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 황국신민으로서 조선말은 무엇 때문에 연구하며, 조선글은 무엇 때문에 연구하느냐? 철자법은 통일해서 무엇을 하며, 표준어는 사정하여 무엇에 쓰자는 것이냐? 한글 잡지는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내며, 조선말 사전은 무슨 필요로 만들자는 것이냐? 한글날은 무슨 뜻으로 기념하며, 한글 노래는 무슨 의도로 지어냈느냐? 여름마다 각지로 다니면서 한글 강습은 왜 하는 것이며, 틈틈이 기회만 있으면 학술 강연을 ㄹ빙자 삼아 눈가림의 집회는 왜 자꾸 하려 하느냐? 신문 잡지에 이러이러한 글은 무슨 의도에서 써냈으며, 사전 원고에 이러이러한 문구는 고의적인 민족사상의 고취가 아니냐?" -- 일제 고문경찰의 취조, 책에서
우연히 책광고를 보고 북펀드에 참여한 책.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조선말 큰사전 편찬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내가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것을 전체적으로 엮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사료마다 일화가 조금씩 다르게 소개된 경우를 보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구한말의 선각자 주시경 선생이 시작한 한글 연구에서부터 그의 뜻을 이어받은 학자들의 혼신이 깃든 사전 편찬 노력, 해방 후 한글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를 조목조목 알차게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한글'이야말로 그 시대의 빛이고 등불이고 희망이란 것을 실감했다. 한글이 창제되고도 수백 년간 지식인들은 말과 글이 분리된 생활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제대로 된 주석도 없던 시절에 한문으로 무슨 학문이, 사상이 가능했겠나 싶다. 다양한 자료를 참고할 수 있는 요즘도 한문 고전의 번역을 두고 많은 이견이 있는데 말이다. 대다수 양반들은 그저 글자나 꿰맞출 뿐이지, 한문으로 사상이나 학문이 가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글'로 스러져가는 나라와 문화를 일으켜세우려 했던 주시경 선생, 그 유업을 평생 실천했던 제자들. 그분들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한글 연구와 정리가 이루어진다. 주시경 선생은 서른아홉이란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시지만 이극로, 최현배 선생 등 스승의 유업을 평생에 걸쳐 실천한 제자들이 있었다. 주시경 선생이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다. 선생은 그냥 떠나신 게 아니라 많은 씨앗을 뿌리고 가신 거다. 그분들에게 한글은 희망 그 자체이고 신앙이었다. 시대를 이기고 역사를 바꾸고 새나라를 창조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 한글이었다. 세종의 꿈이 450년이 지나서 비로소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세종의 위대한 정신 대신에 성리학을 택한 조선의 수백 년에 걸친 어리석음과, 한글이 가져올 빛을 알아차리고 그 과업에 모든 것을 걸었던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의 열정을 곱씹게 되었다. 조선어학회가 주축이 된 한글 연구와 사전 편찬은 그 어떤 독립운동보다 더 가치가 있는 운동인데 아직 충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분들 덕택에 우리는 해방 후에 우리말 사전을 가질 수 있었고, '한글'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주위를 돌아보면 한심한 경우가 널렸다. 언론 매체에서부터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보편화된 듯하다. 코로나 팬데믹이 뭐냐. 걍 코로나 대유행이라 하면 될 것을. 문화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는 중국은 컴퓨터, 핫도그 등도 영어 그대로 쓰지 않고 중국말로 바꾸어 쓴다고 한다. 세종의 정신, 조선의 글자를 만든 그 드높은 문화적 자부심과 주체성을 우리 정신의 뿌리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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