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읽으며 '무당의 공수' 같은 소설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 세대 여성들의 구비구비 굴곡진 처절한 삶을 무당의 공수처럼 토해낸 소설. 읽는 과정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 여인들의 상처와 슬픔을 듣는 그 시간이 '치유'의 시작임을 느끼게 해준 소설이었다. 이미 모든 사건은 벌어졌고, 또 지나갔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 사건이 다시 우리 앞에 놓일 때, 우리 혼의 일부가 치유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이야기가 우리 내면의 메마르고 딱딱한 껍질을 부수어주기 때문일까, 아니면 넓은 맥락에서 그들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안재성 작가가 신작 소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후기에서 작가가 자신을 '글 무당'이라 소개해서 반가웠다. 그가 전에 쓴 '이현상 평전'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남성 작가이고 평전 작업을 많이 해온 작가여서 공선옥 작가보다 훨씬 감정이 절제된 담담한 문체를 구사하지만, 안재성 작가 역시 무당이었다. 우리 역사의 그늘진 부분,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뤄왔으니, 글로써 잃어버린 시간과 영혼들을 되살려내고 위무하는 일종의 무당인 것이다. 오늘날 문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그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픽션이 아니다. 작가와 인연이 닿은 '50년 된 낡은 노트의 기록'을 작가가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 태어났더라면 어떤 분야에서건 재능을 발휘했을 한 수재가 해방 공간과 6.25전쟁을 통과하며 겪은 고통의 기록. 기록을 쓴 이의 실명 '정찬우'를 소설가는 그대로 사용했다. 소설의 주인공 정찬우는 전라도 지주 집안 출신이었다. 동학이 일어났을 때 일가친척이 모두 죽임을 당하지만 인심을 잃지 않았던 할아버지 일가는 살아남고, 할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고향을 떠나 만주에 정착한다. 교사가 꿈이었던 정찬우는 만주에서 가족을 떠나 봉천 사범학교에 입학하고, 태평양전쟁 강제징용을 피해 학교를 떠나던 중 '조선의용군'이 되어 일제와의 싸움에 뛰어든다. 그 전쟁에서 공을 세워 그는 해방 후 동료들과 평양으로 귀국하고 이것이 그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역사를 좋아해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그는 6.25가 일어나자 김일성으로부터 남조선에 혁명 사상을 고취하라는 '교육위원' 임무를 명령 받고 문화 관련 인사들과 함께 전쟁중에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가 목격한 전쟁은, '남조선 해방'이 아니었다. 그 전쟁은 어떤 명분도 붙일 수 없을 만큼 끔찍하고 잔인한 전쟁이었다. 무수한 젊은이들을 그저 총알받이로 만들고, 무수한 마을을 소각시켜 민간인을 희생시킨,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전쟁은 권력자들의 욕망이 야기한 재난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정찬우는 극우파인 악질 친일 경찰과 마찬가지로 사람보다 체제 수호를 우선시하는 극좌파 또한 타인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똑같은 사람들임을 인식한다. 이념은 상관 없으며, 남과 북 어디서건 출세하려는, 혹은 생존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포로수용소와 형무소에서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을 비틀어 무고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는 고문, 협박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목숨만 간신히 부지한다. 그 때문인지 실제의 정찬우는 마흔을 넘기고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의 기록을 보관한 사람은 당시 생후 몇 개월이었던 그의 자녀였다.
소설은 4.19혁명 때 특사로 풀려난 정찬우가 25년만에 고향 땅을 밟으며 오열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소설 전체가 식민지와 내전으로 상상도 못했던 굴곡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통곡이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울음소리에 우리가 귀기울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 소리를 듣는 만큼 우리 삶의 자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슬프고 굴곡진 과거를 오래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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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해봤자 친일파 악질경찰 출신들에게 고문당하고 감옥살이 할 게 뻔한데 어떻게 그리합니까? 저는 인민군도 싫고 국방군도 싫습니다. 모든 게 전쟁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종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요.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 안할랍니다. 무사히 살아남으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지을 겁니다."p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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