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 마음에 고요한 파장을 일으켰던 이야기는 제우스나 헤라, 기타 영웅들이 아니었다. 인류에 불을 가져다주고 고난에 처한 프로메테우스의 용기와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이었다. 이 두 이야기는 삶의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어떤 차원을 살며시 건드려주는 면이 있어 어린이의 마음에 신비로움을 남겼다.
이 책 '아주 사적인 신화 읽기'는 신화 속 다양한 인물들을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을 동원하여 재해석한 책이다. 그래서 일반적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사이의 경쟁과 대립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더 깊고 따스하게 우리 내면의 힘을 이야기하는데 신들을 동원한다. 어릴 때 느꼈던 그 신비로운 느낌을 차근차근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주는 것 같은 책이다. 북유럽 신화와 인도 신화 '바가바드 기타'도 다루고 있는데, '바가바드 기타'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
정신분석학의 주제어는 성숙이다. 성숙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은 완전함, 완벽함이라는 허상을 무너뜨리는 좌절을 경험할 때 우리에게 허락되는 선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완전함을 포기했을 때 인간은 진정으로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완전함이란 비어 있지 않은 상태다. 모든 것에 정답이 있는 상태이며 미래가 정해진 꽉 찬 세상이다. 다시 말해 이 숨막히는 공간에서는 무엇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함이란 바로 그런 저주다.
완전함이 무너진다는 건, 삶의 중심에 구멍이 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미래가 열린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며 새로운 가능성들이 나타난다. 물론 두렵고 무서울 수밖에 없지만, 그건 무수히 많은 것들이 가능해지는 미래가 열렸다는 신호다. 우트나피시팀의 말대로, 완전한 만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인간의 생리를 설명하기 위해 '공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삶의 중심에는 공백이 있으며 그것은 좋은 삶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길가메시는 공백의 자리에 서서 미래를 설계한다.
분석심리학 역시 공백의 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융은 인간의 내면을 명확히 설명하고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학적 분석만을 강조한 프로이트의 접근 방식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신화가 숨쉬고 있다는 말로 공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 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은, 내면의 신화를 가늠하거나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이미 불멸의 존재다. 삶을 불멸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필멸로 축소할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기억이 유전된다는 말이나 원형 개념 역시 인간의 삶이 개인의 삶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요소들이다. 융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들이다. pp32-33
##
우리는 가끔씩 더 강했으면, 더 완벽했으면, 더 완전했으면 하고 바란다. 내가 부족해서 삶의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라고 확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신분석의 조언은 다르다. 프로이트는 완전함에 대한 착각을 '전능감'이라고 불렀다. 자기가 이 세상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인데, 그런 착각을 내려놓게 되는 과정이 바로 '성숙'이다. 이것은 예전에 꿈꾸었던 것을 포기하게 된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예전 상태로는 꿈을 꿀 수도, 이룰 수도 없다.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꿈꿀 수 있으며 꿈을 이루어낼 수 있다 .그게 바로 삶의 신비다. 불완전함이 완전함보다 완전하며, 불완벽함이 완벽함보다 더 완벽한 상태다. pp40
##
에로스가 없는 삶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언제나 불평을 하고 늘 남의 험담을 한다.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이 삶 속에는 만족감도 편안함도 행복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나고 원망스러운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증오와 분노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
삶에는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더 많은 사람의 손을 잡고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는 방향성이 이다면, 사람을 떼어내고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이전에는 가능하던 일이 불가능하게 되는 방향성도 있다. 전자와 후자를 나누는 것은 물론 에로스다. 에로스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리 너머의 존재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에로스는 합하고 연대하고 연결하는 기능을 맡은 에너지다.
신화에서 에로스가 모든 것에 앞서 빈 공간 속에서 처음 태어나는 이유는 그것이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둘의 만남과 하나됨, 그 결합에서 모든 것이 창조된다. 여기에는 소통, 이해, 배려, 그리고 공감도 포함된다. 증오는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소통을 단절시키며 이해와 공감을 차단한다. 그것은 우리를 고립으로 내모는 지름길이다. (...)
에로스가 흘러넘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 마음을 에로스로 가득 채울 수는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은 이 끔찍한 증오와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이와 함께 내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했던 순간을 기억해내야 한다. 에로스는 카오스가 생긴 직후 태어난 태초의 에너지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시작할 때부터 언제나 내면에 존재했던 힘이다. 기억을 더음어 그 힘을 되찾아야만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pp63
##
내 시간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는 무한과도 같이 느껴지는 물리적 시간을 견뎌야 한다. 시간이 어긋난다는 건 지옥 같은 경험이다. 어긋난 장소에서 어긋난 사람을 만나고 이에 따라 모든 일이 다 어긋나버리기 때문이다. 내 시간이 오기 전, 나는 별것 아닌 존재로 판단된다. 그러나 카이로스가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군림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 속에서 내 마음이 기쁜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때 우리는 내 삶의 일부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꾸어갈 만큼 행복해진다. 제우스는 그렇게 우리에게 내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와 내 삶의 시간을 맞이하는 기쁨에 대해 들려준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이해하는 시간'이라는 표현을 쓴다. 정신분석에서 시간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지금까지 도대체 나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이해하는 시간이다. 기분 나쁠 만한 일인데도 그 당시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넘겨버릴 수도 있고, 제삼자가 보면 분명히 내가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도 내가 오히려 남의 눈치를 보며 조심했던 경우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어느 순간 지도가 분명히 그려진다.
라캉은 이해하는 시간을 통해 결정하는 시간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결정은 언제나 이해하는 시간 이후에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아, 이 사람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평생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한다. 결정하는 시간에 이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박함'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 듯 느껴지는 긴박함,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절실함,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중요함이 느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결정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절실함과 긴박함이 없다면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프로이트 역시 같은 이야기를 했다.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정신적 외상도 이해하는 시간을 거치고 난 후 발현된다. 그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이 트라우마로 경험된다. pp74-76
##
정신분석에서는 리비도라는 바다보다 언어라는 대지가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분석 역시 리비도나 감정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러한 에너지가 달라붙어 있는 언어에서 출발한다.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왜 옥수수수염차를 마시며 우울했는지 몰랐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속에 수염이가 있다. 정신분석은 언어를 통해 내 현재의 감정과 상태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프로이트는 언제나 언어를 통해서만 에너지의 크기와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분석심리학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기반이 언어인 반면, 융의 이론에서는 언어가 맡는 역할이 다소 미미하다. 대신 융은 리비도 자체를 강조한다. 그에게 에너지의 바다는 근본적으로 치유적이다. 융의 리비도 개념을 '스타워즈'에 나오는 '포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제다이 기사들이 서로에게 평안을 빌어줄 때 "포스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이라고 말하듯이 포스는 정신의 평안과 고요, 합일과 균형을 뜻하는 인간 내면의 에너지다. 분석심리학의 리비도는 치유 에너지로서 상처가 난 곳을 치유하며 정신을 부유한다. 포스의 힘이 강한 사람은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의 일들을 성취해낼 수 있다. 치유의 바다가 인간이라는 대지를 흐르며 다친 곳을 치료하고 막힌 곳을 뚫어낸다. pp92-93
##
무의식은 자주 어둠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억압된 모든 것들은 다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억압의 마술이 풀리면 그것들은 쉽게 의식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 전까지 억압된 것들은 무의식의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문제는 갇힌 내용들이 결코 온순히 그 공간에 적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덩어리들은 끊임없이 무의식의 공간을 뛰쳐나와 의식으로 침입하고자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억압된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훨씬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연도 많고, 할 말도 많다. 프로이트는 이 덩어리들을 '표상'이라고 불렀다. 쉽게 설명하자면,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기억의 구슬들이 바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내용이 바로 표상이라고 설명한다. 세제가 때의 표면에 들러붙듯이, 표상의 표면에 감정의 에너지가 붙어 있다. 감정은 표상들을 옮겨다닌다. 새로운 해석에 의해 표상의 내용이 바뀌면 감정 에너지의 양도 변화한다. 표상의 결절들은 무의식을 구성하며, 그 표상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무의식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억압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표상이다.
감정이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 들어 있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이 감정들을 가두어두겠는가? 에너지를 어떻게 가두어둔단 말인가? 하데스의 개도 에너지 자체를 감시하지는 못한다. 개가 감시하는 것은 에너지를 실은 표상이다. 무의식이 잡아두고 있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표상이다. 표상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는가에 따라, 즉 그 해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따라 표상의 운명이 결정된다. 과거의 의미를 떨쳐버릴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된 표상은 검열을 통과하여 다시 밝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된다. pp101
##
하데스의 저승은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그린 이미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만약 내 마음이 그린 이미지에 분노와 증오가 가득하다면, 그 표상은 그런 에너지를 정화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이런 표상들이 너무 많이 갇혀 있으면 표상들을 지키는 수고가 늘어나게 되며, 이에 따라 빛의 세계에서 써야 할 에너지들을 검열에 투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승으로 뛰쳐나오는 표상들을 잡으러 다니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에너지가 낭비되는 셈 아닌가. 에너지를 투자하는 더 현명한 방법은 막강한 에너지의 위협이 느껴질 때 그것을 감시하고 억압하기보다 왜 그 표상들이 그곳에 억압되어 있는지 그 사연에 귀기울이며 어떻게 하면 X를 Y로 변화시킬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 끝에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면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구획이 재건되고, 표상들이 정화의 의식을 거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억압되었던 표상을 빛의 세상으로 다시 길어 올릴 수 있게 된다. pp102
##
무의식의 진실이란 존중받았어야 할 이야기들, 삶의 일부가 되었어야 하는 조각들을 의미한다. 그것들을 꺼내 삶으로 품을 때 내가 완성된다. 완성된 인간은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고,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며, 가고 싶은 곳이 보인다. 아이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가 정신적으로 '독립'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너무 참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몸에 해롭다. 지나친 억제는 질병이 생기는 지름길이다. 억압된 모든 것들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한번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문턱을 넘어 빛의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에는 큰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의지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을 찾겠다는 의지와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용기다. 한때 나쁜 것으로 지목되어 묻어둔 이야기들은 몸과 마음의 건강에 꼭 필요한 필수 요소들이었다. 그 요소들이 없었기에 자꾸 아프로 매사가 힘들고 짜증이 났던 것이다.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어 보면, 그 속에 내가 버린 삶의 조각들이 보인다. 먼지를 털어 그 조각들을 길어올려야 한다. 위험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에너지다. 나 자신이 된다는 건 하나의 모험이다. 한때 나쁜 것으로 분류한 것을 다시 찾아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치유라고 부른다. pp134-135
##
존중받는다는 건,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내 개성이 인정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그 말은 어떤 사연들 속에서 떠오른 이야기일 것이다. 그 사연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을 우리는 '친구'라고 부른다. pp136
##
왜 미리 생각했을 때 늘 타인의 고통을 느끼게 되나? 그것이 긍정적인 감정일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자. 삶 속에 들어있는 것들 중 내 기본 성격과 태도를 만든 것들은 무엇인가? 아무리 좋은 부모도 가끔은 싸운다. 그런데 아이가 어리다면, 그 한 판의 싸움이 가진 어두운 색깔이 아이의 작은 마음 가득 칠해진다. 아이를 놀라게 하고 울게 하고 괴롭게 했던 몯느 것들이 합쳐져 아이의 마음에 바탕색이 그려진다. 부모의 문제뿐 아니라 부모의 부모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까지 우리 안에 고통으로 고스란히 자리잡ㅈ고 있다. 우리가 충분히 이겨내지 못한 고통들은 우리 아이에게 전달될 것이다. 물려받은 고통들이 삶 속에서 겪은 고통들과 하나가 되어 우리의 삶 어딘가에 버티고 있다. 우리가 걷다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은, 우리가 그것을 의지와 전략과 용기로 걷어내지 않는 이상 언제나 우리의 삶 어딘가에 포진해 있다. 미리 본다는 건, 바로 그 장애물을 바라봐 준다는 뜻이다. 그건 고통일 수밖에 없다. pp145
##
정신분석학은 고통에 대한 이론이다.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분석하고, 어떻게 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게 정신분석학의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통의 '극복'이란 두 개의 서로 다른 극복 과정을 포함하는 여정이다. 독일어에는 이 두 가지 극복 과정을 잘 나타내는 두 개의 동사가 있다. 우선 'verwinden(극복하다)'은 고통을 대면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다. 철학자 게오르크 가다머가 강조하는 단어로, 과거의 고통을 없애거나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뜻이다. 과거는 바뀌지 않으며, 고통의 강도는 경감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대하는 내 태도와, 고통에 대한 역치는 달라질 수 있다.
또 다른 극복 과정은 니체가 언급한 'uberwinden(극복하다)'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탈바꿈과 같은, 질적 변화를 수반한 변신을 뜻한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나아가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적 치유에는 이 두 과정이 모두 포함된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는 한 과거로 돌아가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옷을 벗어버리듯 과거에서 비롯되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상태라면, 현재는 언제나 과거에 얽매인 채로, 과거의 일부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고통의 연장선상에서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이 정해진다. 이 경우 삶은 끝없는 과거의 반복으로 채워지며 새로운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
물론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내 해석과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지향해야 하는 방향은 명백하다. 우리는 현재를 과거에 파묻고 멈추어진 시간에 정체될 수도 있고, 과거를 들쳐 업고 현재의 시간 속에서 한 걸음씩 전진할 수도 있다. 물론 후자가 긍정적인 방향성이다. pp157-158
##
정신분석은, 한때 나를 해쳤던 것이 그 반대로 나를 보호하는 것으로 변화했을 때 그것이 승화되었다고 말한다. 신화에서는 영웅이 머리를 벴을 때 메두사의 해치던 시선이 보호하는 시선으로 바뀐다. 끊임없이 악순환을 반복하던 증오와 미움의 고리가 끊어지고 분노가 생산적 전략과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뜻이다. 사람을 해치던 충동이 사람을 살리는 에너지로 바뀔 때 우리는 그것을 치유라고 부른다. pp173
##
과거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앞만 보며 걸어가면, 언젠가 현재 속에서 생생한 과거를 만나게 된다. 과거를 잊으라는 말이 아니다. 과거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이다. 오르페우스는 과거를 버리지 않는다. 그는 뒤따라오는 과거를 온몸으로 느끼며 현재로 나아간다. 과거는 그렇게 대면하는 것이다. 현재를 버리고 그때로 되돌아가 과거 속에 산다면, 현재를 잃게 된다. 과거를 끌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과거를 만나게 된다. 과거의 답은 오직 현재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pp188
##
프로이트의 목표는 삶이 비참하다고 느꼈던 환자가 특정 사건이 불운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끔 돕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 환자가 그게 도대체 뭘 바꾸겠냐고 물었다.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답한다. 비참이 불운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가 삶 속에서 고통과의 전투를 재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비참을 불운으로 바꾸는 기법은 해석이다. pp190
##
타인의 목소리 속에서 내 목소리를 잃어도 안 되지만, 내 목소리밖에 남지 않은 세상에 갇혀서도 안 된다. 관계를 위해서는 내 목소리를 내야 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나 자신의 이미지를 잊을 필요가 있다. 관계의 비극은 내 이미지가 중요해졌을 때 또는 나 자신이 사라졌을 때 생긴다. pp196
##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 서설'이라는 논문에서 나르시시즘을 정신병과 관련짓는다. 그는 외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폐허인 정신병의 구조를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하며, 나르시시즘의 특징이 과대망상과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는 이유는, 내 이미지가 유일한 준거 기준이기 때문이다. 남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달랑 혼자 앉아 있으니 그 작은 세상에서는 내가 최고일 수밖에 없다. 내 이미지 속에 갇혀 있으면 당연히 내 작은 세상 밖, 사람들이 사는 진짜 세상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세상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내 이미지가 전부고, 그게 삶이고, 그 속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동시에 끝난다. 프로이트는 바로 이것이 정신병의 구조라고 설명한다. 이런 세상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 바로 망상이다. 남이 존재하지 않기에 모든 등장인물을 내가 지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폐쇄적인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방법이 하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방법이 하나 이다. 만약 내부 에너지의 일부가 외부 대상에 부착된다면 세상과의 관계가 시작되며 나르시시즘적 구조가 깨진다. 그런데 이때도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에너지가 밖으로 나가는 듯 보여도 그 자체가 나르시시즘적 구조인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대상을 내 일부로 간주하는 경우,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부모는 자식을 독립적인 사고 능력이 없는 존재처럼 대한다. 이 경우, 자식은 존중받을 수 있는 타인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부모에게 속한 대상으로 추락한다.
나르시스즘적 세상을 열어젖히는 힘으로 프로이트는 사랑과 승화를 제시한다. 사랑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전제하는 개념으로서 내 눈길이 멈춘 타인을 위해 자연스럽게 내부의 에너지를 외부로 흘려보낸다. 프로이트는 승화를 '비상구'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나밖에 없는 작은 공간에 틈을 만들어 내와 세상 사이에 길을 내는 문이다. 나를 넘어 생각하고, 내 한계를 극복하여 행동할 때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
나르시시즘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속에 갇혀 있을 때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똑같은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승화란 더 높은 상태로 나아가는 현상을 뜻한다. 내면의 에너지를 승화시킬 때 지금의 나보다 내일의 나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매일매일이 늘 똑같은 삶이 바로 지옥 아닐까? 우리가 나르시시즘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 삶의 발전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직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축복이다. pp197-199
##
북유럽 신화는 '악'을 특정 신에게 배당한다. 그 이름이 바로 로키다. (...) 로키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고, 항상 이면에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 안의 콤플렉스가 아닌가? 해결되지 않는 거대한 문제들이 반복되며 몸집을 불려가면 어느새 하나의 단단한 콤플렉스가 만들어진다. 그 속에는 우리 각자가 가진 삶의 화두들이 하나씩 들어 있다. 정신적, 육체적 콤플렉스는 하나같이 개성 강한 마음속 어둠들이다. 어쩌다 한 번씩 건드려지면, 해일이 도시를 덮치듯 내 존재를 위협하며 드러난다. 그건 분노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 왜 나만 힘들어야 하나, 왜 나는 가질 수 없나를 오랜 시간 되뇌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튼튼한 콤플렉스가 만들어진다.
콤플렉스와의 대면이 즐거울 수는 없다. 이 만남은 언제나 폭력적이다. 아무리 억누르고 참아도, 어느 순간 준비도 없이 몸 밖으로 튀어 나온다. (...)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 피부를 뚫고 솟는 선혈, 열린 피부 사이로 드러나는 검은 정념의 덩어리들. 이 덩어리들은 바로 해결되지 않은 표상들이다. 그 이야기들을 마음에 잡아두면, 언젠가는 흉측한 괴물로 자라 우리 몸을 점령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정념을 내려놓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검은 덩어리들을 어루만져 풀기 위해서는 그 덩어리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하나씩 살펴야 한다. 뭐가 그렇게 속상하고 힘들었는지 사연을 살피다 보면 어느새 공포스러웠던 모습이 조금 견딜 만해진다. 이 덩어리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삶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 늘 하던 답답한 일을 그만해야 하고, 나를 늘 속상하게 하던 것들이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바로잡을 수 있다. 그것이 치유 아닌가? 변화란 예전의 내가 사라지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과정이다. 예전의 나에게 작별을 고한다는 건 하나의 종말을 대면한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내 콤플렉스의 선물이다. 콤플렉스가 소멸되는 날 나는 온전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pp243-245
##
사람을 만나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건 축복이다. 한 번 만났는데, 또 만나고 싶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나? 그런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그 일이 일어났는데도 나는 그를 내 불멸의 인연으로 만들지 않았다. 내 의지가 그 정도라면, 그런 내게는 브륀힐드가 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 역시 기적 같은 일이다. 그저 좋은 느낌을 넘어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그것이 필멸의 존재가 불멸을 경험하는 순간이 아니던가? 그게 별것 아닌 것으로 지나쳐가게 둔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pp264
##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우리보다 강하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생명체를 꿈꾸어왔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신들보다 신성을 잃은 신, 고통받는 신, 종말을 맞이하는 신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pp276
##
라캉은 일곱 번째 강연집에서 "당신은 당신 내면의 욕망에 따라 행동했습니까?"라고 묻는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욕망 또는 집착을 나쁜 생각으로 간주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언급되는 욕망 개념은 다르마에 해당하는 '신성한 의무'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른 내 고유한 삶의 과제를 뜻한다. 다르마에 대해 다른 사람의 다르마가 아니라 나만의 다르마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미에서 우리는 나만의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 모방과 흉내로는 결코 나만의 신화를 쓸 수 없다.
그런데 모방도 소원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라캉은 그런 소원을 욕망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건 집착에 가까운 것으로, 우리는 가끔씩 그런 소원이 내 욕망이라고 착각한다. 열심히 추구하다 보면 가끔씩 만족감도 느끼지만, 사실 모방, 질투, 경쟁 속에서 무엇인가에 열심히 집착하고 있다면, 그건 궁극적으로 나를 오히려 더 힘들게 하는 악수일 수도 있다. 애초에 내 존재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을 열심히 바라보며 움직이면, 내 존재는 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다.
라캉이 이야기하는 욕망이란 내 고유의 소원을 뜻한다. 어느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나만의 희열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욕망이 있다. 욕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기를 그만둘 때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잘 보이고 더 자주 보이는 게 바로 내 욕망이 안내하는 길이다. 빈 노트를 잔뜩 사다놓고 좋아하고 있다면,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들고 기뻐한다면, 음악이 나올 때 늘 조용해진다면, 축구장 갈 생각에 새벽부터 안달이 났다면 그 아이는 지금 자신의 욕망이 펼쳐질 무대를 기획하는 중이다. 그럴 때는 무조건 아이를 응원해주어야 한다. 그가 창조에 임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행복이나 희열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늘 짐처럼 우리 어깨에 올라탄다. 그것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내가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흰 백지를 까맣게 채워가는 것이 내 욕망의 서사라 할지라도, 매일 한 페이지씩 글을 쓰는 건 놀이라기보다는 노동에 가깝다. 어느 날은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나고, 어느 날은 몸이 아프고, 또 다른 날은 가족이 입원을 하는데, 그런 날들 속에서 백지에 몇 자를 기록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꾸준히 매일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일이 내 다르마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한 권의 책이 탄생한다. pp294-295
##
스승은 우리가 삶의 신성한 의무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들이다. 신성한 의무를 깨닫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마음의 바람들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래야 마음속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게 된다.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 반드시 욕망해야만 하는 것, 반드시 이루어내야만 하는 것을 찾는 것은 괴로운 여정이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괴로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내면의 의무를 깨닫는다. pp316
##
정신분석학에서는 성숙한 사람을 '주체'라고 부른다. 그는 한마디로 든든한 사람이다. 남 안에 갇혀 남의 눈치만 보는 사람을 히스테리적 유형이라 부르고, 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만의 세상에 자신을 가두어버리는 사람을 강박적 유형이라고 부른다면, 주체란 이 두 유형 사이에서 기막히게 균형을 잡고 하루하루의 선택과 결정을 대면해가는 사람을 뜻한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피기도 하고, 자신의 규칙 몇 가지 정도는 다들 가지고 살아간다. 성숙하지 못하다는 건 다른 사람의 욕망에 휘둘린 채 자신이 사라져버리게 방치하거나, 자기만의 규칙이 너무 많아서 아예 관계 자체를 맺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주체는 지나치게 히스테리적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강박적이지도 않은 사람이다. 그는 히스테리와 강박을 조금씩 오가며, 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 (...)
주체는 타인도 자신도 해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득이 되는 행동을 한다. 그는 부모일 수도, 스승일 수도, 배우자일 수도 있으며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다. 그들이 가까이 있으면 우리의 세상이 달라진다. 그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나와 남과 세상을 보살피는 법을 배우게 되며, 세상을 보는 넓고 따듯한 시선을 가지게 되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시작으로 타인과 세상을 믿게 된다. 절망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알게 되며, 내 안의 악마가 고개를 들 때 싸우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가 중요하게 언급하는 개념 중 '양가감정'이라는 단어가 있다.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진다는 뜻이다. 친해지면 그러한 특징이 훨씬 명백히 드러난다. 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하게 되며, 이 갈등은 모든 인간의 과제로 남는다고 말한다. 한 사람을 100퍼센트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 주체는 한 사람을 대할 때 양가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사람이다. 사랑과 미움이 함께 있지만,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우리는 나에 대해서도 유사한 혼란을 느낀다.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땅속 깊이 떨어졌다 하늘로 치솟기도 한다. 주체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평가를 보류한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온전한 나 자신이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 개성과 스타일을 찾고, 그러한 개성화 과정 속에서 다시 남과 손을 잡는 일은 더욱 어렵다. 내 것만 지텨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내 안에 갇히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한탄할 때도 역시 세상과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내가 세상에 기여할 나만의 의무를 아직 찾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주체적인 방향성은 아니다. 온전한 나로서 남과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정신분석학적 주체와 분석심리학적 자기의 방향성이다. 이 여정을 걸어가는 주체는 초자아에 압도되지 않으며, 이드에 휘둘리지 않고, 자아의 중재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 이외에 제4의 중심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 중심은 웬만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자리가 내 신성이 거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pp36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