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닙니다. 저자가 밝힌 대로 조선에 대한 한 지리학자의 '연구서'예요. 영국 태생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그녀는 1894년 조선에 첫발을 내딛은 이래 4년간 조선을 네 차례 방문하고 조선 각지의 문물, 역사, 풍습, 정치, 지리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책장을 넘기며 곳곳에서 감탄했어요. 저자의 놀라운 관찰력과 묘사의 치밀함 때문이었죠. 한 사회를 겉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회를 작동하고 있는 정치, 사회적 구조까지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저자의 여행기를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구한말 조선의 풍경 속에 풍덩 빠져들게 됩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묘사를 보노라면 당시 조선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이었나 절감하게 되고, 국권을 잃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길이었는가를 또렷이 인식하게 돼요. 저자는 양반 계급에 대하여 여러 장에 걸쳐 반복해서 기생충, 흡혈귀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가합니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관료주의, 매관매직, 부정부패야말로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질병임을 저자는 분명히 짚고 있어요(D는 인도에 빨대 꽂은 영국에 비하면 조선의 양반은 귀여운 수준이라 말하지만). 그리고 미래 조선 사회의 희망을 가장 가난한 농부들, 그들의 애국심과 노동으로부터 발견해냅니다. 그들이야말로 국가를 지탱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렇게 500페이지가 넘는 이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게 되면 알게 됩니다. 타국에 대한 이렇게 풍부하고 상세한 묘사가 지리학자로서의 저자의 열정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한 애정에서 기인한다는 것을요. 그것이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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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서울은 곧 한국이다. 진흙벽의 토막이 늘어선 누추한 골목길, 두껍게 얹힌 갈색 지붕, 오물과 녹색 때가 낀 냄새 나는 도랑 등의 예만 들어보더라도 서울은 여러 다른 지방 도시와 다를 것이 없다. 시골 지역에서 특별한 상품이 있는 곳은 많지 않으며, 서울의 잡화상은 모든 시골 마을의 상점을 대표한다. 흰 의복과 갓 쓴 모습은 어디를 가도 서울과 똑같다. 어떠한 국가적 생활도 오직 이 수도에만 존재한다. 우리들 나라에서도 농업 지역에서 런던으로 가까이 갈수록 이런저런 정치적 동향에 민감한 것처럼, 한국에서는 서울로 가까이 갈수록 같은 모습을 보인다.
서울은 정부가 위치한 곳일 뿐만 아니라 공적 생활의 중심이며 관리로 등용되는 유일한 길인 문학 시험이 치러지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무언가 '한 껀 건지기'를 늘 바라고 있다. 따라서 서울로 향하는 영속적이고 잠재적인 인력이 항상 일정하게 존재한다. 맑은 오후에 양반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팔을 흔들고 어슬렁거리며 넓은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관직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여론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 여론으로 대중적인 감정의 폭발은 오직 서울에서만 존재한다. 한국인들이 서양문명과의 전혀 원치 않았던 접촉 때문에 최초로 압박감을 느끼는 곳도 서울이다. 오직 서울에서만 깊은 잠에서 깨어나 반쯤 조는 두 눈을 문지르며 몽롱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어리둥절해 하는 한국의 현재가 드러난다.
서울은 또한 상업의 개념이 오로지 행상으로만 제한되어 있는 나라의 상업적 중심이다. 모든 비즈니스가 서울에서 행해진다. 전국의 상점들은 서울로부터 물품들을 공급받고 있다. 조약항으로 갔다가 배에 실리지 않는 모든 생산물은 서울로 집중된다. 그 곳은 또한 나라의 운수업을 행하는 짐꾼들의 상단과 몇몇 품목에서는 실제적으로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큰 상인 조합의 중심이기도 하다.
모든 한국인들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지방 관리들은 수도에 따로이 저택을 갖고 있으며, 연중 많은 기간 부임지의 직무를 경시해도 된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토지 소유자들은 수도에 살고 있는 부재 지주들이며, 그들은 지대를 받기 위해 지방으로부터 민중들을 '쥐어짠다.' 여행 중의 음식값과 숙박료를 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 년 중에 한 번이나 두 번 서울로 걸어 오며, 어느 계급일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서울은 오직 그 속에서만 살아갈 만한 삶의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울에는 어떠한 예술 작품도 없으며, 고대 유물도 거의 없다. 공중의 광장도, 아주 드물게 벌어지는 '거둥'을 제외하면 어떠한 행사도, 극장도 없다. 서울에는 다른 도시들이 소유하고 있는 문화적 매력이 결핍되어 있다. 오래된 도시이지만, 서울엔 어떠한 유적도, 도서관도, 문단도 없다. 최근까지 다른 대체물 없이 계속된 종교에 대한 무관심은 사원들을 전혀 남겨 놓지 않았고,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신들로 인해 시내엔 단 하나의 묘지도 없다. pp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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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안에는 한국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 거기엔 티롤 모자를 쓰고 푸른색이 주색인 조잡한 면직 제복을 입은 군인들과 포졸들, 문필가들, 부정한 관리들, 늘 일이 손에 달린 척 가장하는 전령들이 있었고, 많은 작은 방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마루에 모여 앉아, 서예 도구를 옆에 놓고 긴 장죽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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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악담 중에는 기득권 계급인 양반이나 귀족들에 대한 것이 아주 많다. 그들은 생업을 위해서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친척들에 의해 부양받는 것도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되지 않으며, 일부는 아내가 바느질과 빨래로 남몰래 일하여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양반은 담뱃대조차 자기가 가져오지 않는다. 양반의 자제는 그들의 공부방에서 서당까지 그들의 책을 직접 들고 가지 않는다. 이 기생충이나 다를 바 없는 계급은 여행할 때 그가 소집할 수 있는 만큼의 많은 하인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관습적으로 요구된다. 그는 하인이 인도하는 말을 타며, 절대로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이다. 그의 하인은 백성들을 윽박지르고 위협하여 닭과 달걀을 돈도 주지 않고 빼앗아 온다. 이것이 백기미 마을의 팻말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백성들, 즉 권리가 없는 대중은 세금을 어깨에 짊어져야 하고, 양반에 의해 핍박받고 급료 없이 노동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채로 인해 혹독한 부역을 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인이나 농민이 어느 정도의 현금을 저축했다는 소문이 나거나 알려지면 양반이나 관료는 빌려준 돈을 찾는다. 실제로 그것은 과세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탈세 혐의로 감옥에 갇혀서 그 자신이나 자신의 친척이 요구하는 돈을 지불할 때까지 매일 아침 매질을 당한다. 혹은 사실상 석방이 된 후 돈이 준비될 때까지 조금씩 먹으며 양반의 집에 붙잡혀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부채의 명분으로 부역을 시키는 사람은 최고의 귀족이다. 그러나 빌려준 사람은 원금과 이자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귀족은 집이나 땅을 살 때 돈을 주지 않고, 관리들도 그 지불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이다.
내가 나의 사공에게 급료를 지불했던 뱃기미에서는 어떤 양반의 하인이 급료 없이 서울까지 기와를 가져 가려고 모든 배에 압력을 넣고 있었다. 김씨는 현금으로 급료를 받은 후, 강 아래로 몇 개의 대단찮은 것을 가지고 가는 것에 대해 내게 양해를 구했다. 일행이 말하기를 외국인을 태우고 있는 내 배는 부역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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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매파가 기초적인 혼담을 위해 고용된다. 그러나 우리 영국에 비해 한국의 결혼은 지극히 건전하고 도덕적인 성격을 갖는다.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부도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받지 않는다. 신부는 보통 놋쇠 크램프와 장식이 달린 멋진 혼수 상자 안에 혼수를 준비할 뿐이다. 약혼식은 없으며 혼약이 이루어진 뒤에도 결혼식은 몇 주 혹은 몇 달씩 지체된다. 거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택일된 날 저녁에 신랑의 아버지는 시눕의 아버지에게 결혼 서약서를 보내는 데(납폐) 신부의 아버지가 여기에 대해 답장할 필요는 없다. 이 때 비단 두필 가량이 신부에게 보내지는데 그 비단에서 결혼식 날 입을 신부의 겉옷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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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강하게 의식하는 반면 남편은 거의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외형적인 존중의 표시를 하는 것은 온당하지만 아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든지 그녀를 동등한 반려자로 대우한다든지 한다면 그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상류층에서는 신랑이 신부와 3~4일간 동침한 뒤 상당한 기간 동안 그녀를 떠나있게 해 신부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표시하는 예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양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의 인상에는 상업적인 이해 집단이나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다른 계급과의 유대 관계가 금지된 사람들이, 말하자면 상류 계급의 사람들보다 하류 계급의 사람들이 훨씬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는 것 같았다.
한국의 여성들은 항상 멍에를 짊어지고 산다. 그들은 남자와의 차별을 자신의 자연적인 몫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결혼에서 애정을 기대하지 않으며 구습을 타파하겠다는 생각은 결코 할 수가 없다. 대개 그들은 시어머니의 지배에 순종하며, 시어머니의 뜻을 거스른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며느리들은 그들이 아내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한, 심한 매질로 교정되게 된다. 그러나 상류 관료계층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들 남편의 경우 유일한 대응책이 이혼이며 재혼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대개 아내의 성깔 사나움을 자신의 팔자 소관으로 돌리고 그저 참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괴롭히고 가정의 평화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조까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라면 그는 아내를 관청(예조)에 넘길 수 있다. 관청까지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그 여자는 관리로부터 심한 매질을 당하고 신분적 지위가 박탈되며 하인배에게 시집보내어진다. (...)
한국의 아내들은 어머니가 되는 순간 갑자기 지위가 격상된다. 물론 계집아이는 그 탄생이 다른 동양권의 나라들처럼 쓸데없이 여겨지거나 천대받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노후에 부모를 봉양할 수 없고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없기에 사내아이만큼 환영받지 못한다. 계집아이의 탄생이 심상한 데 비해 첫 아들의 탄생은 엄청난 경축의 기회를 제공한다. 첫 아들에게 이름이 지어진 뒤 그 어머니는 '누구 누구의 모친'이라는 경칭을 얻으며 시댁에서의 발언권이 확실해진다. 첫아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는 온 집안에 환호가 울리는 순간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아이들은 요람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품에서 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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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떠나기 바로 전에 늙은 주지가 우리를 퍽 깔끔한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서 몸소 정중한 식사 대접을 해주었다. 기름기 많은 잣과 꿀을 듬뿍 넣어 만든 떡과 쌀을 튀겨 꿀을 바른 유과, 달콤한 떡, 중국식 사탕과자, 꿀 그리고 꿀차에 잣을 띄워서 내놓았따. 이 견과류의 기름은, 강요된 채식생활을 하는 동안 결핍된 동물성 지방을 보충해 주었따. 그러나 풍부한 식물성 지방과 꿀은 곧 물리게 했다. 그래서 주지는 우리를 대접하는 데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이 산사에서의 일반적인 문화란 불교에 원천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 자상한 접대나 배려, 행동거지의 온후함은 한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 꼴꼴난 공자의 후예들이 가진 교만함과 거만함, 오만방자함이나 자만심과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모든 승려들과 헤어지고 짐꾼들이 정중한 작별인사를 해왔을 때 어떤 노승은 얼마간의 거리까지 우리를 따라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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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의 오지들을 오래 여행하는 동안 나는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반란을 일으킨 동학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에 대해 약간의 소문들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원산에서 들은 소문은 다분히 자극적이었다. 비록 내가 허풍 짙은 이야기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할 만큼 오랫동안 한국에 있어왔지만 말이다. 어느 날은 동학군이 거대한 승리를 쟁취했고 정부군으로부터 개틀링 기관총을 탈취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또 어느 날은 그들이 산산히 흩어졌고 그들의 신비스럽고 신출귀몰하는 지도자의 목이 베어졌다고도 했다. 그러나 내가 출발하기 전 가장 최근의 소식은 그들이 부산에서 엄청난 세력으로 행진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동학군이 부패한 관료들과 배반한 밀고자에 대항해 우발적으로 봉기한 농민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권에의 확고한 충성을 고백하는 그들의 선언으로 판단해 볼 때, 한국 어딘가에 애국심의 맥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농민들 가슴속 뿐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따. 동학군의 봉기는 과격한 충돌이나 쓸데없는 피흘림은 없는 것처럼 보였고, 자신들의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시도에 자신들을 한정시키고 있었다. 정부의 실정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고, 부패한 관리들의 참기 어려운 강탈에 대항한, 평범한 농민 봉기보다는 훨씬 큰 규모의 무장항쟁을 벌일 시기가 무르익었따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몇몇 외국의 동정은 동학군에게 쏠렸다.
그러나 단지 게으른 관심만으로 원산에서 이 문제들이 토론되고 있던 그 때, 기성의 질서에 대한 무시무시한 협박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동학도들은 탄압의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것이고 세계의 관심이 이 작은 반도에 집중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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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쪽에서의 반란은 수도 서울이 격동할 만한, 심각한 경악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은 한반도에서는 비록 보다 적은 규모이긴 하지만 검의 매년 일어났다.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지방에서 관리들의 약탈에 의해 격앙된 소작농들이 들고 일어나 약간의 물리력으로(종종 사람을 죽이고) 저항하는 관리를 몰아낸다. 그리고 그 또한 견딜 만한, 적당한 정부의 탄압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관리는 쫒겨나고 만사가 다시 한번 해결되는 것이다. 이 동양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봉기들은 좀 더 중요한 문제들 앞에서 간과되었지만 이제는 매우 중요해졌다. 그것이 종교라는 보다 큰 토대 위에서 조직되었고 많은 수의 신자들을 서울과 그 밖의 도시들에서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 부르고 싶다.
동학의 선언문은 왕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존경하는 언어로 알리면서 시작했고, 매우 온순한 용어들로 불만을 이야기하면서 계속되었다. 동학교도들은, 한국의 관료들이 자기 자신만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그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잘못에 대한 모든 정보와 소식에 관해 왕의 두 눈과 두 귀를 막아왔다고, 외국인인 내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주장했다. 그들은 국가의 장관들, 통치계급들, 그리고 지방관료들이 모두 국민들이 복지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스스로의 배를 불리는 일에만 열중했고 강탈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말했따. 또 관료 생활을 향한 유일한 통로인 과거제도는 뇌물과 물물교환, 관직 매매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며 더 이상 공무원 임명을 위한 인격과 능력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관리들은 나라를 거의 말아먹을 판인 엄청난 외채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난 체하고, 허영심이 강하고, 불륜을 행하고, 탐욕스럽다'고 말했다. 또 국가에서 임명 받은 많은 지방관리들이 자신의 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른 채 그냥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평화시에는 아첨하고 아양을 떨지만 고통의 시기에는 전하를 배반하고 떠날 것'이라고 말했따. 내가 보기에 그 모든 것이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었다.
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강력히 주장되었다. 거기에는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의 표현은 없었고, 그 선언은 외국인들을 하등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따. 동학의 지도자는 그의 개성이 결코 분명히 얘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에 의해 일본어와 중국어 둘 다 이야기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신출귀몰과 초자연적 힘을 가졌따고 믿어졌다. 그리고 그의 수단과 통찰력, 군대의 조직, 몇몇 서구적 군사 전략 등을 볼 때 그가 근대적 전쟁기술을 약간이나마 알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다.
처음에는 오직 낡은 칼과 도끼, 죽창으로 무장했던 그의 추종자들은 관청의 병기고와 패배한 중앙군대로부터 뺏어낸 총을 소유하게 되었따. 떠다니는 수천의 거친 소문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은 확실하게 보였다. 즉 한국 국왕이 동학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몇백의 군사들을 한 장교 아래에 보냈는데, 그 장교는 3백명의 병사로 동학군 진영을 공격, 교전하던 중에 별안간 '반란군'에게 투항하여 국와으이 군대를 향해 맞섰다는 것이다. 그 후 그 군대의 3백명 병사들은 모두 전투 중에 죽었고, 그 장교는 행방불명이라는 것이다. 다른 승전보가 잇따르면서, 이런 몇몇 중요한 관리들의 이탈과 동학군의 서울을 향한 행진은 거대한 놀라움을 빚어내었다. 모두들 국왕이 도망갈 준비를 한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제물포에 상륙하기 전에 발생한 2~3일 사이의 사건들은 이 모든 지역적 동요를 덮어버렸다. 내가 지금은 과거가 되어버린 이 기간에 대해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다 회상하는 것은, 동학군이 한반도 군사개입의 빌미를 제공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여주었던 일본의 야심 때문이다. pp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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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성 참모본부는 정확한 한국 지도를 그려 왔고, 미초와 양식에 대한 보고서와 강의 폭과 깊이에 대한 측량을 확보했고, 사전에 석 달 동안 한국의 쌀을 매점해 오고 있었다. 한편으론 변장한 일본군 정보요원들이 중국 본토는 물론 티벳 국경에까지 침투하여 중국의 강약을 가늠해왔다. 그들의 보고서는 문서상의 중국 군대와 실제 중국 군대를 비교, 무기 현황, 구시대의 구멍숭숭난 함포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따. 또 그들은 각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나갈 수 있는지, 중국 사병들이 얼마나 훈련을 받았고 어느 정도 무장을 했는지를 중국인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군 병참 설비의 곳곳이 그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중국군 내부의 비효율적인 명령체계가 전쟁터에서 기동성 있는 임무 수행을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며, 군 고위층의 무한한 퇴폐와 부정이 야전기간 동안 거의 매번 입증되다시피 한 애국심의 완전한 결여를 초래하고 있음을 꿰뚫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일본은 한국에서 중국에 대해 완전히 선수를 치고 있었다. 돌연한 공포가 중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중국의 총리교섭사의와 외교관들이 거느린 30여 명의 가족들은 일본인이 서울에 나타나자 중국을 향해 배를 탔고, 800명의 중국인들은 내가 도착한 날 제물포를 떠났다. 중국조계 내에서의 당황은 아주 심대해서 심지어 가장 번영하는 장사를 독점하고 있던 과수원 경영인조차도 모든 것을 버리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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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곳에서 남쪽으로의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며 3일 동안 체류했다. 그 시간 동안 프랑스어를 하는 경찰서장이 나를 몇몇 한국인의 마을로 데려다 주었다. 그 마을의 모든 농업 인구는 한국인이며 이들은 매우 번영하고 있따. 거기서 한국의 국경 쪽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대다수의 한국인 개척자가 일을 잘하고 있으며 그들 중의 몇몇은 러시아 군대에 육류를 계약판매함으로서 부를 키워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인은 중국인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능동적으로 중국령 만주로 가서 여읜 동물들을 싼 값에 매입해서 살이 찌도록 키워 비싼 값에 되판다.
한국에서 한국인들만을 보아온 사람들에게 그러한 주장은 거의 믿을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위의 사실에 대한 근거로서 들 수 있는 예가 또 있다.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농산물 유통업에서 중국인들과 경쟁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현재 하바로스크스의 야채 공급은 거의 한국인들의 손에 있다. pp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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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자들이 내가 이곳의 한국 가정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온화한 친절과 더 깨끗하고 더 안락한 편의시설을 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한국 남자들의 기풍이 미묘하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곳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 안락과 어떤 형태의 부도 더 이상 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불안함의 원천인 부보다는 명예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평온할 수 있었다. 농부들 대다수는 부자였고 무역에 종사하며 광대한 계약을 만들어가고 있었따. 중국 국경지역에 있는 땅에 정착하지 못한 한국인들과 그곳에서 나무를 자르고 목재를 운반하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유하지 못했고 그들의 움막도 더러웠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했다. 이들은 대부분 기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 pp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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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왕이 선의에서 외국의 관리들을 초대하면 그들은 종종 돌아와서 알현도, 경관도, 궁궐도 조롱하곤 했다. 나는 한국 민족의 전통과 예법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빼고는 조롱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거기에는 단조로움과 점잖음, 상냥함과 정중함, 내게는 무척이나 호감이 가던 예법이 있었다. 궁궐에서 가졌던 이 네 번의 알현은 두번째 한국 방문의 대단한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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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철저한 주의로도 왕과 왕비가 바라는 만큼 완전히 사적인 비밀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다는 알현실에 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문틈으로 확실히 보았다. 뒤이어 통역관이 "오늘은 전하의 말씀을 통역해 내기가 퍽 어렵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재치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그림자'가 바로 왕이 특별히 불신하는 6부 대신 중 한 사람의 측근이라고 들었다. 이 사람은 왕과 왕비가 외국인 공사에게 뭐라고 했는가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들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왕이 어떤 문제에 대해 말했는지는 언급할 수 없지만 한 시간 정도 지속된 알현이 상당히 흥미로왔다는 점을 밝혀둔다. 어떤 면에서 왕은 그 언제보다도 자신을 강하게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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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교에서는 나라가 국민이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며 생명조차도 국가의 제단에 바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러한 교육의 결과는 틀림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오사카로 가기 며칠 전에 나는 군대를 위해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보내온 의연품들이 부두에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제국의 군대는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의 광적인 환송을 받으면서 그 도시를 떠났다. 대부분의 수송 인부들은 새 옷을 지급받으면 더욱 더 충성할 것을 자칭하여 맹세한다고 하며, 전장이나 병원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조차 '다이 닛뽄 반자이(대일본 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고 한다.
내가 한국을 떠날 즈음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을 통한 한국 정부의 개혁에 관한 한 철저할 정도로 성실하엿으며, 수많은 개혁 조처가 포고되거나 계획 중에 있는 동안 몇몇 악슴과 폐해가 일소되기도 하였다. 절대 군주권을 박탈당한 임금은 사실상 봉급을 받아가며 포고문에 서명을 해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노우에 백작은 계속 상주대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정부는 임금의 이름만 내걸어 놓고 실제로는 얼마간은 상주대표가 지명한 10개 부서(아문)의 대신들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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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인 고무라씨가 부임하고, 조금 후에 일본 천황의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이노우에 백작이 내한하였다. 동아시아의 지도격으로서의 지위와 위신에 중대한 타격을 입은 일본은,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동정(공감, 찬성)을 사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따.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범행 사실을 부인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이 잊혀질 만하면 곧, 그 살해 계획은 일본 공사관에서 꾸며진 것이고, 궁중에서 살인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민간 복장을 한 일본인과 무장한 일본인들은 모두 합해 60명이었고, 여기에는 '쏘시'라는 사람들은 포함되지만 일본 군대는 포함되지 않았고, 또 누구는 한국 정부의 고문관이었고 또 누구는 일본 공사관 측의 경찰관이었고 하는 말들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일본을 제외한 외국 대사들은 한국 정부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 "자객들을 재판에 회부할 조치가 내려지고, 훈련대가 왕궁에서 물러나며, 최근에 임명된 정부요인 중에서 그 음모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심리하거나 최소한 공직에서 물러나게 할 때까지, 우리는 정부가 취하는 어떤 사항에도 승인하기를 거부할 것이며 국왕의 명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의 빈틈없는 신중함은 나중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0월 15일 관보의 호외에서, 왕비의 자리는 하루라도 비워 두어서는 안 되므로 왕비 간택의 절차를 곧 진행시킬 것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것도 이 국가의 군주인 임금에게 가해진 많은 모욕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10월과 11월의 남은 날 동안에도 사태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왕의 슬픔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왕가의 행사나 주연은 할 생각도 못한 채,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독약과 암살에의 공포감으로 심하게 동요된 임금은 그 자신의 빈약한 공간만을 지키고 있는 한갖 수인 신세가 되어버렸다. 자기를 감시하는 간수들인 내각 요인들은 실제로는 그때의 폭도, 군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는 것이 진저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 당시의 한국 국왕과 왕세자의 신세보다 더 처량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궁중에서 요리된 음식이라면 먹을 엄두조차 내지도 못했으며, 한시라도 서로에게서 떨어지면 어쩌나 근심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믿을 만한 지지자 하나 없이 그들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의 후유증과 독극물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인 군사 고문관인 다이 장군은 늙고 허약했던 인물로, 궁중 도서관 가까이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미국인 선교사들이 2교대로 번갈아가며 그를 간호하였다. 이 노인이 이 불운한 왕조의 임금이 가졌던 유일한 호위병이었다. 외국 대사들은 임금이 아직 살아 있는지를 알아 보고 또한 그에게 공감과 관심을 표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국왕을 거의 매일 방문하였따. 음식은 러시아나 미국 공사관에서 준비한 것을 자물쇠로 잠근 상자에 넣어서 공급이 되었으나 어찌나 감시가 엄중했던지 임금 손에까지 열쇠가 도달되기조차 어려웠다. 매우 다급하고 아주 가끔씩 들려오는 소문만이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이들 외국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화의 전부였다. 분명히 그는 처음부터 영국이나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기를 희망하였다. 때때로 그는 외국인들의 손을 잡고 측은하게 흐느꼈고, 대사들 또한 언제나 점잖고 친절한 국왕에 대하여 느끼는 동정심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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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시해 이후 근 한 달이 지나서야 그녀가 피신했을 것이라는 믿음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사태는 새 내각의 법률 아래 엄중해졌다. 각국의 대사들은 이노우에 백작에게 압력을 넣어, 훈련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임금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믿을 만하게 훈련된 충직한 병사들로 채워질 때까지는 일본 군대로 하여금 왕궁에 주둔시키게 함으로써, 이 엄중한 사태를 타개해 보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일본 정부가 얼마나 완벽하게 다른 열강의 외교관들로부터 그들의 책임을 면제 받았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노우에 백작은 충심으로부터 우러나온 민첩성을 가지고 이와 같은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일본에 의한 왕궁의 군사적 재점령을 허용하는 그러한 조치는 그것이 아무리 임금의 안위를 보장할 목적을 지난다고 할지라도, 중대한 곡해의 여지가 있으며 크나큰 혼란을 야기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단지 열강으로부터 일본이 명백한 위임권을 받을 경우에라야만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었다. pp32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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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한 달 동안 그 조치에 대해 한국 전역에서 불만의 소리가 드높아졌다. 10월 8일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왕비의 생사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백성들의 요구 때문에, 내각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1월 26일, 각국 대사들이 왕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 당도하니, 총리 대신이 잔뜩 흥분한 임금의 면전에서 왕의 서명이 날조된 포고문 하나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폭도 중에서 특별히 군부 대신과 경무청 경찰사를 지목하여 면직시키고, 왕비를 강등시켰던 칙령을 철회하여 처음부터 무효로 취급하며, 그녀를 원래 위치로 복권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 사건을 법부 아문에서 조사할 것이며 죄인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할 것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는 포고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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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례 예법은 어떠한 성직자도 죽음과 장례에 관련된 식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죽은 이후의 생이 염라대왕의 심판과 산신령의 보살핌, 이 두 가지 세계에 배분되어 있다는 관념 등 매우 독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고인의 위패가 모셔진 의자가 밙드시 장ㅎ례 행렬에 운반되는데 이 위패는 흰 나무조각으로, 성이 쓰여져 있다. 이 위패의 비문의 일부는 집에서 쓰여지고 무덤에서 완전히 채워진다. 그것은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운반되어 돌아오는데[반곡] 세 번째 영혼이 조문객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위패에 주소를 적어넣고 그것을 빈 방에 안치시킨다[합문과 계문]. 방에는 그것을 올려 놓는 검은 옻칠을 한 의자가 있고 그 앞에 검은 옻칠을 한 상이 있다. 그 상 위에는 다시 떡, 술, 구운 고기, 국수 같은 제물이 다시 차려진다. 조문객들은 다시 다섯 번 절한 후 차려진 음식을 먹는다. p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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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우리는 경기 지방과 황해도 지방의 경계인 예성강 줄기를 거슬러서 황해도로 왔다. 임지에 관계없이 이 지역의 대부분 관리들은 안락과 사교를 위해서 서울에 살았고 거기에는 하급관리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재직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그들은 관할 지역의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갈취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쓰러지기 직전의 관청 건물내에서 마흔 명의 일본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특파부대의 방공호를 발견했다. 내가 거리를 걸어내려갈 때 그 군인들 중 하나가 내 어깨를 치면서 국적과 행선지를 물었다. 나는 그들이 불손하다고 생각했따. 숙소에 도착했을 때 열두 명의 군인이 와서 슬그머니 문으 을 둘러쌌고 나는 문을 닫지 못한 채로 서성대고 있었따. 깔끔한 상사 한 명이 내게 인사를 하더니 나를 지나쳐 이씨의 방으로 가서 그에게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대답을 들은 후 철수했다. 이것은 몇 번 있었떤 가택 수색 중 하나에 불과했고 그들은 대체로 공손했지만, 나로 하여금 대체 그들이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는지, 그리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하는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pp349-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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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산품 중 최고인 종이는 전라도에서 최상의 제품이 생산되었고 노점 진열대에서 인기가 좋았다. 모든 종류의 종이를 시장에서 살 수 있는데 모두가 최상의 품짉을 자랑하고 있다. 그 모양과 질긴 면에서 소가죽과 거의 빗긋하여 중상류계층의 집안에서 장판으로 사용되는 아름답고 반투명하며 담황색인 기름종이와 벽지로 쓰이는 단단한 종이에서부터 글씨를 쓰는 데 사용되는 얇고 강한 종이와 무거운 짐을 싸는 데 사용되느 조잡한 섬유질 종이, 섬세한 천을 싸기 위한 짜임새가 화려하고 천박해 보이는 종이, 그리고 뽕나무로 만들어지는, 끈처럼 여러가지 용도에 사용되는 중간 등급의 종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pp35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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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오후의 여행은 아주 매혹적인 시골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계곡 인근의 자갈이 없는 비옥한 농토, 조용히 그것을 둘러싼 초가지붕, 언덕의 아름드리 소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저무는 태양의 진홍빛 햇살을 받아 신비스런 영기를 발산하고 있었따. 계곡이 끝나는 곳에 대동상이 마치 호수처럼 넓게 퍼져 흐르는 무진대라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이 조용한 강변에서 바라본 대동강은 달빛을 받아 온통 금빛에 물든 밤물결이 일렁이는 별천지였다. 천국의 밤이 이런 것이리라.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는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 '협잡'을 업으로 삼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관리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한국의 농부들이 일본 농부처럼 행복하고 근면하지 못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내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생업에서 생기는 이익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나라, 어떤 제도로부터 온 것이든 한국에서 행해지는 모든 개혁은 한국인들의 이 절박하고 자연스러운 갈망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행해진 많은 개혁들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은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개혁을 수행하고 변화를 위한 조화로운 계획으 ㄹ실천하기에는 너무도 경험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 계획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전통과 인습에 의해 타락해 있다. 모든 개혁의 시도들은 너무 조급하게 시작되어 너무 빨리 조각나 버린다. 일본이 지도한 개혁은 국가적인 관례에 끼어들고 작은 문제에 간섭하기를 좋아함으로써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했을 뿐이다. 곳곳에 드러나는 사건들을 보고 내가 판단하건대 일본이 한국의 개혁을 부르짖는 목적은 한국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여행자들은 한국인의 게으름에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러나 러시아령 만주에서의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근면함, 그리고 그들의 검소하고 유족하고 안락한 집의 가구들을 보고 난 후에 나는 그것이 기질의 문제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한국 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주는 것 이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관리들의 수탈이 아주 견딜 수 없게 되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마저도 빼앗겼을 때에만 한국의 농민들은 폭력을 통한 절망적인 방법에 의지하게 된다. 그것은 역겹고 견딜 수 없게 하는 지방 수령을 축출하고 때로는 죽이는 것, 또는 수령이 제일 좋아하는 심복을 장작더미 위에서 태우는 것이었다. 그 대중적인 격발은, 비록 정상적인 자극에 의해 유감스런 폭력의 행위로 끝나지만 때때로 효과있는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억압의 유형은 합법적 세금의 두세 배인 부역, 소송의 경우에 강요되는 뇌물, 강제되는 대부 등이다. 만일 한 사람이 얼마의 돈을 모은 것으로 열려지만 관리는 그것을 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것을 들어주면 빌려준 사람은 원금 또는 이자를 결코 받지 못한다. 만일 상환을 요구하면 그는 체포되어 조작된 죄목에 의해 부과된 벌금 때문에 투옥되고 자신이나 친척이 관리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낼 때까지 매를 맞는다. 그런 정도로 요구가 이루어지므로 겨울이 아주 추운 한국의 북부에서 농부들은 수확으로 얼마간의 현금으 ㄹ가지게 될 때, 그것을 땅 속의 구멍에다 넣고 거기에다 물을 뿌리는데, 관리와 도적들로부터 안전해질 때까지 돈꾸러미는 그렇게 얼려진 땅 속에 묻힌다. pp38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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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냇가에는 평평한 돌에 웅크리고 앉아서 더러운 옷을 물속에 담그고 꽉 비틀어짜서 돌판에다 올려놓고 반반한 방망이로 두드리며 빨래하는 여자들이 가득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빨래 방법은 극히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식 빨래의 첫 공정은 나무나 짚을 태운 재를 물에 풀어 빨래감을 적시는 것이다. 그렇게 잿물에 담가둔 빨랫감을 두드려 빤 다음, 다시 잿물에 넣고 삶는다. 펄펄 끓는 물에 푹 삶은 빨래를 다시 두드려 빤 다음 맑은 물에 헹구고 짜서 빨랫줄에 넌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하얗게 마른 후 밥풀로 아주 엷게 풀 먹여지고, 곤봉처럼 생긴 '다듬이 방망이'로 나무 롤러 위에서 짧고 빠르게 얼마동안 두드려진 흰 무명은 그 깨끗함이 막 뽑아낸 흰 새턴과 같다. pp392-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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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여성에겐 기쁨이 없다고 말해도 될지 모른다. 그녀들은 자신의 며느리에게 고된 일의 일부를 물려줄 때까지 단지 막일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고된 노동 때문에 한국의 농촌 여성들은 삼십대에 이미 오십대로 보이고, 사십이면 종종 이가 없어진다. 개인적인 몸치장조차도 인생의 아주 이른 시절에 그녀의 삶에서 사라진다.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삶 이외에 그녀의 생각은 땅과 공기 중에 거주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초자연적인 존재(신령)들을 생각하고 원화소복을 비는 일 외에 다른 곳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p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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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권리는 적고, 그나마의 권리도 법보다는 관습에 의존한다. 지금은 재혼과 16세까지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고, 남편이 같은 집에서 첩과 본처를 함께 살도록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성은 남편과의 이혼에서 무력하며 결혼에서의 상징적인 조각품인 원앙새로 표현되는 부부간의 정절은 절대적으로 여성만의 미덕이 된다. 남편은 아내를 부모와의 불화, 질투, 그리고 잘 싸우는 기질 등 온갖 이유로 쫓아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여자를 버리는 경우가 이혼하는 경우보다 더 잦다고 믿는다. 법보다는 관습에 의해 여자들은 자식들의 통제, 손해에 있어서의 배상 등등에 어떤 공인된 권리를 가진다. 가정의 행복은 아내가 돌보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다. 남편은 대부분 아내와 떨어져 생활한다. 부부 사이의 친밀함을 맺어주는 어떤 공통된 유대나 외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에 있어서의 결혼 관계란 그 주제에 관해 나와 대화한 한 한국 선비의 언급에서 잘 요약된다. "우리는 아내와 결혼하고 첩과 사랑을 나눕니다." pp396-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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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국왕의 통치 기간 중 왕비의 힘있고 야심많은 사촌인 민영환의 통솔하에 모든 실무 권한은 내무부로 집중되었다. 그 동안 왕비와 그녀의 친척들은 전 나라에 걸쳐 요직을 점거하고서 아무런 제재 없이 국민들을 착취하였다.
서울에 위치해 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부서들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모든 공무원의 인사와 시내의 모든 문제를 처결할 권한을 가진 서울 시장(당시 한국 직책으로는 '한성부윤'이라 함)과 제도에 대한 심리 ,재판권을 가지고 있는 서울재판소 재판장이다.
전국은 8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 도는 관찰사라는 행정 지도자의 통치하에 있었고 관찰사 밑에는 민정과 군무 양 보자관이 있었다.
기본세와 토지세가 각각 부과되었으며 지방관청에는 지방세입에 대해 상당한 재량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각 도의 육군과 해군은 엄청난 수의 참모 장교들, 평의회, 사무관들, 그리고 부서가 딸려 있었고, 그 각각은 많은 수의 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상의 설명에서 짐작되듯이 이 나라는 관료주의에 의해 완전히 젓갈 담구어진 형편이었다.
엄청난 권력 남용, 공금 낭비가 성행할 뿐만 아니라 통치체제 자체가 이미 거대한 권력의 남용, 국익의 낭비였다. 현재 한국의 통치 체제는 모든 인생을 근면과 생업으로부터 파산시키고 강탈해가면서 바닥도 끝도 보이지 않는 몰락과 부패, 타락으로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
관직과 재판 판결이 다른 상품과 다름없이 사고 팔렸으며, 정부는 급속히 기을어가고 있었다. 정부의 단 하나 남은 권한은 피지배자들을 먹이로 삼을 수 있는 권리뿐이었다. pp42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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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료들의 구상력과 재치는 주로 공공재정에서 사적인 이익을 빼돌리기 위한 기교와 장치를 고안하는 데 발휘되고 있다. 어떤 한국 관리의 부정직한 수입원이 발견되어 그것을 근절시키고 나면 더 근절시키기 어려운 교묘한 방법이 즉시 고안된다. 부정한 행위를 외국 자문관이 봉쇄하자마자 그 즉시로 새로운 형태의 부정이 나타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무위도식하는 군대의 경우, 현명한 예산 삭감에 의해 그들의 '주어진 관심사'에서 추방되었다. 수천의 부정축재자들은 온갖 천재적인 장치들을 동원하여 재정개혁을 반대했다. pp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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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은 수백 종으로 추정된다. 귀신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도처에 현존함은 곧 신의 동시 현존이 신성하지 않은 희극으로서 각색되었다는 하나의 사실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같은 다신관은 자연의 냉혹함이 비교적 적어 자연에 거리를 두고 대상화하기보다 정서적, 감정적으로 동화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환경의 영향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믿음은 그들을 소심한 불안에서 영구히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 믿음은 그들에게 끝이 없는 공포를 야기시켜서 그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인은 현재의 시간을 항상 공포에 떨면서 보낸다." 한국의 가택 어디에서건간에 귀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귀신은 삶의 모든 면에서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들이 부귀를 유지하기 위해서 귀신을 달래는 행위를 계속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귀신은 그들에 대한 숭배가 소홀할 때는 가차없는 재난으로 보복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결국 평생 동안 귀신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 밑에 있게 될 수밖에 없다. p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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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그들이 불행히지는 것이 악귀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어떤 직무에서 오는 불운, 공직에서의 불신, 질병,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간에 금전을 잃는 따위의 모든 불행이 다 악귀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판수나 무당이 그들의 힘으로써 재앙들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의 근거는 무당은 어떤 막강한 귀신을 지배하고 있어서 그 귀신의 힘을 그가 대신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p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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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환심을 사서 왕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과 부귀에 대한 욕구를 통해 그를 이용할 줄 아는 교활한 이들이나, 그의 도피에 큰 역할을 했던 궁중여인인 박씨와 엄씨, 그리고 왕의 나긋나긋한 성품을 이용해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얻어낸 관직을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주거나 파는 총신들이나 아첨꾼들의 처분에 따라 왕의 의지는 결정되었다. 아무리 국가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절대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많은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왕은 그의 왕국에서 가장 권력이 없었다. 왕은 계속해서 '주십시오'만을 요구하는 측근자와 탐욕스러운 기생충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이성이 상실된 감옥 속으로 던져진 듯한 혼란을 느꼈다. 관료들 중 가장 악명 높은 악당이 총리 대신이 되었으며 김옥균의 암살을 사주한 살인자가 탁지부 대신이 되었고, 뇌물 수수로 고발된 바 있는, 오직으로 악명 높은 전과자가 법부 대신이 되었다. 관직의 공공연한 매매가 줄을 이었고 국정을 악용하여 이권을 거머쥐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단 며칠 동안이라도 고위 공직에 임명된다는 것은 그에게 평생을 두고 우려먹을 지위를 주는 것이며, 유력한 친구들과 끈끈한 유대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미구에 중요한 이권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었다. p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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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자원은 고갈되지 않은 채로 미개발되어 있다. 성공적인 농업을 위한 능력도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다. 기후는 최상이며, 강우량도 풍부하고, 토질도 생산적이다. 구릉과 계곡에는 철, 구리, 납, 금이 있다. 2천8백킬로미터의 해안선을 따라 있는 어장은 밝혀지지 않은 부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간난에 견딜 줄 아는 강인하고 공손한 민족이 살고 있고, 거지 같은 극빈 계층도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국민의 잠재된 에너지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중산층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 않다. 중산층이 그들의 에너지를 쏟을 숙련된 직업이 없다. 매우 충분한 이유로 인해서 하층 계급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아사를 면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가장 큰 가게조차도 일정한 상점의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한국의 모든 것은 낮고, 가난하고, 천한 수준에 있다.
한국은 특권계급의 착취, 관공서의 가혹한 세금, 총체적인 정의의 부재, 모든 벌이의 불안정, 대부분의 동양 정부가 기반하고 있는 가장 나쁜 전통인 비개혁적인 정책수행, 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의 약탈 행위, 하찮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해진 군주, 가장 타락한 제국 중의 한 국가와의 가까운 동맹, 흥미있는 외국인들의 서로의 질투, 그리고 널리 퍼져 있으며 민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미신, 자원없고 음울한 더러움의 사태에 처해 있다.
그 속에서 나는 한국의 첫인상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한국의 바다에, 땅에, 간난에 견딜 수 있는 국민 속에 있음을 보았다. 한국에서 아주 심각하고 보편적으로 저주스러운 관습은, 수천의 능력있는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부유한 친척 또는 친구들에 매달려 호소하려는 악습이다. 이같은 노골적인 의존에는 치욕도 없고 그것을 비난하려는 여론도 없다. 아무리 작더라도 어떤 수입이 있는 사람은, 많은 그의 자식들, 부인의 친척, 많은 자신의 친구들, 자신의 친척 친구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관청과 관직으로 몰려드는 현상이다.
한 무리의 식객의 부담을 진 사람에게, 하나의 탈출구는 관직 생활이다. 지위가 높든 낮든, 관직 생활은 그로 하여금 국구로 그의 식객들을 부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 사실로부터 계속적인 관직의 창설을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새로운 관직은 한국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친척과 친구들을 부양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것으로부터 한국에서 생기는 작은 혁명과 빈번한 공모를 설명할 수 있다. 원칙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한국의 혁명가는 어떤 신념을 지지해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는다.
강인하고 평균적인 지능을 가진 수백의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모든 것에 빌붙어 살고 있다. 명예로운 독립심을 모르고 있다. 식객이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더 이상 식객 노릇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그들을 위하여 관직이 마련된다. 그러므로 정부 고용은 이 쓰레기 계급을 위한 자선사업과 거의 다름이 없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을 불명예스럽게 했던 것이 바로 이 매관매직이었다. 그와 같은 암투 때문에 고위 관리들은 함께 일하지 못했고, 부분적으로는 왕에게 더 영향력을 얻어 친척과 친구들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욕망으로 뒤덮였다. 한국어 사전을 기획하고 있는 한 연구자는, 한국에서 일이란 단어는 '손해', '악', '불행'의 의미를 지닌다고 진술한다. 나태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곧 상류사회에서의 지위권을 입증하고 있다. 관리가 피보호자를 관청에 내밀면서 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은 그가 생계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관직에 임명받으면, 나라의 월급을 축내고 수뢰를 받는 일 외에는 할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나는 실제로 노동하는 당의 경작자가 이 모든 기생충들의 부양자라는 것을 거의 싫증이 나도록 반복했다. 한국에서 농부들은 가장 열심히 일하는 계급이며, 비록 다소 원시적이지만, 땅과 기후에 잘 적응함으로써 자기 노동의 생산량을 쉽게 배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익이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고 옷을 입힐 정도로만 생산하는 데 만족해하고, 더 좋은 집을 세우거나 품위 있게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수많은 소작농들이 행정장관들의 가혹한 세금과 강제적인 대부금 때문에, 해마다 경작 평수를 계속해서 줄이고 있으며, 하루 세 끼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만 경작한다.
명백한 절망으로 죄어진 계급들이 무관심, 타성, 냉담, 생기없음의 마비상태로 가라앉아 있따는 것은 놀랍지 않다.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도 단지 두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 받은 흡혈귀인 양반 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 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4/5인,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인 평민 계급이 그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런 전망없는 상황 속에서, 교육으로써, 생산계급들을 보호함으로써, 부정직한 관리들을 처벌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관직에 실무적인 테스트를 부과함으로써, 즉 실제로 일한 것에 대해서만 지불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만 한다. pp50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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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섭섭하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들을 사귀어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의 겨울 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다음 날 영국 정부의 작은 기선인 상하이행 헨릭호를 타고 무자비하고 엄혹한 북풍에 실려 제물포를 떠났다. 그리고 헨릭호가 강 위로 천천히 증기를 발산하며 움직일 때, 옛스러워 흥취있는 한국의 국기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회와 의문들을 자아내었다. p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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