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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역사, 인물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 제임스 게일 ㅡ 조선의 보통사람, '상놈'에 대한 애정어린 기록

by 릴라~ 2018. 12. 23.

 

 

사람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책을 읽는다. 내 경우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를 추적하기도 하고, 내가 하는 일과 관련된 자료 조사를 위해서 읽을 때도 많다. 그런데 내게 있어 가장 큰 독서의 즐거움은, 단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그 시대의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들 때다. 그 풍경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뜨거운 감성으로 느끼고 소화한 '내면의 풍경'이다. 작가의 내면의 풍경 속으로 초대되는 순간이면 나는 언제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과 감동을 느낀다. 이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 책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은 그런 드문 경험을 제공하는 책이고 그래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가슴이 울렸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쓴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자신의 책에서 조선에 관해서라면 제임스 게일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언급한다. 이 구절을 근거로 이 책의 역자는 제임스 게일의 저서를 찾고 이 귀한 문헌을 발견해 번역했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다정하고 발랄한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알게 된다. 그가 구한말 조선에서 보낸 십 년의 시간 동안 정말 조선의 내면에 다가갔다는 사실을. 그가 만난 조선은 순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이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지만 사회제도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기엔 너무 낡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그 거센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그는 다양한 계층의 조선 사람들을 기록했는데 이 10년의 기록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가 만난 조선 '상놈들'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가 말했듯이 '상놈'이야말로 조선의 본질적인 얼굴이었고, 이 책은 그 얼굴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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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헌들은 실생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죽은 문자다. 그러니 결국, 이곳에서 연구해볼 만한 흥미로운 분야는 글을 읽지 못하는 계층의 신앙이나 전통문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놈이 바로 이런 것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계층인데, 이것은 그 자체로 아주 광범위한 주제이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다 살펴보기는 어렵다. 이들의 신앙이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이 빋는 것은 매우 다양하며 셀 수도 없다. 천 조각, 길가의 나무, 새와 짐승 같은 수많은 것들이 이들의 삶과 연결되어 끝도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pp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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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독립'이란 말은 새로운 개념이다. 단어 또한 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 번도 다른 존재로부터 분리된 오롯한 자신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서양 세계에선 넓은 국토에 집이 한 채 그렇게 서 있듯 개인도 자신의 책임하에 홀로 살아가는 반면, 동방의 사람들은 함께 일하고 집도 마을을 이루면서 반드시 함께 들어선다. 또한 서양 사람들을 움직이는 거은 확장과 분화 작용을 통해 안에서 밖으로 뻗어가는 큰 힘인데 반해, 동양에선 삶을 한정하고 응축하면서 그 중심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이 과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놈들이 차지했다. 사실 이들 상놈들의 능력 또한 너무나 쪼그라들어 있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절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친한 사람 하나 더 붙여주지 않는 한 아무리 간단한 걸 시켜도 절망한 채 넋 놓고 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톱질을 하려면 반드시 반대쪽에 한사람이 더 있어야 한다. 없으면 일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해온 데다가, 또 그것이 일이 돌아가는 이치에 맞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다. p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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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놈들의 가정생활은 아주 간단하다. 아무리 까다로운 사람이라도 아궁이에 불 넣은 따뜻한 방바닥에 자리를 한두 장 깔고 누우면 그만, 더 이상 편한 것이 없었다. 그의 억척스럽고도 나긋나긋한 마누라가 이 모든 것을 잘 돌아가게 만들었는데, 아마 이런 여인들이 없었더라면 조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재가 되고 먼지가 되어 사라졌으리라.


남편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쉬는 동안, 부엌에서 여인들은 밥 짓는 소리 위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울려대며 열심히 일했다. 비록 여인으로서 화려하게 채색된 삶을 살진 않지만, 그네들은 이 극동이 자랑할 만한 너무나 헌신적이고 기품 있는 여인들이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에 우악스럽긴 하지만 이 전쟁 같은 삶의 굴레 속에서도 남편에게 충실하고 아이들에게 자상한,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 담담하고 훌륭하게 해내는 이들은 전 세계 모든 여성들의 자랑이리라.


이제 상놈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며 이들의 좋은 점들만 기억하기로 하자. 이들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언제나 치우침 없이 온화하다. 좀 거칠게 드러날 때도 있고 세련되게 표현될 때도 있지만 항상 그 내면으로부터 빛이 난다. 그네들은 거의 씻지도 않고, 갈아입을 옷도 없으며, 카펫이나 슬리퍼도 없다. 아무 음식이나 먹고, 길을 걷다 밤이 오면 그냥 길에서 잠을 자고, 살아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죽을 때도 아주 소박한 장례를 치를 뿐이다.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아내는 고행과도 같은 그들의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삶. pp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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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 대척점에 있다. 서양에서는 한 사람 앞에 펼쳐질 삶을 대비하고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지만 조선 사람들에겐 이러한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현재에 눈 감고 과거만 바라보고 살도록, 한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거나 압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우리는 발전을 생각하지만, 그들은 통제를 생각한다. 서양의 학생은 다양한 학업 성취와 새로 알게 된 갖가지 것에 기쁨을 느끼지만,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배워 안다는 것보다 단지 한자를 읽고 스는 것에서만 성취를 느꼈다. 단지 한자를 익히기 위해 20년을 독거하면서 공부하는데, 이렇게 오랜 기간을 공부하고도 많은 수의 학생은 한자 공부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서양에서 교육이란 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재능의 연마임에 반해, 조선에서 교육이란 발에 붕대를 감는 것처럼 정신에 석고 깁스를 둘러치는 것이었다. 이 깁스가 한 번 굳고 나면 성장이나 발전은 완전히 멈추게 되는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다른 누구보다도 유학자들이 더 기독교의 전도에 반대했다.


아무리 생각 없는 미국인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노동이란 존귀한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교육을 할 때도 어린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배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다. 조선말로 노동을 뜻하는 말은 il인데, 이 단어는 손실, 손상, 나쁜, 불길한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는 데 쓴다. 게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가 의심의 여지없이 고대로부터 귀한 신분이라는 것의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p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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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두 명만 있으면 하루 종일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글자 한 자 한 자에서 끌어낼 수 있었는데, 한자가 약 20,000자쯤 되니까 그들은 반백 년 동안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축적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들은 글을 지을 때 전통적인 시구나 문장의 작법 이외에는 절대 시도하지 않았는데, 전통적인 한문 작법을 벗어난다는 것은 마치 호메로스의 그리스어 원전을 개선하겠다고 시도하는 행위와 같은, 듣도 보도 못한 뻔뻔한 짓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선비는 일생을 끝이 없는 한자 꿰어 맞추기를 하며 보냈는데, 이것은 그의 목뿐 아니라 그의 정신, 마음, 영혼까지도 배배 꼬아버리고 말았다.


반면 그을 배우지 못한 양반들에게 한자는 전혀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궁지에 몰렸을 때 방어용으로 사용할 몇 가지 표현을 외우고 있긴 했지만 가능한 한 이런 주제는 피하고자 했다. 이들은 앎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기에 옷이나 유흥 같은 물질적 즐거움을 추구했는데, 조선에는 이러한 종류의 양반들이 엄청나게 흔했다. p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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