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거의 매 페이지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책. 교육철학 관련 책 중에서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났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활동 그 자체에 대한 풍부한 설명이 단비처럼 반가웠다. 번역은 어색하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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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교육이 무엇이든 간에, 교육은 단순히 하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항상 일반적으로 교육은 학생들에게 직업 및 졸업 이후의 삶에 준비시켜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교육의 의미는 이것에 제한되지 않는다. 교육의 의미는 특히 경제적 효용에 제한되지 않는다. (...)
우리가 교육의 본질과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인간의 경험이라는 더 넓은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한다. 철학적으로 정의된 경험 개념은 우리의 주제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관점을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육이라는 이행은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에 대한 우리 경험의 이행이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정신은 어떤 상당한 양의 정보를 획득한 상태를 넘어서서, 교육받지 못한 다른 정신에 비해 더 풍부하고 더 광범위한 경험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교육이 시도하는 이행은 좁고 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넓고 깊은 경험으로의 이행이다. 교육은 이 목적을 달성할 때, 학생들을 익숙하고 좁게 실제적인 세계로부터 익숙하지 않고 추상적인 세계로 이끈다. 교육은 우리에게 표면 밑을 보는 법을 가르치고, 우리의 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확실성, 부적을 믿는 것과 같이 사고와 반대되는 잘못된 확실성을 넘어서 보는 법을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교육받은 정신은 새로운 경험과 아이디어들에 열려 있고 급진적으로 그러한데, 이것들은 비판적 성찰을 요구하며, 이것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이전 의견들의 재배치를 의미한다. 교육받은 정신은 질문을 하고, 아이디어에 대한 정당화를 추구하며, [그 아이디어에 따라] 변형된 세계를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은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넘어 낯설고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향해 과감히 나아가고, 그로 인해 우리의 문화 속에 있는 대화를 변경할 것을 요구한다. 동시에 교육은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이 목표에 필요한 일련의 능력들과 지적 덕성들을 길러준다. pp.x~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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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대를 뒤엎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들과 마주하는 것이 인간 경험의 본질이다. 매일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지식이나 예상을 확증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히 반증하는 것과 접촉하게 한다. (...) 즉 우리의 세계에 대한 가정들은 대립하는 견해들에 직면하고, 우리의 생각과 다른 텍스트나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의 신념들은 의문시되며, 우리의 자기확신은 우연성의 느낌에 의해 도전을 받는다. 만약 경험이 우리의 출발점이라면, 그리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와 대답되어야 할 질문들에 시달리는 것이 경험의 본질이라면, 교육은 해결책 및 대답을 향한 탐구 또는 일련의 조사에 있다. 여기에서 탐구의 개념이 핵심인데, 이 개념은 본질적으로 학생들을 완전히 평이한 정보로 구성된 교육과정의 수동적인 저장소로 보는 오래된 학생관과는 중요하게 다르고, 이와는 다른 역할에 학생들을 위치시킨다. 오히려 학생들은 조사 참여자 및 그들의 문화 속에서 대화하는 동료 토론다--아마도 훈련 중인 토론자--로 간주된다. 그리고 경험, 참여, 탐구에 대한 강조는 우리가 대화, 사고 또는 '비판적 사고'에 대한 현대의 개념들을 진지하게 다루고, 그것들의 의미를 탐구하기를 요구한다. 모두 동의할 수 있듯이, 교육은 결정적으로 학생들이 지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이것이 다양한 학습과정의 단계에 있고 다양한 학습현장에 있는 학생들에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든간에 말이다. 사고는 한 가지인가 아니면 여러 가지인가? 적절하게 사고로 서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착할 수 있는 이론적 모형이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사고를 가르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가르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 교육받은 정신이 표면상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경험의 정점에 있는 것이 지적 사고라면, 이제 그 사고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것들은 모두 간단하지 않은 철학적 질문들로, 우리가 교육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피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pp, xi-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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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과학과 합리적 사고가 거의 동의어로 간주되는 시대에, 비과학적이고 어떤 객관적인 규칙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성찰(reflection)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게 주관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사고, 경험, 교육의 본질이라면, 경험적 질문들을 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철학적 질문들을 하는 것도 적절하고, 이에 대해서는 과학적 방법들이 우리를도와주지 못한다. 특히 여기에는 사고의 기술로 불리는 어떤 것--상상하기와 판단하기, 정당화하기와 비판하기, 이해하기와 자기이해하기, 사변하기와 궁금해하기--이 있는데, 이것들은 과학적 설명에 매우 저항하고, 철학적이며 현상학적인 조사를 요구한다. (...)
만약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것이 어느 날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은 사회구조들의 붕괴 또는 우리가 많이 들어온 '학교 실패'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고가 우리의 삶과' 무관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적 '윤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교육받은 직업인들이 직장에서 윤리적 판단을 할 필요가 없을 때, 민주국가의 시민들이 오직 텔레비전에 나오는 권위자들의 정치경제적 전문지식을 따라야 할 때, 우리가 심지어 일상적인 심신의 문제들에 있어서도 [스스로]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없고 무한히 급증하는 돌봄 전문가들을 따라야 할 때, 우리 [사회는] 실제로 사고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pp. xiv-x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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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된 교과내용과 책을 통한 학습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를 더 넓은 연구과정 내에서 도구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지적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연구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듀이가 구상했던 교육은 전통적인 읽기, 쓰기 등의 기능들을 더 넓은 경험의 장 내에서 이용하자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일이지, 그것들을 경험의 반대로 잘못 배치해서 그 중요성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듀이는 이해관심의 개념을 학생들의 동기의 원천으로 중시했지만, 이해관심과 학문 간에 이분법을 만들지는 않았다. p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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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받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사고하는 능력을 가진 자, 독창적이고 자기주도적인 행위자이다. [그리고] 교육 받은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문화 속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고, 이와 극도로 관련되어 있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이 대화를 구성하는 엄청난 텍스트와 아이디어들을 배우고, (역시 중요하게) 이 대화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실존과 연결시킬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분석의 수준에서 교육은 성과나 과학이 아니라, 삶의 과정, 그 자체를 넘어서는 목표가 없는 삶의 과정이다. 학생들이 축적되는 인적 자본이나 행동주의자들이 만든 미로 속의 실험용 쥐가 아닌 것과 같이, 교육기관들은 [전혀] 기업과 비슷하지 않다. 교육기관들의 목적에는 적응과 효율성이란 미덕을 주입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캐묻기 좋아하고, 놀라워하며, 독창적이고, 자기를 이해하는 것과 같이 경제적으로는 쓸모없는 특징들도 포함된다.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러한 가치들이 필요하다. 만약 교육을 과학적으로 만들라는 광란 속에서 이와 유사한 지적 덕성들이 경시되고 따라서 학습되지 않는다면,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교육기관들만이 아니다. 학생들이 궁극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것은 사고의 기술(art)이며, 이는 정확히 측정가능한 성과, 표준화, 형식적인 계산을 거부한다. 그러나 나는 수행성과 교육과학의 어휘를 전부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이는 확실히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대신] 나는 이 연구에서 개략적으로 듀이식인 교육철학을 가지고 이 어휘의 한계들과 그 부차적인 위치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pp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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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듀이처럼 과학의 한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심리학, 인지과학, 사회학, 그 밖의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 유래한 지식이 특히 수단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교육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유익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러나 이 연구들이 너무나 많이 간과한 것은 '어떻게 학습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경험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실 철학적인 문제라는 것, 그리고 철학적 질문으로서 '어떻게 학습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현상학, 해석학, 아마도 인식론의 자산들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 경험적 조사는 절대로 무엇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인지, 또는 [교육이라는] 전체 기획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밝힐 수 없을 것이다. 경험적 조사는 우리가 어떤 '학습 성과들'을 왜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교과내용들이 왜 중요한지 등 목표와 관계된 다른 질문들에 대해 답할 수 없다. 정치와 같이 교육은 분명히 과학적 질문들이 필요한 문제이지만, 과학 그 자체는 아니다. (...) 교육의 성공은 대부분 교실에서의 뭐라 말할 수 없고 수량화할 수 없는 것, 정확히 어떤 조직적 방법으로 가르칠 수 없는 것에 달려 있다. 역사에 매료된 상태, 독창적 해석을 하는 능력, 정의감을 주입하는 기술(technique)은 없다. pp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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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이 걱정하는 종류의 무지는 이전 세대의 학생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실용적, 정보적 지식의 부족이 아니다. 블룸은 그에게 있어 여전히 교육의 심장과 영혼인 문학과 예술, 철학 등의 위대한 저작물과의 만남 및 깊은 감상의 부족을 걱정한다. 특히 인문학은 ""정보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전통이 불필요해졌기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전통은 의식 고양과 영감의 원천이 되기보다, 억압적인 힘이나 지루함의 원인, 아니면 단지 과거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더 이상 학생들은 자신들이 대중문화나 대중매체보다 정전에서 더 심오한 진리를 찾을 거라 믿지 않는다. 정전에 대한 숭배가 무너짐에 따라, 학생들의 감정의 깊이와 미적 감상을 위한 능력,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분하는 능력, 목적을 중대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능력도 무너졌다. 읽기를 사랑하고 고전 읽기를 통해 개인적으로 향상될 것을 기대하는 [습관은] 사라지고, 이는 더 즉각적인 오락의 형태로 대체되고 있다. 더 궁극적인 삶의 문제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공리주의적 가치들과 '출세 제일주의가 대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됨에] 따라' 교육과 학생들의 품성 그 자체는 얄팍해지고 상상력이 부족해졌다. (...)
블룸은 더 이상 학생들이 자신들을 지탱하는 전통을 알거라고, 그 고전 텍스트들을 제대로 감상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면, 대학의 존재 이유가 불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고전을] 읽지 않는 핛애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무엇이 다른 것인지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고나 행위가 더 비슷해지게 된다. 블룸은 다음과 같이 이것을 꽤 중요한 지점으로 표현했다. '좋은 책을 읽는 데 실패하면, 비전도 약화되고 우리의 가장 치명적인 경향, 즉 지금 여기가 전부라는 믿음도 강화된다.' 특히 문학은 상상력을 가르치고, 인간 실존을 다르게 이해하는 수단과 욕구를 불어넣는다. 그렇다면 고전을 읽지 않는 것은 [단순히] 교육 실패의 원천인 기본적인 것에의 재정지원 부족이나 관심 부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대학 교유의 임무를 망각하고 그 결과로 예술과 인문학을 무시하는 것이다. p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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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들이 이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들은 학생들이 표면상 더 많이 알았던 과거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러한 입장은 향수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이 문제에 있어 단순한 전통으로의 귀환 또는 진보주이로의 귀환이 아니라, 이분법을 넘어서게 해주는 새로운 사고이다. (...) 학생 중심 교육 아니면 교육과정 중심 교육, 비판적 사고 아니면 사실적 지식, 능동적 학습 아니면 수동적 학습 등의 진부한 대립항은 극복되어야 한다. p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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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현상적학 집중, 즉 '사고하는 방법'--인간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협상하는 방식--과 학생들이 지적으로 성숙해지면서 거쳐 가는 발달 단계에 주목하는 것은 강조점이 교육가와 교육과정에서 학생들과 발달을 조성하는 조건들로 옮겨가는 것을 수반한다. 듀이의 설명에 사로잡힌 진보주의자들은 이 상대적인 강조점의 이동을 완전한 이분법으로, 교육과정 자체보다 학생들, 그들의 인지발달,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사회적, 정서적 행복의 절대적 우위 인정으로 확대시켰는데, 이로 인해 듀이가 우리에게 버리도록 촉구했던 바로 그 이분법이 새 생명을 얻었다. (...) 듀이의 교육에 관한 글들은 결코 학생들의 필요로 확인되는 것을 위해 지식을 희생시키는 것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 학생들의 필요가 인지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 대신 듀이는 교육과정이 학생들의 교실 밖 경험을 보완해야 한다고, [교사와 학생들은] 교육과정을 고차사고력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듀이에에 [수준이 높아서] 도전적이고, 실제로 강한 의지가 필요한 교육과정 없이 고차사고력을 가르칠 수 없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
실용주의적 실험주의자인 듀이는 인간 지식의 본질이 단순히 현재를 과거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아이디어들의 향상 및 변형을 위해 그 아이디어들을 지적 비판의 정신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존의 지식은 단순히 학생 집단에게 기정사실로 부여되지 않고, 전통과 같이 전달된 오류들을 확인하면서 과거에 대해, 또 과거로부터 배우는 탐구의 대상이 된다. p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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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의 기술은 손쉽게 교육 상황에 적용된다. 여기 교실에서 일어나는 것도 '그 자신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것도 '우리에게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과 같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이끌기보다 이끌림을 받고', 이는 '그 자신의 흐름으로 그 자신의 결론--어떤 것을 드러나게 해주는 결론--에 도달하는 대화'와 함께 이루어진다. 교육은 성공적일 때,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대화의 특징에 비견할 만큼 [교육가가 학생들에게] 자발적으로 통제권을 내주는 것을 수반하고, 이때 교육은 단순히 유순한 정신에 전문가의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교과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지향하게 된다. 듀이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교육가들이 대화를 교조적으로 주도하기보다, 모호한 것들을 명료하게 해주고 질문을 제기하며 관찰로 초대하는 등 제한된 의미에서 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듀이의 말을 빌리자면, 교육가의 임무는 '탐구의 정신을 지키는 것, 즉 탐구의 정신이 과도한 자극으로 인해 시들해지거나, 일상적인 일로 인해 경직되거나, 교조적 가르침을 통해 화석화되거나, 사소한 것들에 닥치는 대로 대처하면서 소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가는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조사과정에의 참여자--확실히 탐구 과정에서 학생들과 다른 역할을 맡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참여자--이다.
교육을 더 넓은 교과 밖 탐구 과정이나 경험과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교육에 대한 오해이다. (...) 교실에서 일어나는 학습경험은 더 공식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구조화되어 있긴 하지만, 본질상 일상생활에서의 학습경험과 다르지 않다. 교육은 이해를 통해 세계 속에서 편안해지려는 기본적인 인간의 실천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교육은 결코 단순히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열어주고, 지평과 이해관심을 넓히며, 이질적인 경험 영역들을 연결하고, 전통적인 교과내용들을 의미 있게 배치하며, 관조와 발명의 습관을 계발시킨다. 교육은 현존하는 호기심을 이용하지만, 그 호기심을 덜 편협하며 더 넓은 시야로 열어주는 길로 안내한다. 확실히 교육이 수반하는 문화작용은 사실적 지식을 얻거나 호머가 보았던 것처럼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학생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생활세계로 확장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p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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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이는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당혹스러운 일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경험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일련의 탐구는 혼동이나 어려움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와 관련된 현상을 관찰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가설을 만들고, [가설] 적용 및 그 결과에 대한 관찰을 통해 가설을 다음고 검증하며, [이를 통해] 결론을 추론하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는 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일로, 데카르트 같은 명상가의 방식으로 나아가기보다 우리들 각각이 동료 탐구자들과 공동으로 참여하도록 이끈다. (...)
그렇다면 교육의 교과내용은 경험과 연결되어야 하고, [학생들을] 교육적으로 적절한 종류의 새로운 경험으로 안내해야 한다. 여기에서 단순한 호기심은 어느 정도 중요하지만, 이를 단순히 제멋대로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이 호기심은 그 자체의 역동에 의해 지배받는다. 호기심은 (매우 시시한 형태를 제외하고는) 조금 새로운 정보를 얻자마자 끝나지 않고, 그 이상의 탐구의 길을 열어주는 과정을 일으킨다. (...) 교과내용과 경험의 연결이 교육가들은 학생들이 가지게 된 흥미라면 무엇이나 받아줘야 한다거나, 설상가상으로 학생들의 경험을 단순히 즐거운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이 그러한 것과 같이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고, 교육을 받는 모든 이에게 진지하게 매우 힘들고, 엄격하며, 별로 재미없는 과정에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pp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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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듀이의 교육철학이 경험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전통 교육학에 대한 비판이 학생들의 표면적인 행복을 이유로 교육과정을 강조하지 않거나 지적 표준을 줄이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학생 중심 접근과 듀이의 교육철학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듀이는 교과내용보다 심리사회적 기능 및 인지적 기능의 강조를 주장하는 진보주의 학교들에 대해 가혹하게 비판했으며, 그러한 기능들은 배우기 힘든(challenging) 교육과정과 떨어져서 발달하지 않고 기능 vs 지식이라는 이분법은 거짓이라고 주장햇다. 성찰할 어떤 것과 떨어진 채로 지적 성찰을 배울 수 없고, 추상적 기능은 특별히 '비판적 사고'로 지정된 강좌에서 계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능을 교과내용과 분리해서 배울 수 없다. 심지어 꼼꼼하게 따라가면 직접적으로 사고력을 낳는 추론적 규칙들로 구성된 교육과정 그 자체를 통해서는 [더더욱] 배울 수 없다. 방법을 알려주고 그것을 적용하러 과감히 나가라고 얘기해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사고를 배우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사고함으로써 사고를 배우고, 이는 항상 어느 정도 깊게, 가능한 한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 이런저런 교과내용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듀이만 독특하게 교육과 더 넓은 인간 경험 과정 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서구 철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해석학이나 '교양(Bildung)' 전통과 명백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p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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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라는 작업은 자아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며, 자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교육은 욕망, 개인적 필요, 사적 이익의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하고, 바로 그 보편적인 것을 요구한다. 듀이도 유사한 의미에서 개별 학생을 능력 있는 민주시민, 계발된 능력을 가진 사람, 건설적인 형태의 사회 참여를 가능케 하는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형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교양(Bildung)' 의 개념에서 표현된 미숙함에서 성숙함으로의 이행은 개인형성의 문제이기도 하고, 문화적응의 문제이기도 하다. (...) 교육은 다른 것에 대해 열려 있는 마음을 요구하고, 자기 자신을 넘어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모함하는 것과 자신의 관점을 가지는 것, 이 과정에서 자신이 변화되는 것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변증법적인 운동을 요구한다. (...) 헤겔이 말했을 것처럼, 교육은 근본적으로 보편적인 것에 잘 대처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끝없는 과정이다. 듀이의 용어로 말하자면, 교육은 우리를 능력 있는 민주시민 및 충분히 합리적인 존재로 만드는 습관과 능력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pp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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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학생들의 지식 감소를 걱정하는 교육 이론가들은 (특별히 블룸, 허쉬 및 다른 보수주의자들의 경향처럼) 그 사례를 과장하고 향수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사실적 지식의 소유나 정전의 감상에 있어서든 야스퍼스와 버블스가 언급한 지적 덕성에 있어서든, 어떠한 과거의 젊은 세대로 전체적으로 오늘날의 젊은이보다 한층 뛰어나지는 않다. 그러나 향수에 빠지거나 과장을 하지 않는 한, 위의 모두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이전 세대에 비해 지금 학생들이 갖고 있는 정보의 종류와 양은 (확실히 다르고, 덜 총체적일 것 같다). 서구 전통의 위대한 작품들에 대한 지식과 감상도 (덜 할 것 같다). 지적 성찰의 습관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어떠한 조직적 방법이나 표준화된 시험도 정확한 측정을 해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러한 문제 모두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있다는 것, 특히 수행성, 전문 자격증, 현재 문화적 리터러시로 통하는 것 측면에서 즉각적인 수익을 가져오지 않는 지적 능력들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있다는 것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p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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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경험은 언어적 의미 상 겪는 것뿐만 아니라 하는 것, 단지 감각 인상을 받고 수동적으로 등록하는 것보다는 행위하고 반응하는 연속적인 과정, 환경을 통합하고 변형하는 것으로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다. 이성은 경험 밖의 능력이나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유기체인 인간과 그 세계 간의 상호작용, 생물학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모형에서 인간의 삶이 그 자체를 지탱하고, 환경에 대하여 삶의 방식을 협상하는 과정의 일부에 내재한다. 이성적 사고의 개념은 데카르트의 분명하고 명확한 답변들도 아니고, 칸트의 선험적 범주나 본유관념도 아니다. 그보다 이성적 사고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조직하는 역사적, 언어적 구성물이다. (...)
듀이에게 있어 인간의 경험에 내재하는 합리성은 그가 '실험적 지성'이라 부른 것으로, 다소 광범위한 개념이며, 이에 대해서는 내가 3장에서 더 상세하게 분석할 것이다. 이전의 경험론이 정신을 수동적이고 전언어적인 감각자료의 그릇으로 보는 관념에서 틀렸다면, 이 새로운 경험론은 경험의 활동적이고 종합적인 차원, 듀이가 실험적인 것에 대한 그의 개념에서 설명했던 경험의 차원을 강조할 것이다.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고, 단지 감각의 투입만 받는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적인 목표를 향한 실험의 방식으로 활발하게 감각자료를 해석하고, 범주화하고, 변형하는 것이 경험의 본질이다. 개별 감각들은 스스로 갇혀 있는 단위들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이 유기적이고 변증법적인 방식을 통해 더 넓은 인식의 흐름으로 조직되는 '접합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흐름은 모두 궁극적으로 유기체의 삶을 돕는다. 아니, 실제로 이것은 유기체의 삶 그 자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험은 삶 그 자체이며, 세계적인 주체성의 성장 또는 그것의 움직이는 존재이다. 일시적이면서도 적응성이 있는 것, 자기 자신을 세계 속의 대상들에 맞추지만 동시에 그 대상들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이 바로 경험이다. 경험은 '살아 있는 존재가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환경과 교류하는 일'이다. pp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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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듀이는 더 강한 의미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예술과 미학에 관한 그의 저작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 언어로 특이하게 경험들이라 말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경험을 일상적인 일들의 과정에서 구별하거나 경험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기 위해, 강하고 특수한 의미로 '하나의 경험'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학습의 경험이거나 무언가 더 넓은 실험적 과정의 정점일 것이다. 만약 경험의 본질이 특정한 방향이나 의도성을 포함한다면, 경험은 그 과정을 성취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시작한 기획은 그 목적 달성에 실패하거나, 막다른 곳으로 이어질 수 있다. (...) 그러나 경험의 과정은 반대로 중요한 정점--목적이 실현되고, 목적지에 도달하며, 교훈을 얻는 것--에 도달할 수도 있다. 듀이가 특이하고 강한 의미로 '하나의 경험'이라 말한 것은 후자에 해당하고, 듀이는 이 경험 개념이 예술과 미적 경험에 대한 해석에서 특별히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p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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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완전히 이미 만들어져 있고 위로부터 부과되는 교육과정이 아니라 학생들의 경험이 교육의 실천에 적절한 출발점을 제공한다면, 이해관심(interest)의 개념은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가정된다. 제도적 환경 속에 구체화되었을 때의 학습과정은 사실 일상생활에서 학습이 일어날 때와 동일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현존하는, 생생한 이해관심이다. (...)
듀이는 그 특유의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노력에 대한 집중 전체가 아니라,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이 모두 사용했던 노력 vs 이해관심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했다. (...) 주의력과 배움에 대한 의지가 교육의 필요조건들이라 해도, 이러한 조건들은 외적으로 부과된 학과만으로 충족되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이 거의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정보를 삼켜야 할 때 충족되는 것도 아니다. 학습이 있는 곳에서, 진정한 배움에 대한 의지는 살아 있는 경험과 그 경험에 포함된 이해관심이라는 기반 위에서 생겨난다. 듀이는 이전의 견해가 실패했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교실에서 학생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기가 부족하고, 너무나 자주 지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해 시험기간이 끝나면 곧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지식을 추구하고 보유하려는 동기는 오직 그 동기가 학생들의 '현존하는 고유의 이해관심들'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몇몇 그러한 이해관심들이 순간적이고 피상적인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지만--가장 명백하게는 초등학교 수준에서-- 여전히 '이해관심은 이를테면 아동에게 있는 전부이고, 교사가 호소해야 하는 전부이며, 출발점, 발단, 작동장치이다.' pp10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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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이는 모든 경험이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특정한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경험들만 교육적으로 가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다시 듀이의 비판가와 그의 제자들이 자주 똑같이 듀이를 오독했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듀이가 학생들이 어떤 경험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경험이더라도 그것을 교실에서 적절하게 다룰 것을 의도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듀이는 결코 이 견해--그가 자명하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았던 견해-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경악하면서 '경험과 교육'에 대한 잇따른 오해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듀이는 교육가가 학생들을 안내해야 하는 방향은 경험의 연속성 또는 지속적이고 습관적인 지적 성장 과정의 방향이라고 반복했다. (...) 교육적 경험은 현존하는 이해관심을 그 출발점으로 삼지만, 반드시 [학생들을] 어딘가로, 새로운 질문과 발견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교육가의 마음에서 학생들의 미래는 분명히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학생들이 현재 배우고 있는 것이 오직 언젠가 유용한 것으로 판명날 것을 위한 준비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금 가르치며 배우고 있는 것이 미래의 지적 성숙의 과정에서 지속될 계기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교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계속되는 학습으로 이어질 거라 예상할 수 있는 경험들과 탐구방식들을 준비한다.p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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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이에게 있어, '어떤 학생이 졸업 이후의 삶에서 즉각적인 직업에의 몰두 외에 어떠한 지식과 예술 분야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교육이 실패했다는 증거이다. 이는 그가 '얼마나 훌륭한 "학생"이었는지 또는 그가 얼마나 시험을 잘 보았는지와는 상관이 없다. 이것은 심어진 습관--이 경우, 사상을 [그저] 인상적인 어구 정도로 여기고, 위대한 텍스트를 소량으로 추출되거나 완전히 교과서 서술 정도로 납작해질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과 심어지지 않은 습관--사상의 중요성과 고전 텍스트들의 계속되는 관련성에 대해 오래 지속되는 감각-- 모두로 인해 실패로 간주된다. p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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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경험은 교육의 상황에 속하는 '객관적' 조건들과 탐구자의 정신의 삶 '내부의' 조건들 간의 상호작용이다. 전통적 교육방법이 개별 학생의 내적 조건들이나 '주어진 때에 그가 어떠한지'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면에서 틀렸다면, 진보주의자들은 정반대로 객관적 조건들을 무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 연속성의 원리와 상호작용의 원리 두 가지는 그 의미에 있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 적용에 있어서는 훨씬 덜 분리된다. (...)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잘못된 교육의 경험은 지속적인 학생 정신의 발달을 증진시키는 데 실패하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경험이다. 그리고 막다른 곳으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더 나쁘게는 미래 학습의 길을 가로막는 정신의 습관을 조장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경험이다. (...) 듀이와 진보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무관심한 정신, 호기심이 없고 상상력이 부족하며 무비판적으로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이 보통 보수주의 교육방법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
따라서 교육가의 역할은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듀이가 추천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과 같이 수동적인 교실의 방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전통 철학에서의 고전적인 권위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중간의 입장을 취하거나 아마도 더 고차원적 두 극단의 종합일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든 대학교에서든 교육가는 탐구의 리더이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방향으로 이어질 거라 예상되는 종류의 활동들을 지휘하는 사람이다. 그 뱡향이 획득해야 하는 지식이든, 교육이 심어줄 지적 습관이든, 교육이 개발할 능력이든, 어떤 쪽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교육가의 역할은 여러모로 전통적으로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 pp1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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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이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교육받은 정신에 대한 관념은 듀이의 긴 생애 전체에 걸쳐 변함없이 지속되었고, 그것은 여러모로 듀이의 도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지식론의 결과이다. 유연성, 열린 마음, 독창성, 인내, 활발한 호기심은 듀이의 주요 미덕들의 일부이다. 듀이는 자신의 교육적 성공에 대한 관념과 더 넓게는 자신의 철학적 관점 모두에서,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환영하며, 교조적이지 않고, 특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잘못을 찾아내는 비판보다는 주로 건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적 성향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것을 넘어서, 교육받은 정신은 '마음속에서 한 주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진지하게 연속적으로 숙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찰적이다. 교육받은 정신은 서두르지 않고, 관조적이며, 빠르고 피상적으로 결론에 도달하기보다는 기꺼이 한 문제를 깊이 검토할 것이다. 교육받은 정신은 주의 깊고, 경청하며, 집중을 유지할 수 있고, 자제력이 있다. 교육받은 정신은 미리 주어진 절차들을 따라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문제나 질문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더 넓은 의의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며, '상관없는 것이나 당분간 중요하지 않은 것은 무시하면서 그 앞에 있는 장면이나 상황을 포착할 수 있고, 주목해야 하는 요소들을 붙잡아 그것들을 각각의 요구들에 따라 선별한다는' 의미에서 좋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신중한 정신은 중요한 정도를 평가할 수 있다. 신중한 정신은 중대한 것에 무관심하지도 않고, 사소한 것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게다가 듀이는 경험에 의미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경험을 재조직하고 재해석한다는 의미에서, 교육받은 정신이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누군가의 경험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그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과거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어떤 통찰력이든 그것을 미래를 위해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pp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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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듀이에게 있어, 교육과 과정을 최고로 달성했음을 나타내는 정신의 미덕에는 엄밀하게 지적인 것을 넘어서 정서적인 것, 한층 더 넘어서는 사회적인 것이 포함된다. 훌륭한 판단력과 탐구 자체에 대한 열정은 지적이면서도,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미덕이다. 이것들은 자아를 그 자신 내부의 경계 안에 가두기보다, 타인들과 협력하여 논의하도록 이끄는 마음의 습관들이다. (...) 마찬가지로 훌륭한 판단력은 단순히 논리적인 사고의 작용이 아니라, 우리의 윤리적 지식에 대해 알려주고 행동에 옮길 능력을 보장하는 특정한 '정서적 민감성'을 포함한다. (...)
듀이에게 있어 교육적 실패의 표시인 지적 악덕들에는 정보를 보유하거나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것을 넘어서, 특히 유연하지 않은 정신, 교조주의, 협소한 지평, 파벌주의, 부주의, 인습의 고집, 무관심이 포함된다. 낡은 교육이 주입했던, 관습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권위에 대한 복종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적 유행에 휘둘리고, 그 시대의 정설에 도전할 준비가 되지 않도록 내버려두는 유순한 정신을 만들어낸다. pp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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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논리--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항상 이미 학습의 과정을 특징짓고 있는 기본 토대와 방향--는 경험의 논리이다. 요컨대 이것이 듀이가 일으키려 애썼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다. 학생들의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졸업 이후의 삶을 위한 준비, 경제 기술적 효용성, 문화적 리터러시, 특정한 신념의 세뇌라는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육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목표를 학습과정의 바깥에서 가져온 가치들로 대체함으로써, 학습과정을 왜곡한다. (...) 이러한 경향은 본질적으로 교육을 특정한 종류의 주체들(교육당국이 바라는 대로 믿고, 가치판단을 하고, 행위하는 사람들)을 제조하는 수단으로 축소시킨다. p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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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에서는 다소 중요하게 경험의 두 가지 의미가 구분된다.--이상하게도 이 구분은 전혀 듀이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무렵, 독일 철학은 점점 더 경험을 지나치게 자연과학에 신세를 지고 있는 인식론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면서, 경험을 'Erlebnis(체험)'와 'Erfahrung(경험)'으로 구분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전자는 전이론적이고 즉각적인 '살아있는 경험'을 함축하고, 후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식과 판단들이 더 넓게 통합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
Erlebnis'를 반드시 삶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
Erlebnis'는 생생하고, 개념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경험, 개인적이고, 적잖이 감정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
Erlebnis'는 종종 감각적인 것, 독특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 이러한 의미에서 경험은 자아가 개별적으로 친밀하게 소유한 것이며, 종종 더 넓은 의미의 배열이나 의식의 내면성을 넘어선 어떠한 사회적 실재에도 이르지 않는 개인의 사건이다. (...) 그것은 삶에서 생겨난 에피소드 같은 사건으로, 여기에서 두 번째 의미에서의 경험이란 단어의 특징인 더 넓은 의미와 시간의 틀은 결여되어 있다.
하이데거나 가다머 같은 독일 사상가들이 20세기 현상학에서 이야기했을 의미에서의 경험은 'Erfahrung'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경험은
'
Erlebnis'에는 없는 더 넓은 의미의 배열과 시간의 지속을 나타낸다. 'Erfahrung'은 종종 인식론적 용어인 인식이나 판단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험적이거나 과학적인 함축은 덜 가지고 있고, 역사적인 함축을 더 가지고 있다. 'Erfahrung'은 개인적 사건들보다는 이러한 사건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측면에서 더 넓은 인간의 경험의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제이가 서술한 바와 같이, 'Erfahrung'은 '학습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는 더 시간적으로 긴 경험 개념, 개별적인 경험의 순간들의 내러티브 전체 또는 모험으로의 통합을 의미하게 되었다.'p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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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fahrung'의 의미에서의 경험은 시간적 연속성을 나타내며, 때로는 개별 사건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진보를 나타낸다. 'Erfahrung'은 종종 내러티브 구조뿐만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의의를 가정하고, 점점 더 많아지는 에피소드들, 사회적 실천들, 사람들, 일종의 이야기를 형성하면서 학습된 교훈들을 통합시킨다. 비록 그것들은 부조화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경험은 그것이 이해되는 한, 내러티브와 닮았고, 대체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험 속으로 퍼지는 정합적인 의미 줄거리, 특수한 사건들이 이야기에 기여하면서 의미가 있게 되는 그 줄거리와 닮았다. (...)
이러한 의미에서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학습하는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항상 오래된 사고 패턴을 굳히기보다 그것을 변형시키기 때문에, 몇몇 중요한 측면에서 우리의 자기이해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게 한다. 심지어 가다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Erfahrung'이나 경험은 '처음부터 항상 부정의 경험이며, 우리가 가정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험은 우리의 기대에 맞거나, 아니면 기대와 반대된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갑자기 멈춰 서서 우리의 예상을,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주어진 경험에 대해 했던 예상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 (...)
여기에서 우리는 마침내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가다머가 적절하게 말한 것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경험은 참으로 실험적이다. 그러나 그 단어에 대한 듀이의 과학적 이해--연구를 하고, 합리적으로 정리하며, 해결책을 지향하는 경험--에서뿐만 아니라, 경험이 깊이 변형시킨다는 의미에서 실험적이다. 궁극적으로 경험이 변형시키는 것은 경험 주체 자신과 그의 관점이며, 이는 그가 문제 상황을 해결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가 변화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경험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하나의 경험의 끝에서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경험을 겪은 사람은 새로운 통찰력과 더 풍부한 이해 또는 자기이해를 가지고 나타난다. pp14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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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경험과 교육이 똑같이 어떤 것으로 끝날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듀이와 가다머 둘 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들은 후자로, 즉 방법이나 문제 해결책의 습득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한계에 대한 지식으로 끝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험과 교육은 결국 가다머가 '영향사 의식'이라 불렀던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즉시 역사의 결과인 의식--전통 속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언어, 신념, 평가, 전성찰적인 이해들로 구성된 의식--이며, 그렇게 영향을 받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다. 영향사 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기반의 우연성을 개닫고, 따라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깨닫는다. 우리가 최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이렇나 종류의 자각이고, 이는 어떠한 사실적 정보 또는 심지어 추상적인 인지적 기능이나 탐구 방법의 소유 이상이 것이다. (...) 가다머가 한정된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람의 '지평'이라 불렀던 것은 경험의 진행 속에서, 하나의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주는 과정 속에서 수정되고 넓어진다.
그렇다면 그 과정의 정점은 경험하는 사람 자신의 역사성 또는 그의 관점과 바로 그 존재가 역사의 소산이고 따라서 다르게 되었을 지도 모르는 정도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여전히 'Erfahrung'의 의미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전통에 대해 서는 것(stand to tradition)을 의미한다. 경험한다는 것은 의문을 품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전부 과거의 무거운 짐으로 여기고 거부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으미에서 그 둘의 중간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다. (...) 경험에 열려 있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전통이 우리에게 하는 요구들에 열려 있는 것과 그 요구들에 총명하게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pp14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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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양(Bildung)'은 실험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그것의 결과를 가리킨다. 이렇나 방식으로 형성된 사람은 '교양'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이 어울리고 중요한지, 무엇이 아름답거나 옳은지에 대한 감각이다. 따라서 교양 있는 사람은 기술과는 매우 다른 기지나 미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p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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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dung'과 'Erfahrung' 개념은 모두 듀이의 의미로도 설명될 수 있는 경험을 제시하지만, 급진적 경험론과 실용주의보다는 현상학적이고 해석학적인 철학에서 더 잘 설명되는 변증법적이고 또 내러티브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가다머가 '진정한 의미'에서 경험이라 불렀던 것은 시간적으로 길고, 통합되어 있으며, 의미 있고, [사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 대체로 급진적 경험론과 영국 경험론을 구별해주는 경험의 연속성은 내러티브 연속성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을 의미 있거나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내러티브와 같은 해석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p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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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생활의 미친 듯한 속도, 즉 경험의 파편화, 거의 모든 것의 일시성, 우리를 차지하고 우리가 신경 쓰는 너무나 많은 것들의 순간적이고 피상적인 특징과 결합된 이 엄청난 속도는 영원하고, 의미 있으며, 때로는 심오한 것으로의 경험관에 좋은 징조가 아니다. 듀이는 훨씬 옛날인 1934년에 20세기 인간 경험의 빈곤한 상태를 한탄했는데, 이 한탄은 그가 그 정도에 대해 비판했을 때보다 지금 훨씬 더 적절하다.
(...)
'Erfahrung'과 'Bildung'은 모두 수년간 매우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그것들의 달성을 시험할 수 있는 표준화된 검사도 없고, 그것들은 수량화될 수 없으며 수익을 내지도 못하고, 거기에는 그것들에 대한 과학도 없으며, 어떠한 기술을 통해서도 그것들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교육의 심장과 영혼이고, 교육의 성공에 대한 가장 고차적인 지표이다.
교육은 언제나 약간 교육 주체를 지배적인 규범과 생활방식에 부합하게 적응시키거나 구성하려고 애쓴다. 교육은 교육 주체로 하여금 특정한 종류의 삶의 전형인 경험들을 가지고 그러한 삶을 살도록 준비시키고, 학생들이 교실로 가져오는 경험이면 어떤 것이든 그것을 가지고 작업한다. 그러나 경험이 즉각적인 것, 순간적인 것, 파편화된 것으로 향하게 될 때, 교육가가 [해야 할] 일은 종종 어마어마한 역경을 마주하면서, 학생들이 일반적인 사회나 가정에서 발견할 것보다 더 통합되고 지속하는 경험 양식을 향해 가도록 시류에 역행하면서 학생들을 이끄는 것이다.
pp15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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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이가 1923년에 언급했던 것처럼, '영혼도 정신도 없는 산업생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오락에 매료된 것은 예술 및 과학에 대한 취향의 하락과 결합되어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듀이가 목격하고 있다고 믿었던 문화적 쇠퇴의 구제방법은 교육기관들에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기관들의 사회적 의무에는 졸업생들로 하여금 일생 동안 여가 시간을 더 잘 활용하도록 해줄 성찰성과 취향의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p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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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과정에는 더 이상의 교육 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에, [교육의] 성공에 대한 유일한 측정은 학생들이 교과내용을 가지고 더 나아간 공부를 하고, 더 나아간 일련의 사고를 하도록 해줄 능력을 개발했는가의 여부, 또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학습과정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을 그 과정으로부터 끌어냈는가의 여부이다. 이것을 특정 점수, 학급 평균이라는 '잘못되고 사기를 꺾는 표준'과 같은 점수를 통과하거나 성취해야 할 표준으로 대체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무 낮은 기준을 세우는 것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거의 기대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게 만든다. (...)
양적인 것보다 질적인 것을, 최종상태보다 과정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 문화에서는 흔치 않지만) 더 교육의 의미를 잘 포착하면서도, 또한 교육가와 학생들 둘 다에게 더 부담이 크다는 그의 신념에서 생겨난다.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획득한 학생들은 곧잘 자신들은 있어야 할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성공에 안주하고, 밑바닥에 있는 이들에게나 더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고의 기술이 관련된 곳에서는 누구도 결코 완전히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는다. p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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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영향력 있는 사실성의 해석학은 듀이의 견해와 많은 것을 공유하지만, 또한 중요한 측면에서 듀이의 견해를 능가한다. (...) 듀이가 과학적 실험을 일반적인 사고의 모델로 간주했던 반면, 하이데거는 점점 더 과학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대에 필수적으로 과학적 모델의 한계와 비과학적인 사고 유형들이 빛을 잃게 만드는 문화의 위험성에 주목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했다. '과학은' 많은 장점들이 있지만, '사고하지 않는다.' p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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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적 합리성은 연역하고 계획하지만, 자신의 한계도, 계산 대상의 의미도, 계산 행위 바로 그 자체도 이해하지 않는다. (...)
이와 반대로 명상적 사고는 확실성보다 이해의 깊이를 추구하고, 학습된 담론뿐만 아니라 일상의 인간 경험에도 적용된다. 명상적 사고는 방법을 따라가지 않고, 특별한 전문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한계 내에서 명상적 사고의 길을 따라갈수 있다.' (...) 중요한 것은 명상적 사고는 모델이 없는 사고방식이라는 점이다. 명상적 사고는 문제 상황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명상적 사고가 계산적 사고는 가지고 있지 않은 깊이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어떤 더 깊은 의미의 차원보다 기술적 정확성과 확실한 결과를 추구하는 피상적인 수준에 만족하여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명상적 사고는 일반화되고, 측정되거나, 사용될 수 있는 것보다는 존재의 의미와 특수성을 향하는 방향 속에서, 철학적 추상화나 형식적 모델화에 저항하고,
Erfahrung으로서의 경험과 일관되는 자유롭고 변형적인 특성을 가진다. (...)
우리는 여기에서 듀이의 실험탐구로서의 사고 모델의 한계를 마주한다. 사고는 단일한 트랙을 따라가지 않는다. (...) 우리는 이 사고를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술적 경험을 통해 예측할 수 없고 쉽게 다른 이들에게 반복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화되어 나온다. 우리는 어떤 것을 새롭게 이해했고, 그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조망이나 일련의 질문들을 가지고 나왔다.
하이데거가 종종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사고는 기술이라니보다는 '길(way)'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봐야 한다. 방법은 추상적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존재하거나 '길을 만드는' 사고는 그렇게 될 수 없다. 대신에 하이데거는 사고를 숲길을 건너는 것--목적지가 불확실하고, 지도도 없지만, 가끔 어떤 것이 보이게 되어 '분명해지는 것'--에 비유한다. pp227-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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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대한 교육적 경험은 많은 것들을 의미할 수 있고, 여기에는 듀이식의 탐구도 포함되지만, 또 다시 듀이의 모델은 이 경험을 완전히 풍부하게 포착하지 못한다. 어떤 종류의 이론적 모델도 정보의 전달, 미적 감수성이나 취향의 계발, 해석의 기술, 문학 비평, 배운 교훈의 자기 삶에의 적용을 한꺼번에 담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또 다시 의미의 해석은 실험탐구보다 더 나은 포괄적 용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심지어 이 용어도 문학을 배우는 교육적 경험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나 그 경험을 가지는 것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포함할 것 같지는 않다. p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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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실에서는 여전히 탐구하지 않고 있고, 학생들이 그들의 경험에 대해 더 깊이 검토하도록 이끄는 마음의 습관도 가르치지 않고 있다. 교육과정, 청소년심리, 교수법에 대한 연구가 수십 년 동안 이루어졌지만, 오늘날의 핛애들은 이전의 학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찰성(어떤 학자가 제시했던 의미이든)에 대한 경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
우리 시대의 무사고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과거와는 다른 형태를 상정한다. 듀이의 비판의 초점이었던 다양한 무사고성은 학습과정의 표준화와 가짜 과학화로 대체되었다. 권한 부여, 기능과 비판적 사고, 인지적, 사회적, 심리적 발달이라는 현대의 표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학생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직장을 잡고, 경제적, 기술적 명령에 주의를 기울이며, 전문지식을 따르고,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띨 정도로 어디에나 있고 겉보기에 대안이 없는 사고와 행위의 규칙들에 자신을 맞추도록 훈련받는다. (...)
경험과 같이, 사고는 해석적으로 풍부한 개념이다. 사고에는 이해와 비판, 분석과 종합, 질문과 설명, 내러티브와 은유, 추론, 판단, 취향, 식별, 기억, 정보, 그 밖의 많은 다른 것들--대부분 기술과 거의 관련이 없는 것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이해와 해석은 방법이 아니라, 해석학적 순환을 따른다. 이해와 해석은 정합성과 합의를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이것들은 해석적인 규칙이 아니라 오직 매우 개략적인 지침이다. (...)
표준화와 기술화를 향한 최근의 경향들은 진정 비성찰성을 만들어내는 방안이다. (...)
우리는 사고를 체계화하고, 사고를 규칙의 체계로 환원하며, 따라서 그것을 질서라 부르는 것을 항상 추구했고 의심할 여지없이 계속해서 추구할 것이지만, 사고 그 자체, 가장 특별히 고차원적이고 창의적인 이 능력은 여전히 규칙들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난다. pp24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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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인간의 경험에서 생겨나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 문제의 해결책을 다시 원래의 문제 상황으로 가져와 검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론적 성찰은 그것이 철학적인 것이든 과학적인 것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실천적 영역 및 경험적 영역에서 생겨나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고는 완전히 공중누각을 짓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무엇이 철학적 문제를 구성하는가에 대한 실용주의적 견해이다. 이 견해의 교육적 함의는 학생들이 문제의 진정한 차원들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문제 해결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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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교수는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담론의 수준을 낮추지 않으면서, 순전히 개념적인 교과내용과 일상의 내용을 연결할 것인가? 듀이는 해당 영역에 대해 사전의 이해관심이 존재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공부하려는 이해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교육가가 현존하는 충동이나 이러저러한 종류의 호기심에 호소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주장했다. 교과내용이 완전히 이론적일 때 어떻게 이것이 이루어지는가?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이 어떤 영리한 교수법적 기술을 통해서 또는 교과내용에 대한 교육가 자신의 열정을 전염시키는 영향력을 통해서 '교과내용을 흥미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듀이의 견해는 여전히 학생들 자신의 경험을 탐구를 위한 이해관심과 동기의 기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pp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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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청중들에게 강연을 했을 때, 그는 대학에 있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유로운 탐구가 가져오는 지적 지평의 확장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대학이 인간에게 해주어야 하는 한 가지는 그에게서 편협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또는 우리 거의 모두--는 우리가 들어온 [현재의] 삶의 영역보다 약간 더 좁은 삶의 영역으로부터 나왔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탈출에 있어 우리의 껍데기에서 나올 것인지, 아니면 그 껍데기를 데려올 것인지 하는 것이다. 확실히 '자신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대학에 온 소년소녀들은 자기 조망의 지평을 약간 더 밀어내고, 자신의 측정 기준을 늘려야 한다." p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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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에 대한 거부 또는 무능은 우리를 영원히 공적 의견이나 정치적 유행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도덕적 비행위자로 만든다. 아이히만의 범죄를이끌었던 것은 그의 '상상력 부족', '순전한 무사고성'이었다. 아렌트가 관찰했던 것처럼, '그렇게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그러한 무사고성은 모든 사악한 본능들을 합친 것보다 더 대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p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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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예술이 그러하듯이, 문학은 우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문학이 우리를 형성하는 방식과 정도를 깨달았을 때에만 문학의 교육적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 교육적 목적이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경험과 문학, 삶과 내러티브가 그것들의 상호의존 속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이것이 현재 장의 가설이다. 문학을 접하는 것은 실제로 듀이의 의미에서의 탐구의 형태이지만, 그것은 더 직접적인 탐구의 형태를 능가하는 방식의 탐구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탐구하고 있는 진리는 포괄적인 의미의 진리로, 인간의 조건 그 자체에 대한 진리이다. 문학은 확실히 다른 수단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써 가르쳐준다. 더 중요하게, 문학은 우리를 형성하고 변화시킴으로써 가르쳐준다. (...)
문학은 비문학 담론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경험을 조명한다. 삶에 대한 문학의 서술은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그 방식은 개인적이고 가슴에 사무치며, 복잡한 주제들을 특정한 인물과 상황들에 관련시키고, 우리의 경험을 인간적으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을 정확히 끌어낸다. 문학의 언어는 정보적 지식을 훨씬 초월하고, 삶의 깊이에 도달하며 독자를 변화된 존재로 만드는 방식으로 의미를 나타낸다. pp50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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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독자로 하여금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관점과 문학을 읽지 않았다면 가지지 못했을 경험을 알게 함으로써,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느껴진 어려움'을 겪고, 무엇이 이루어져야 할지를 숙고하며, 직접 인간 행위의 결과들을 보게 함으로써, 교육을 한다. 독자는 상상 속에서 극적인 상황들을 시연하며, 그때 해석, 정서적 민감성, 숙고의 능력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pp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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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문학교육은 학생들이 교육받지 않았던 때보다 자신의 시간을 더 유익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취향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듀이는 젊은이와 노인 모두의 여가 시간이 점점 더 대중적인 형태의 여흥과 아무 생각 없는 오락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방식에 대해 걱정했는데, 이 추세는 물론 더 최근 의 수십 년 동안에도 계속해서 가속되었다. 듀이가 썼던 것처럼, '우리는 과학이나 예술에 대한 취향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은 과학자나 예술가가 될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가 시간이 생겼을 때 자연이나 문학에 관한 어떤 것을 읽거나 듣는 데 관심이 있을 사람, 음악과 연극을 즐길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 듀이는 교육을 해결책으로 기대했고, 잘 가르쳐진 문학 및 다른 예술들이 현재 일반적인 것보다 더 세련된 취향과 이해관심들을 심어줄 것이라 희망했다. pp519-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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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본질은 탐구하는 것, 교사이든 학생이든 누구도 진리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지 않고 탐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학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공통의 기반 위에서 텍스트의 의미(들)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교육가는 탐구자로서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의 견해, 종종 대단히 기초가 튼튼한 견해를 가지겠지만, 듀이의 요점은 교육가가 아무리 많이 전문가라 할지라도, 그는 탐구의 싸움 위에 서지 않고, 오류가 가능하다는 정신 속에 해석들을 굴복시켜야 하며, 학생들이 그 해석들의 장점을 검토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결코 구경꾼이나 완전히 이해하기 쉽게 된 정보의 수동적인 수령인의 역할에 놓여서는 안 된다. p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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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는 [수준이] 더 높은 형태에 있든 더 낮은 형태에 있든 간에, 우리의 자기이해가 드러나고 우리의 삶이 방향이나 지향을 얻는 기본 구조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렇나 방식으로, 내러티브란 영혼을 형성하고 교육가와 정치 통치자 모두가 대단히 진지하게 간주해야 할 문제라는 플라톤의 통찰을 이용할 수 있다. (...) 현상학적인 용어로, 내러티브는 자아에게 그의 존재에 예비적 경향을 설정하는 등장인물과 줄거리들의 가능성들을 제공한다. 사람이 그가 읽은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점을 과장하는 것이지만--왜냐하면 그는 어떤 문학의 등장인물들을 모방할 것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정도로 모방할 것인지 선택하는 데 있어 항상 자유를가지고 있고, 인간의 품성이 오직 이야기에 의해서만 형성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아는 날것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영향을 잘 받는 구성물 및 자기구성물이고, 니체가 말했던 것과 같이 '그것인 것이 되는' 것이다. 자아는 자신의 문화와의 거듭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데, 이 문화에는 특히 문학적 문화의 산물들이 포함되며 자아는 이를 통해 우리의 존재가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들을 배운다.
물론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문학이 제공하는 종류의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자기이해가 깊이 변화되는 것은 익숙한 경험이다. 누군가는 모두가 생애 전체에 걸쳐서 아동기에 접했던 줄거리들에 국한된 채 남아 있기보다, 성숙한 나이에 주의깊에 읽은 적어도 두세 가지의 위대한 소설들로 깊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삶은 실제로 중요한 방식으로 예술을 모방하는데, 이는 때로는 성찰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비성찰적으로, 때로는 선택에 의해서 다른 때에는 조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
플라톤이 우리로 하여금 주목하도록 이끌었던 것은 그러한 내러티브들의 형성적인 능력이다. (...) 우리가 들으면서 자란 이야기들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종종 생애 전체에 걸쳐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pp536-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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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을 읽는 사람은 19세기의 러시아를 살아야 하고, 사건들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그 사건들을 경험해야 한다. 여기에서 '처럼(as if)'이 본질적이다. (...) 일반적으로 미적 경험 속에서 우리는 이질적인 세계로 이동되어서 '상상의 양식 속에서... 텍스트의 가공된 우주 속에 산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문학작품의 의미는 바로 텍스트 그 자체와 독자의 정신 간에 일어나는 조정의 산물이고, 그 의미는 오직 저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 문학이 주는 통찰력은 비인격적인 진리가 아니라, 잠재적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독자 자신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 그 작품의 의미에는 바로 독자에게 말하는 작품의 힘 또는 저자가 의도했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는 방식으로 독자의 경험 속에서 공명을 일으키는 힘이 포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러티브는 실제로 단순히 이야기되지 않고, 독자에 의해 살아진다. 내러티브는 활발히 상상 속에서 삶으로 가져와지고, 설정되고 변경되며, 해석되고 독자의 경험에 적용되며, 질문되고 비판되며, 그렇게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 여기에 문학의 교육적 의의뿐만 아니라, 문학의 보편적인 매력의 궁극적인 원천이 있다. 인간의 경험과 주체성 그 자체는 어쨌든 이해되는 한, 항상 이미 시간적이고 내러티브적인 조건들 속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문학을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접하게 하고, 이는 단순한 정보 습득을 훨씬 넘어서 우리의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리처드 키어니가 썼던 것처럼, '우리가--단지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것에 더하여--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따라가는 사람으로서 역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나 자주 듣는 것처럼, 교육의 목적들에 유용한 정보의 소유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학생들에게 그들의 세계 및 자기 자신에 대해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포함된다면, 잘 말해진 좋은 이야기들보다 이것에 더 좋은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가 고차적 사고가 일어나고, 삶이 변화되며, '교양(Bildung)'이라는 의미의 교육이 그 역량을 발휘하는 곳이다. pp54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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