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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노년의 친구

by 릴라~ 2020. 8. 29.


저녁 6시, 아직 환하다. 무더위도 조금 가라앉아 걸을 만했다. 내가 여름이 좋은 이유는 저녁 시간이 환해서다. 집에서 엄마밭까지 오랜만에 걸어갔다. 매호천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면 아파트 단지 바로 뒤로 그린벨트가 나온다. 

아빠가 은퇴 후 소일거리 하시려고 장만해둔 밭이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짐덩어리가 되었다. 두 분이 집 가까이에서 땅을 밟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려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은퇴 계획은 완벽했는데 당사자가 사라짐ㅠㅠ). 아빠 돌아가신 충격에 엄마 혼자 이 밭을 가꾸는 재미가 있을 리 없다. 400평이라 품이 적지 않게 든다. 농지는 최소 8년을 소유해야 세금 충격 없이 처분할 수 있어 아직 몇 년 남았다. 

 

엄마는 처음엔 여기 올 때마다 많이 울었다 한다. 이 밭을 물려준, 이젠 계시지 않는 아빠를 비난하면서, 그렇다고 팔 수는 없고, 그래서 쉽게 농사 지으려고 과일 나무를 좍 심었다. 풀 뽑기 안 하려고 바닥엔 부직포를 좍 깔았다. 엄마는 이제 일흔을 넘어가시는데, 그나마 그때가 60대여서 나무도 심고 했다고 하신다. 요새 같으면 어깨 아프고 힘 없어서 못 할 것 같다고. 

 

그런 엄마한테 구세주처럼 나타나신 분이, 엄마 친구, 순조 아줌마다. 정확히는 할머니지만 아직 내겐 아줌마로 다가오는 분이다. 친구, 그것도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다가 각자 결혼 후 다른 동네 떨어져 살다가 늘그막에 이렇게 같은 동네서 또 만났다. 

 

오늘도 밭에 가니 엄마와 순조 아줌마, 두 분이 같이 계신다. 순조 아줌마는 얼마나 밭일에 열심이신지 밭주인이 우리 엄마가 아니라 순조 아줌마 같다. 엄마 없을 때도 혼자 나와서 씨도 뿌리고 물도 주고 하신다. 이분도 나이 드시면서 낡은 주택을 처분하고 근처 아파트로 이사오신 터라 땅이 그리우셨던 게다. 엄마한테 말동무가 있어서 좋고, 엄마 일이 덜 힘들어서 좋고, 이래저래 요즘 내겐 가장 고마운 분이다.

 

나만 해도 일이 바빠 이렇게 얼굴만 가끔 들여다볼 뿐 농사일을 전혀 못 거든다. 할 줄도 모르고. 우리집 아들들은 서울 유학 이후 그곳에 정착했다. 자주 내려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래서 노년엔 친구가 꼭 필요하다. 자식은 한창 일할 나이라 바쁘고, 배우자도 건강 문제로 함께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친구가 곁에 있어준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같은 동네 살면서 가깝게 볼 수 있는 친구라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파트화로 이웃이 없어진 지 오래라 가까이 사는 친구만이 삶의 마지막 동행이 되어줄 수 있는 것 같다. 

 

해질녘, 천변을 따라 이 두 분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따스하면서도 조금 애잔하다. 인생의 뒤안길,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노인의 삶이어서다. 나는 이분들의 씩씩한 중년을 생생히 기억하는데,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지는 해처럼 천천히 걸어가신다. 내게도 언젠가 이런 시간이 다가올 텐데, 잘 내려가는 법을 익혀야 할 것 같다. 그때는 내게도 같이 내리막길을 걸어갈 친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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