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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역사, 인물

100년 전 영국 언론은 조선을 어떻게 봤을까 | 최성락 ㅡ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구한말 조선의 모습

by 릴라~ 2020. 7. 18.

근현대사 관련 1차 사료는 눈에 띌 때마다 보는 편이다. 원전을 직접 볼 때 누군가의 해설로 만들어진 이미지 너머의 실재에 조금은 근접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반 년만에 문을 연 고산도서관에서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저자는 100년 전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조선 관련 기사들을 소개한다. 기사가 많지는 않으며 길이도 짧다. 하지만 그 조각들을 이리저리 모아놓고 보니, 한중일의 시선이 아니라 당대 서구가 조선이란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알게 된다. 그들의 시각이 당연히 모두 옳지는 않지만, 이코노미스트는 주의,주장 없이 일어난 사실 중심으로 건조하게 기사를 쓰는 편이라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당대 현실을 좀 더 객관화해서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었다. 번역된 기사도 어렵지 않고 기사에 대한 저자의 해설도 쉽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편안하게 읽었다.책 서문에서 저자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성일을 소개한다. 일본을 교화시켰다고 실록에서 칭찬 받는 김성일이, 일본측 사료에서는 정세 판단을 하지 않고(당시 일본 관료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 침략을 막고 싶었고 통신사 일행이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다) 조선의 예법만 고집하며 까탈스럽게 구는 인물도 등장한다고 한다. 어느 한 쪽이 진실이고 거짓인가가 아니라, 이 두 사료를 통해서 우리는 사건을 좀 더 전체적인 시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코노미스트의 조선 관련 기사를 훑어보고 그려지는 구한말 조선의 모습은, 생산적인 역할을 전혀 못하는 조선의 낡은 통치 질서가 여전히 백성을 강하게 억누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낡은 제도가 시효를 다했으면 사회에 영향력을 못 미치면 될 텐데, 여전히 백성들을 강하게 구속하고 있었다. 예컨대, 당시 조선의 최대 수입품은 겨울의 추위를 막아줄 면제품이었다. 수입면은 전량 영국 멘체스터에서 생산된 것으로 인도를 거쳐서 조선에 수입되었다. 이 중계무역을 맡은 이는 일본과 청나라 상인들인데 이들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보통 무역 초기 몇 년엔 외국 중개상들이 이익을 보다가, 곧 현지인들도 이 중계무역의 루트를 파악하여(이는 고급 정보가 아니다) 동참하게 되는데, 조선에서는 일본, 청나라 상인들이 30년간 독점했다. 이유는, 조선인은 나라의 허락 없이 외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제 정세를 보는 시야 자체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무능하고 부패한 관료 뿐 아니라 매천 황현 같은 출중한 인사들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약소국의 생존전략인 강대국 사이의 균형 외교는 불가능했으며, 개항 이후 벌어진 수많은 일들을 지시한 사람은 청나라 정치가 이홍장이었다. 그는 조선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나 그 또한 국제정치를 보는 시각이 많은 부분 결여되어 있었다. 어쩌면 병자호란 이후 외교권을 빼앗길 때무터, 스스로 세상과 상대하지 않을 때부터 조선의 몰락은 예고된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외국인들이 하나같이 똑같이 하는 말, 조선의 관료는 부패해도 너무 부패했다고. 그런 체제로 새 시대를 열어갈, 개혁의 역량은 전무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선은 망할 만해서 망한 나라였다. 그리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짊어진 것은 민중들이었다.

독립운동사도 중요하지만, 조선이 쓰러져간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 또한 미래에 대한 가장 훌륭한 경고가 될 것이다. '일본은 나쁘다' 식의 감정적 대응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본을 뛰어넘겠다는 의지, 만약 앞으로 한 번 더 쳐들어오면 우리도 본토를 공격하겠다 정도의 깜냥은 있어야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이 서로 전쟁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서로의 전력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기에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상대는 누구도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

물론, 우리의 국력이 우세하여 어떤 나라든 아예 침입할 생각을 못하는 것이 최선이다. 국제관계에서 '평화'는 철저히 힘에 의해 유지된다. 이 책은 나라가 어떻게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어, 평화를 지킬 모든 동력을 상실하는지를 암시하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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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사건으로 유명한 오페르트의 조선에 대한 평가)

조선 사람들의 우수한 자질과 온화한 인성을 감안한다면 내 소견으로는 만약 양국의 국민성을 비교할 경우에 결국 조선 사람들의 손을 들어줘야 마땅하다.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도 집들은 늘 열려 있고 문에는 자물쇠조차 채워져 있지 않으며 절도는 신뢰를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웃나라들보다도 훨씬 엄한 처벌을 받는다. 

국민들을 고무시켜 자원을 개발하려는 추진력이 결핍된 조선 정부의 무관심 탓에 조선의 가장 우수하고 풍부한 자원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결코 창의성이나 기량이 부족하지 않으며 능숙한 중국과 일본의 기술자들처럼 되기 위해서는 단지 약간의 교육과 격려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억압적 정체 체제의 통치를 겪고 인접 국가들과의 교육이 전면적으로 단절되면서 조선에서 산업 정신이 무너진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p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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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이 한국인들을 자극해서 타이완 병합 때처럼 저항을 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이뤄진 일제의 가혹한 군국주의 통치는 원래부터 거친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 은자의 나라의 국민에게서 반항할 만한 기질과 여력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p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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