었다. 학급에는 아직 친한 친구가 없었지만 상혁이를 삐딱하게 보는 시선은 없어서 안심했다. 여학생 한둘이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더라는 말을 다른 교사로부터 전해 들어서 상혁이를 불러서 물어보니 큰 일 아니라고,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그대로 두었다. 상혁이는 맨 뒷자리에서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집에 갔다. 한 달이 지나면서 표정은 많이 밝아졌다.
성적은 전혀 욕심내지 않았다. 학교 적응이 우선 목표였고 어머니께도 그렇게 말씀 드렸다. 상혁이는 전과목이 20-30점대였지만 1학기 중간고사 국어에서 딱 한 번 89점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문법 등 암기할 내용이 있어 다시 점수가 내려갔지만 그 한 번은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듯했다. 말수가 적던 상혁이가 어머니께 계속 자랑하고 다른 선생님들한테도 말을 걸며 자랑했다고 해서 많이 놀랐다. 아이가 워낙 안 해서 그렇지 명민한 면이 있는 아이였다.
시험 한 번 잘 쳤다고 공부하라고 격려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시험은 잘 칠 수도, 못 칠 수도 있는 것이며, 한번 잘 쳤다고 공부로 밀면 다음에 못 쳤을 때 좌절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기가 있구나." 한 마디를 하고 가만 내버려두었다. 상혁이처럼 고집이 있고 자기 주관이 있는 아이는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5월 16일, 상혁이 어머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날이 왔다. 어머니로부터 문자가 왔다.
"선생님 죄송한데 상혁이가 학교를 안 갈려고 하네요. 잔소리 땜에 안 간다는데 오늘은 못 갈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안 갈려고 하네요. 도저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전화를 드리니 상혁이가 도저히 듣기 힘들 만큼 폭언을 퍼부었다고 했다. 그동안도 아침에 학교에 안 가겠다고 실랑이를 한 적이 많았는데, 오늘은 아이가 너무 심한 말을 하여 도저히 데리고 올 수 없었다는 거였다. 등학교 때 있었던 일부터 온갖 옛날 이야기를 다 꺼내는데, 특히 어떻게 엄마가 자기 편을 안 들어줄 수 있느냐며 화를 낸다는 거였다.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건 아이가 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였다. 어머니를 매일 보다 보니 그간 고여 있던 감정들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상혁이의 이야기가 어떤 맥락인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상혁이 어머니는 점잖은 분이었고, 초등학교 때 교사가 상혁이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니 그것을 잘 들어주는 제스처를 취한 것인데, 아이의 눈에는 자기를 무시하고 선생님 편만 드는 것으로 비춰졌던 것 같았다.
상혁이 어머니께 이 점을 말씀 드리고 그간 아이가 외로웠던 것 같다고 말씀 드렸다. 사람은 자신이 너무 힘들면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상혁이 어머니도 부부가 갈라서기로 결정하기 전, 갈등이 극심한 시절에 상혁이를 방치했고 아이의 방황이 시작된 것이었다. 상혁이 어머니는 이제라도 잘해보려고 하셨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머니를 최대한 격려하고 심리적 지지를 보내드리는 일이었다. 스무 살 넘으면 관계 회복이 쉽지 않다고, 지금 할 수 있다면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라고 말씀 드렸다. 하지만 상혁이는 다음 날도 오지 않았고 어머니로부터 문자가 왔다.
"선생님, 상혁이 학교 안간다고 하네요. 어쩌지요. 염치 없지만 상혁이 좀 데려가 주시면 안될까요."
사흘 넘게 결석하면 가정 방문이 의무이므로 상담 선생님과 내일 쯤 상혁이를 방문할 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고 앞으로 대처할 일을 고민하고 있는데, 낮에 상혁이로부터 뜻밖에 문자가 왔다.
"쌤 내일은 꼭 갈게요 죄송합니다."
아이가 마음이 있을 때 확실히 붙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 날로 바로 상혁이의 집을 찾아갔다. 네비게이션은 상혁이가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을 금방 찾아냈다. 상혁이는 어두컴컴한 방 안의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방 한 구석에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비싼 건담 세트가 몇 있었다. 다른 물건은 어지러웠지만 그것은 단정하게 정리해놓고 있었다. 같이 나가서 좀 걷자니까 싫다고 하고, 다음 날 꼭 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상혁이는 오지 않았다. 찾아가니 집에는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문 앞에 걸어놓고 돌아가려는데 어머니와 통화가 되었다. 주변 피씨방에 있을 거라는 거였다. 위치를 물어 찾아가니 낮이라 피씨방에 몇 명이 있었고 상혁이는 정신없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다시 아이스크림을 사서 상혁이에게 쥐어주고는 내일 보자고 한 마디만 하고 나왔다. 아이에게 누군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상혁이의 동선을 파악하고나니 안심이 되었다. 다음 날 안 오면 또 찾아갈 생각이었다.
상혁이는 사흘을 결석하고 다음 날 다시 학교에 나왔다. 나를 보자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쌤, 현성이 문자 쌤이 시킨 거죠?" 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냐니까 현성이는 평소 단답형으로 말하지 그런 식으로 길게 문자를 보내지 않는다는 거였다. 상혁이가 이틀 째 학교를 안 나와서 현성이를 시켜서 문자 좀 보내라고 하니 뭐라고 할 지 모르겠다고 해서 내가 내용을 불러준 거였다.
이후로 상혁이는 학교에 잘 나왔다. 6월에 접어들면서는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상혁이 책상 주위에 여학생들이 몰려 오곤 하더니 다른 반 여학생들도 찾아오는 거였다. 클레이 때문이었다. 이 녀석이 클레이를 한 달간 갖고 놀더니 아주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덩치가 산만한 애가 정말 작고 정교하게 표정을 묘사한 것을 보고는 나도 깜짝 놀랐다. 상혁이는 당시 우리 반 멋쟁이이던 민준이의 입상을 만들기도 했는데, 표정과 포즈가 정말 비슷해서 모든 아이들이 웃었다. 민준이도 감탄했다.
"선생님, 저랑 진짜 비슷하지 않아요?"
"우와, 완전 닮았는데?"
그리고 여학생들은 상혁이를 조르기 시작했다. 몇 번 조르면 상혁이는 못 이기는 척 만들어주었다. 곰돌이, 눈사람, 공주, 기사 등 종류는 다양했다. 그리고 이어서 남학생들의 불평이 이어졌다. 여학생들이 부탁하면 다 만들어주면서 남학생들이 부탁하면 무시한다는 거였다. 너무 잘 만들어서 나도 하나 졸라서 겨우 받았다. 다른 반 여학생들도 가세해서 클레이를 받으려고 우리 반 교실을 들락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상혁이는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학교에 나타났고 옷차림도 점점 단정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변화가 무척 재미있고 귀여웠다. 아이들 말로는 우리 반 누구누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상혁이의 차림새는 점점 말끔해졌다.
아이에게 미술적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어머니와 이야기하니 본인이 그림을 공부하셨다 하고 주위에 친구도 예술 쪽이 많다고 했다. 친구들에게 보여주니 시켜보라고 하는데 상혁이가 극구 거부한다고 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상혁이에게 물어보니 확신이 없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미술 학원을 다니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실마리는 다른 데서 풀렸다. 미술 교사 성선생은 마침 내 옆자리다보니 상혁이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고 상혁이의 클레이 작품도 눈여겨 보았다. 성선생이 미술 시간에 칭찬하기 시작하면서 상혁이는 마음을 열게 되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상혁이는 한번도 미술 시간에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성선생은 상혁이를 격려했고 상혁이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면 부지런히 교무실을 들락거리며 송선생한테 보여주곤 했다. 성선생의 격려는 상혁이가 학교에 마음을 붙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말썽은 딱 한 번 있었다. 수학은 A, B반으로 분반하여 수준별 수업을 하는데, 열 명 정도의 소그룹이 공부하기 때문에 상혁이가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수학을 가르치던 박선생이 상혁이에게 클레이를 집어넣으라고 했는데 어쩌다가 부딪혀서 작품이 부러졌고 상혁이는 무섭게 화를 내면서 교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상혁이가 폭발할 때 어머니한테 함부로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 비슷한 상황인가 보다 했다. 선도위원회가 열렸고 상혁이가 사과를 하면서 다행히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다.
한 학기가 지나면서 모든 아이들이 상혁이를 인정했다. 나는 아이들이 잘하는 게 있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2학기 개학하고는 상혁이의 얼굴이 굉장히 밝았다. 어머니와 일본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는 거였다. 건담 박물관에도 다녀오고, 우리 반 여학생들이 부탁한 인형도 사다주었다.
2학기에 상혁이는 성선생의 권유에 따라 연말에 있을 학교 축제 때 전시하기 위한 클레이 작품에 몰두했다. 내가 보기엔 잘 만들었는데도 본인이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버리고 새로 만들곤 했다. 가끔씩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도 보였다. 어머니와 다투고 안 나온 날도 있었지만 다음 날은 마음을 고쳐 먹고 학교에 왔다. 그리고 12월에는 어머니가 아닌 상혁이로부터 직접 문자가 왔다.
"쌤, 오늘 못 갈 것 같아요."
"어디 아파?"
"어제 늦게 자서 머리 어지러워여."
"그거 감기 기운이다. 따뜻한 물 마시고 밥 잘 챙겨먹고. 푹 쉬고 내일 오너라."
"네."
나는 상혁이가 하루 쉬도록 배려했다. 100퍼센트 완벽할 필요는 없다. 지금 이만큼 온 것도 아이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고 작년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상혁이는 겨울 방학 직전에도 하루 못 나왔지만 편안하게 2학기를 마무리했다.
상혁이가 완전히 우리 반이 된 계기는 학교축제였다. 반 전체가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여학생들이 전체 안무를 구상하여 남학생들에게 연습을 시켰다. 성실하게 따라하지 않는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에게 욕을 얻어먹었는데 상혁이는 열심히 하여 무사 통과였다.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허리를 흔드는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다. 그렇게 상혁이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나는 학교 축제가 이래서 필요한 거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예술적 감각이 있는 상혁이가 공고에 진학한다면 학교에 안 나갈 것이 뻔했다. K예고에 알아보니 무단 결석이 수십 일이면 합격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상혁이 어머니께서 주변에 예술을 하는 분들에게 수소문을 해서 괜찮은 대안학교를 알아오셨다. 예술교육에 중점을 두는 합천의 W고등학교였다. 원불교 재단 소속이어서 학교가 망할 염려가 없어 안심이 되었다. 기숙사가 있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힘든 사춘기를 통과한 상혁이가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출발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담임추천서에서 올해 상혁이가 학교에 적응하기까지의 과정과 아이의 재능, 성실성 등을 정성 들여 썼다. 상혁이도 며칠 동안 자기소개서 두 쪽을 열심히 썼다. 글씨가 고르지 못한 부분이 있어 두 번이나 다시 옮겨 쓰게 했는데 상혁이는 "아, 쌤, 못해요." 하고 불평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다시 썼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졸업하고 나서 상혁이 어머니로부터 새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지금까지 만난 학부모님들 중에서 상혁이 어머니만큼 교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끝까지 따라준 분은 없었다. 어머니는 젊은 날에 상혁이를 방치했던 실수를 만회하고자 매일 아이를 데리러 갔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1학기에 한 달에 한 번 꼴로 일어났던, 어머니를 향한 상혁이의 감정 폭발은 2학기에는 두 달에 한 번쯤으로 뜸해졌고 나는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준 어머니가 고마웠다. 상혁이가 학교에 적응하게 된 일 년은 상혁이가 어머니에게 서서히 마음을 여는 시간인 동시에 상혁이와 어머니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부디 이 모자가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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