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촌".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옛 코리아타운의 이름이다. 1894년 조선을 여행했던 이사벨라 비숍은 블라디보스톡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기록을 남긴다. 부두에 이르자 수백 명의 조선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으며 몇 명은 자신의 짐을 들어주려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고.
1853년 블라디보스톡 남쪽 포시예트만에 13가구가 이주한 이래 1890년대에는 2만 5천 명의 조선인이 블라디보스톡에 살고 있었다. 조선인은 짐꾼 노동자로 일하거나 농산물 유통을 담당했고, 농업 이민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밀림을 개발하고 철도를 부설하는데 조선 노동자들을 이용했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뒤에는 수가 급격히 늘어나 1926년에는 19만 명에 달했다 한다.
이들은 백여 세대 중심으로 정착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터를 잡으면 동포들끼리 모여 살았고 자기네 관습을 유지했다고. 이후 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되며 극동에 러시아인들이 몰려들자 러시아는 조선 이주민을 교외로 몰아내는 정책을 편다. 당시 창궐하던 페스트의 위험을 이유로 조선인들은 항구 인근에 있던 초기 정착지(개척리)에서 밀려나 교외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게 된다. 그것이 '신한촌'이다.
이사벨라 비숍의 글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더 있다. 조선 땅에 있는 남자들의 인상이 초라하고 게으르고 비굴했던 데 반해, 블라디보스톡의 조선인 남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씩씩하고 활기차고 당당했으며, 조선에서 보았던 풀 죽은 기색이 싹 사라졌다는 거다. 신분제의 영향도 벗어났고 러시아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만큼 사유재산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조선에서 억눌려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찾은 것 같았다. 블라디보스톡은 초기에 한인들에게 일종의 해방구였다.
당시에 신한촌은 교외였나 본데 지금의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톡의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쯤 더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 신한촌에서도 한인들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번성했던 한인촌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이후 러시아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한촌을 찾은 이유는 신한촌 기념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버스에서 내려 구글맵을 키고 골목을 십 분쯤 걸어가자 세 개의 높은 비석이 우뚝 서 있는 작은 공원에 도착했다.
비석 앞에서 먼저 참배를 했다. 제단 앞에 놓인 국화꽃이 사람들 방향으로 놓여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띈다. 이건 일본식이다. 우리 전통은 국화를 비석 쪽 방향으로 놓는 것이다. 소소한 격식이지만 뜻깊은 장소에서 지켜지지 않아 섭섭했다.
세 개의 비석은 남한, 북한, 그리고 재외동포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세 개의 비석'이 신한촌을 굽어보고 있는 모습은 의미심장했다. 갈라진 남과 북이 한마음으로 돌아와 나란히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바로 이곳, 독립운동의 역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선조들이 꺾이지 않는 용기로 척박한 땅을 일구고 새로운 정착촌을 개척했던 날들, 그리고 짐짝처럼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던 그 고통의 시간을 정직하게 응시한다면, 남과 북이 어디로 가야 할 지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기념비 옆에는 작은 가건물이 있었고 기념비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이 너무 초라했는데 새로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 기념비가 있는 공원을 날마다 쓸고 닦으며 관리해온 분이 계셨다. 고려인 3세인 이 베체슬라브씨다. 이분이 중풍으로 몸이 불편해진 이후에도 날마다 공원을 가꾸어오셨다 한다.
내가 신한촌을 찾았을 땐 마침 그분의 부인이 이곳을 대신 지키고 계셨다. 한국말이 어눌하셨지만 몇 마디는 나눌 수 있었다. 극우 계열의 러시아 청년들이 이곳에도 있는 모양으로, 한인의 흔적이 못마땅해 페인트칠을 하고 낙서를 하는 등 테러가 적잖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베체슬라브씨가 공원 문을 열고 잠그며 관리를 해오셨단다. 안타깝게도 며칠 전에 이분이 쓰러져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 위중한 상황에서도 부인께서 남편을 대신해 공원해 나와 계셨다. 다시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그리고 기념관의 남편 사진(노무현 정부 때 한국정부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을 자랑스레 보여주신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를 닮았다고 이야기한단다. 콧수염 때문인지 내가 봐도 외모가 비슷해서 "정말 닮았네요." 하고 말씀드렸다.
참배는 마쳤지만 이런저런 상념으로 쉽게 공원을 떠날 수 없었다. 한 시간 가까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5분 간격으로 패키지 관광객팀이 쉴 새 없이 신한촌 기념비를 찾아온다. 블라디보스톡 관광의 기본 코스인 듯했다. 그냥 와서 설명을 듣고 사진만 찍는 팀도 있었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정식으로 참배하고 묵념하는 팀도 있다. 가이드의 안내가 중요하구나 생각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엿듣고 알았다. 기념비 옆의 안내문에는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로 흩어지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17만명의 한인이 쫓겨났지만, 러시아 정부가 이 문구를 허락하지 않아 "흩어지고"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가이드로부터 들은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이곳을 자기 집처럼 관리해온 이 뱌체슬라브씨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오면 노무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자랑하곤 했나 보다. 그런데 정치 성향이 다른 이들이 이걸 문제 삼았다 한다. 가이드는 이 뱌체슬라브씨는 한국의 정치 구도를 잘 모르며, 그저 청와대 초청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니 너그러이 봐달라는 이야기를 한다.
관광객들이 이 뱌체슬라브씨에게 감사를 표하지는 못할 망정 어쩜 이리 마음이 옹졸할까 나는 많이 놀랐다. 러시아에서 나고 자랐지만 뱌체슬라브씨는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가슴 아픈 역사를 직접 듣고 자랐을 것이다. 고향에 대한 그분들의 그리움을 알기에, 본인 또한 알지 못하는 고국에 대해 그리움을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념공원을 고국인 양 돌보아왔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청와대 초청 한국 방문은 평생의 자부심으로 남았을 테다.
그리움, 특히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부모에 대한, 더 나아가 선조들의 역사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이 지닌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자 숭고한 감정이다. 우리 존재가 그저 칠팔십 년을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는 단일한 개체가 아니라 이 땅과 이웃과 더 큰 공동체 및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앞세대와 뒷세대를 연결하는 생명의 고리이며 우리가 없다면 다음 세대도 없다.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 진실을 잊고 살지만, 고려인 3세 이 뱌체슬라브씨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그리고 이국 땅에서 분투해온 자신과 선조들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날마다 이곳을 가꾸어왔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우리는 갖지 못한 순정으로 우리 삶의 자리를 더 긴 시간의 호흡으로 바라보았지 않을까.
남한, 북한, 재외동포, 세 주체가 나란히 서 있는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은 단지 한인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자리만이 아니었다. 남한, 북한, 외국에 있는 모든 동포들이 함께 나란히 서서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돌아보아야 할 자리였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꿈을 함께 품었고, 그 꿈이 어떻게 갈라지고 흩어졌는지, 그 조각난 시간을 함께 응시하며 함께 할 미래의 방향을 찾는 자리가 신한촌이었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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