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실린 황순원의 단편 '물 한 모금'.
너무 담백한 작품이라 학생들이 지루해할까봐
다른 작품으로 대체해서 수업할까 하는 생각을 처음엔 했다.
하지만 그 경우 프린트해 나눠준 작품을 중학생들이 잃어버리는 일이 많아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교과서 작품으로 수업했는데 의외로 이 소설이 괜찮았다.
이야기의 무대는 일제강점기 평안도 한 시골마을의 간이역 인근이다.
기차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비를 피해 간이역 근처의 헛간으로
하나 둘 모여들고 그들 사이의 대화가 잔잔하게 전개된다.
늦가을의 비는 사람들에게 한기를 가져다주고
기차 시간이 다 되어도 사람들은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데
헛간 주인인 중국 남자가 등장해 작은 반전을 선사한다.
험상궂게 생긴 그는 사람들을 쫓아내려는 듯 보였지만
잠시 후 나타나서 헛간에 모인 사람들에게
따뜻한 맹물 한 잔씩을 돌린다.
그 물 한 모금에 사람들은 기운을 차리고
각자 자신이 가야할 곳으로 출발한다.
"찻종에 붓는데 김이 엉긴다. 그 김을 보기만 해도 속이 녹는 것 같다. 먼저 수염 긴 노인이 마시고, 노파가 마시고 그리고는 옆 사람 순서로 마신다. 한 모금 마시고는 모두, 에 돟다, 이제야 속이 풀리눈. 하고는 흐뭇해한다. 단지 그것이 더운 맹물 한 모금인데도. 그러나 그것은 헛간 안의 사람들이나 밖에 무표정한 대로 서 있는 주인이나 모두 더운물에서 서리는 김 이상의 뜨거운 무슨 김 속에 녹아드는 광경이었다."
수업은 소설을 세 부분으로 잘라서 했다.
발단, 전개 부분에서는 마을과 간이역과 중국 남자의 집 등
배경으로 묘사된 부분을 그림으로 그려서 배치를 파악하고 이어 등장 인물을 짚고
위기 부분에서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당대 시대상을 읽어내고
절정, 결말 부분에서는 중국 남자가 준 '물 한 모금'의 의미와 소설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물 한 모금'이 무엇인지 모둠 대화를 했다.
소설의 기본적인 요소만 읽어내면 되는 쉬운 작품이었는데,
찻잔의 맹물을 나눠마시는 결말 부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담담하면서도 성스러워
여운이 오래 남는 좋은 작품이었다.
아이들도 의외로 잘 읽었다.
일제강점기, 평안도 시골 농부들의 고단하면서도 평범한 삶의 한 단면 속으로
초대되어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들은 가을 장마를 걱정하고 추수를 걱정하고
추수한 농작물을 공출로 빼앗길 걸 걱정하고
출산한 딸의 산후조리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방인인 중국 남자는 작은 선의를 베풀었다.
그 따뜻한 맹물 한 모금이 사람들에게 그 시간을 견뎌낼 힘을 주고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라
중국 남자가 주었던 '물 한 모금' 같은 것이 아닐까.
이 겉으로는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길을 잃는 것도
'물 한 모금'을 건네지 않아서가 아닐까.
어쩌면, 작가 황순원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은 것이
'물 한 모금'이 아니었을까.
소설가인 그가 시대를 구원할 수는 없었을 터, 그는 그저
물 한 모금을 고단한 그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 짧은 소설을 읽는 시간이 내게도 따스한 '물 한 모금' 같았다.
https://ssam.teacherville.co.kr/ssam/contents/20756.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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