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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들은 꿈을 '조상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광주민주화항쟁 희생자 분들과 꿈 작업을 하기 전에 나는 이 층위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광주에서 이분들의 집단 트라우마를 함께 나누는 동안 내 개인의 가족사, 즉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때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꿈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꿈은 조상에 관한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사는 상처로 점철되어 있다. 식민지를 겪었고 전쟁을 치렀고 분단의 비극에 더해 이념 투쟁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독재의 상흔에다 악명 높은 성 불평등까지, 고도 성장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가 짙다.
흥미롭게도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만 등장하는 꿈을 전후에 태어난 우리 세대가 꾸는 것을 목격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추적해보면 아버지가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거나 알코올 의존증으로 불운하게 살다 갔다고 한다. 또 술 문제가 있는 중년 남성의 경우, 꿈에서조차 '또술'이라는 별명을 지닌 사람이 등장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양민 학살 사건이 있었던 지역 출신이었다. 아버지도 알콜의존증이었다 한다.
기억에서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면 빛이 바래듯 옅어지는 상처도 있다. 하지만 커다란 트라우마는 그렇게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상처의 대물림이 일어난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과제를 떠맡았다면 우리 세대는 가족이나 집단 트라우마를 후대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을 지상 과제로 여겼으면 한다.
우리 역사가 쌓아온 업을 풀어내어 이 땅에 태어나는 다음 세대들은 더 이상 부모 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부채를 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역사가 남긴 겹겹의 상흔들을 흔히 마주치는 세대는 우리로 족하다. pp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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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선생님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가 충동적인 감정 조절이라 했다. 이에 상응해 여성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는 힘'이라 한다. 건강한 아니무스가 작동하면 빠르게 판단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결단을 내린다. 그런데 아니무스가 미발달한 상태에서는 여성 안에 있는 남성적인 특질인 아니무스가 적절하게 기능하지 않으면서 이럴까 저럴까 결정하지 못하는 고민으로 자신을 괴롭힌다. pp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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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우 신랑' 이야기에서 여우 신랑은 '내면의 파트너'이다. 여기서 여우 신랑을 제압하는 길은 아버지나 오빠 같은 '건강한 아니무스'가 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여우 신랑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토록 오래 내면 세계를 방치한 자신이 문제였음을 기억할 일이다. 여우 신랑이든 괴물이든 이들은 언제나 다른 형태로 변형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들의 본 모습은 기사이고 왕자일 수도 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영혼의 호소를 따를 때 '아니무스'는 여성을 위한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기나긴 삶의 여정에 언제나 한두 걸음 앞에서 등불을 환히 밝혀 더 심오한 자신을 만나도록 이끌어주는 소중한 안내자이다. 가장 긴밀해야 할 '내면의 파트너'이다.
눈을 안으로 돌려 내면의 무의식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세상만큼 거대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운 세상 하나가 더 열린다. 이를 내면으로의 여정이라 하는데, 이 여정을 시작할 때 맨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내면의 파트너'이다.
여성의 내면의 파트너가 여우 신랑 같은 위협적인 인물이냐, 기사나 현자처럼 인생길 조력자냐는 자기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따라 판가름 난다. 마찬가지로 남성의 내면의 파트너가 구렁이 처녀나 카르멘처럼 유혹적이고 파괴적일지, 아리아드네 같이 친절한 지혜의 소유자일지는 모를 일이다. 본인이 그동안 해온 내면 세계에 대한 태도나 노력의 결과물이다. 내면의 거울은 언제나 정직하고 정확하다.
우리는 일생 동안 수많은 언약을 한다. 하지만 가장 가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게 바로 내면의 파트너와 맺는 언약이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헌신은 우리의 몫이다. 내면의 파트너는 그러한 수고에 정직하게 화답할 것이다. pp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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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기보다 온전하게 살아라!' 이보다 해방감을 주는 표현이 있을까? 그런데 이 말의 무게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융의 이 표현을 처음 듣는 순간,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나누며 살고, 이게 다인 줄 알고 그렇게 살려 애써왔다. 온전함이 이상이라면, 착하지 않고 바르지 않고 욕망으로 가득한 나를 위한 자리도 마련될 터이다. 그렇다면 이런 내 모습을 드러내고 살아도 된다는 뜻인가?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파괴적이고 무책임한 나를 행동으로 옮긴다면 세상은 무법천지로 변하지 않을까?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우리 문화나 밝음과 선함을 강조하는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은 도발적이다. 내 안에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과 선함으로 가득한 자신을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심층심리학은 그림자 이론으로 답한다.
빛이 밝으면 어둠이 짙어지듯, 의식이 커지면 그림자도 그에 상응해서 커진다는 것이 심층심리학이 설명하는 그림자 이론의 토대이다. 자신을 만나는 것은 곧 그림자를 만나는 것이다. 오래 외면하고 덮어두고 부인해온 자리로 눈을 돌려 직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도전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 주어진 그 어느 것도 무가치한 것은 없다. 전부 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자원이라고 생각하면 내 안에 어두움조차 소중해진다.
그림자 탐색은 통과의례이다. 삶의 전반부가 사랑과 일로 분투하며 자녀를 양육하고 사회적인 의무와 기여를 위해 매진하는 시기라면, 후반부는 덮어두고 부인했던 그림자를 만나 삶을 재조명하고 재구조화하는 시기이다. 다르게 말하면, 삶의 전반부는 그림자를 만들며 쌓아가는 시기이고 후반부는 있는 줄도 몰랐던 그림자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 시기다.
흔히 그림자를 만난다고도 하고 수용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 만남을 넘어 언약과 헌신을 요하는 천생배필의 연을 맺어야 한다. 그런 차원의 결속만이 그림자 속 황금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진귀한 보화는 자신뿐 아니라 세상을 창조적으로 변모시킨다. pp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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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긍정과 낙관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 불편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림자에 대한 가치를 전혀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림자를 초대해서 그림자와 직면해 어울리고 춤추는 삶은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림자를 자아를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한다. pp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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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목표가 있다. 메시지, 즉 이야기를 전해주고자 하는 목표다. 그리고 증상은 그림자의 이야기이다. 만약 피상적 긍정이나 밝음을 위해서 증상을 부인하거나 없애고자 한다면 오산이다. 그 뒤에 그림자의 이야기, 즉 영혼의 메시지가 있다. 증상이 나타날 때 고요히 멈추고 오래 버티며 그림자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듯, 삶에서 그림자를 배제시킨다면 어둠만이 주는 신비는 어찌할 것인가? 어둠은 삶에 깊이를 더해주는 묘약이다. 진정한 치유나 변형이 일어나는 자리는 언제나 깊은 어둠 속이다. 기존에 알던 나,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것, 자아가 꿈꾸는 희망, 밝음, 선함이라는 이상이 산산조각나는 자리가 어둠이다. 여기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나는 이 깊이로 들어가는 두려움의 발로가 과잉 희망과 낙관 프로그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빛과 계몽의 반대쪽으로 눈을 돌려 건강하고 온전한 이야기를 찾을 시점이다. pp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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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림자를 상상한다. 별들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한다. 인간 정신의 그림자 또한 칠흑 같은 어둠과 같다.
이 어둠 속에 구원의 열쇠가 떨어졌다. 로버터 존슨은 이를 현대인들을 위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 흐르는 자리라 표현했다. 이 어둠의 자리가 그림자다. 눈을 어둠으로 돌린다는 것은 분명 판도라 상자를 여는 일이다. 그 안에서 대면하기 싫은, 부인하고 억눌렀던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됨과 동시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재능과 치유의 힘, 그리고 놀라운 창조의 에너지도 발견할 것이다. 그림자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 힘과 에너지를 의식으로 길어 올린다는 말이다. 자신의 최상과 최악을 만나는 일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편집된 자신을 넘어 온전한 자신, 자신의 모습 자체를 만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성장하며 세상을 사는 법을 배우는 동안 의식은 자동적으로 본성을 편집하게 된다. 자연히 자신의 일부만 자아로 수용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반대편에 그림자를 키워간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자아의 이상은 진정한 자신을 보듬을 만큼 커다란 그릇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애 초반부가 그림자를 만드는 과정이라면, 그 후반부는 그림자를 의식으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그림자를 만나고 그 세계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려 할 때 가장 손쉬우며 유용하고 안전한 도구가 바로 꿈이다. 소개한 꿈 사례에서 보았듯, 꿈은 자신으로 하여금 편집된 자신으로 살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선하고 밝고 성실하고 책임 있는 자신뿐 아니라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며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자신까지 모두 포함하라고 촉구한다. 착하고 바르기보다 건강하고 온전한 자신이 되라는 것이다. pp1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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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에는 각종 상징들이 배열되어 있는데 우리 각자는 만다라의 중앙에 위치한다. 만다라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지복으로 이르게 한다. 이는 전체 삶의 여정을 나타내는 도형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다수 현대인의 만다라는 뒤죽박죽 엉켜버려서 중심을 찾을 수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도 없다. 현대인의 만다라는 그 안에 갇혀서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미궁에 비유된다. 이런 상황을 반추해볼 만한 수피 이야기가 있다.
대저택이다. 주인이 외국으로 떠나면서 하인에게 집을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하인은 주인의 명을 받아 집을 돌보고 저택의 살림살이를 꾸려간다. 그러다 서서히 자신이 진짜 주인인 줄 착각하기 시작한다. 저택에 사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는다. 여러 해가 지나 주인이 돌아와 보니 하인은 새로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다.
심리학적으로 주인을 자기self라 하고 종을 자아ego로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 저택의 책임자라 믿으며 산다. 가짜 주인이 진짜 주인 행세를 하다가 자신이 주인인 줄 착각하고 사니, 본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주객이 전도된 상태니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산다. 다시 저택의 질서를 회복하자면 하인이 주제를 알고 진짜 주인에게 자리를 내주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하인이 호락호락 물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하인이 주인 행세를 하며서 가짜 자신으로 살아갈 때 드러내는 증상들이 있다. 진정한 나와 단절이 일어났으니 삶이 늘 공허하고 소외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자아는 정신의 집에서 격리된 작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그러니 무엇을 하더라도 신비나 풍요로운 의미와 연결될 수 없다. 이야기의 하인처럼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마음의 곳간은 언제나 비어 있으니 허기진 삶일 뿐이다.
또 다른 증세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팽창 상태이다. 앞서 말한 공허함과 닿아 있으나 겉보기에는 전혀 상반된 듯 보인다. 하인이 저택의 주인 행세를 하니 적반하장에 오만불손하다. 미력한 하인은 좁은 시야와 제한된 능력으로 대저택을 다스리자니 자신의 힘을 과장하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순리가 아니라 통제나 강압으로 살아가니 삶이나 자연에 내재된 진정한 힘은 들어올 여지가 없다. 자신의 지식과 의지로만 군림하려 할 때, 통제되지 않는 세상은 견딜 수 없다. 따라서 타도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자연스레 파괴를 일삼고 세상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며 약자에게 가혹한, 기형적인 영웅으로 살게 된다.
주객이 전도된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주인에게 제자리를 돌려주고 주인을 바르게 섬기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초월적인 힘이나 종교적인 상징에 겸허하게 복종하는 삶은 자아가 강화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자아가 버티는 힘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
관건은 주인과 하인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다리 놓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자아와 자기의 화해는 일생 동안 다루어야 할 과업이다. pp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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