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해외여행 기록/동남아시아

뽀삿에서 보낸 일주일 / 캄보디아 봉사 여행

by 릴라~ 2018. 12. 13.

 

 

털털거리는 툭툭을 타고 뽀삿성당을 출발했다. 붉은 흙이 깔린 비포장길을 40여분 달려 도착한 곳은 인근의 작은 시골학교. 육십 여명의 어린이들이 환한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꼬마가 내게 수줍은 태도로 보랏빛 꽃을 내밀었다. 주변에서 막 꺾어온 것 같았다. 잠시 후 또 한 소녀가 꽃을 주었다. 누나 손에 이끌려 온 두세 살 아가도 꽃을 건넸다. 그렇게 다섯 아이로부터 받은 꽃송이들이 내 손 안에 모여 작은 꽃다발이 되었다. 소박하지만 가슴 찡한 환영 인사, 뽀삿 아이들과의 첫만남이었다.

 

이후 뽀삿에서 내가 받은 선물은 꽃다발만이 아니다. 앙코르왓이 있는 씨엠립에서 합승택시로 다섯 시간 이상을 더 가야 하는 뽀삿. 그곳에서 머문 일주일간 나는 다섯 지역의 학교를 방문했다.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도 있었고 한 시간 이상 툭툭으로 고갯길을 올라야 하는 산동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보트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수상마을이었는데, 싱가폴에서 온 봉사팀과 동행했다. 그곳에서 안나센터(그리스도교육수녀회가 운영하는 공부방) 현지직원의 안내에 따라 아이들의 미술놀이 프로그램을 돕거나 학용품과 옷가지를 전달하는 일 등을 했다.

 

뽀삿 아이들은 처음 보는 이방인인 나를 함박미소로 환영했다. 선물을 전할 때면 서너 살 꼬맹이들도 공손히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좀 더 나이를 먹은 녀석들은 우리가 짐 정리하는 것을 기꺼이 도왔다. 다섯 마을에서 내게 쏟아진 미소와 반짝이는 눈망울은 수백 개가 넘을 것이다. 그 미소와 눈빛이 내 마음에 질문으로 남았다. 여기에서 이런 환대를 받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곳 사람들보다 잘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캄보디아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로 봉사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봉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봉사라는 명목으로 그들 삶 안에 한 발짝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을 뿐이다. 그들이 우리의 개입을 거부하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나는 여행자의 시선이 닿기 어려운, 뽀삿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의 자리를 살짝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들 삶에 한 발을 걸쳐 놓은 이 짧은 시간이 나를 치유하는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물론 캄보디아에 오랜 독재에서 비롯된 정치적 부패, 제도적 후진성, 갖가지 비합리성이 상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이 그런 부분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극복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여기 와서 알게 되었다. 우리 또한 완전하지 않으며 우리 사회의 정신적 결핍 또한 적지 않음을. 내가 뼛속까지 한국사회가 주는 물질적 풍요에 물들어 있다는 것도. 뽀삿에서 기껏 며칠을 보냈을 뿐인데, 내 마음의 몇 군데 멍이 스르르 아문 것 같았다. 그게 신기해서 나는 자신에게 그 이유를 거듭 물어보았다. 아직 나는 답을 알지 못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한국에 돌아가서 계속 찾아야 할 것 같다.

 

뽀삿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인 오늘, 뽀삿이 내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은 어쩌면 그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뽀삿 시골학교에서 만난 어린이들, 여기 십 년째 살고 있는 존경하는 친구 프랑수아즈 수녀님과 일흔이 넘은 연세에 타국에서 아이들 공부방(안나센터)을 짓고 계신 김준희 수녀님. 각각 한 달과 일 년을 봉사하러 온 한국의 멋진 젊은이, 크레센시아와 휴고. 현지직원, 다빈, 사라, 티어리, 꼰띠아. 정원사인지 운전수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다정한 두 분 신부님, 배존희 신부님과 조해인 신부님. 이 분들이 뽀삿에서의 질문과 치유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 주셨다. 내 생애 가장 훈훈한(날씨뿐만 아니라 마음도) 대림절이었다

 

 

*2018/12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