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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엄마의 라면

by 릴라~ 2020. 9. 6.

 

태풍 마이삭 가자마자 또 하이난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는 일요일. 도시의 나는 별 걱정이 없지만 화순에 계신 D의 어머니는 벼가 알곡이 차서 무거워서 바람 불면 다 넘어지는데, 하며 걱정이시다. 태풍은 내일 아침에 부산 인근 동해에 상륙해서 내일 밤이면 북한 청진 쯤에 도착해 소멸한다고 한다. 대구는 내일 모든 학생이 원격수업이다. 

 

산책 좀 하고 책 좀 들춰보고 하니 하루가 다 갔다. 집에 있는 감자를 빨리 먹어야 해서 저녁으로 백종원 유투브를 보고 간단히 감자스프를 시도해서 먹고(양송이까지 넣어서 완전 맛있음), 이것저것 정리하니 8시. 벌써 어두컴컴하다. 그새 날이 많이 짧아졌다. 19층 우리집은 앞이 확 트여서 밤하늘 풍경이 그대로 전해진다. 여름 같으면 밤 10시 같은 깜깜한 분위기다. 날씨도 썰렁하고 마음도 조금 그랬다. 엄마도 문득 마음이 쓰였다. 낮에 포도 갖다 주신다고 잠깐 뵙긴 했는데, 날씨가 안 좋아서 오후 내내 집에 계셨을 건데, 혼자 우울해하시진 않을까. 

 

슬리퍼를 끌고 근처 엄마집 도착. 아파트 비번을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김여사께서는 거실에서 TV를 보며 라면을 아주 맛나게 드시고 계신다. 아니, 아까 낮에는 콜레스테롤이 높다느니, 전날밤에 삼겹살이 갑자기 땡겨서 구워먹어서 오늘 아침 혈압이 높다느니, 그래서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어야겠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으시더니 밤 8시 넘은 이 시각에 라면이라니. 

 

엄마 혼자 청승 떨고 계실까 걱정했던 건 나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김여사는 요만큼도 센티멘털한 구석이 없이, 라면을 후후 불며 명랑하게 TV를 보고 계셨다. 라면 속엔 잘 익은 달걀 하나가 귀엽게 담겨 있다. 그 모습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엄마도 나이 들면서 뜬금없이 짜증을 낸다거나, 기분이 오락가락 하실 때가 꽤 있다. 그럴 때면 나도 같이 마음 무거워지면서(감정은 바로 전염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까지 아주 무겁게 가라앉을 때가 있다. 오늘의 밝음이 그간의 걱정을 다 날려주었다.

 

우리 엄마도 혼자 사는 것이 평생에 처음일 텐데, 이렇게 밥도 잘 챙겨드시고, 집도 이렇게 깨끗하게 잘 관리하시고, 몸은 어깨를 비롯 여기저기 탈 난 데가 많지만, 정신은 나무랄 데 없이 짱짱하시고. 오늘 같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지금부터 딱 십 년만 이 정도를 유지해주시면 좋겠다. 혼자 자유롭게 거동할 수 있는 시간이 더 길면 물론 좋겠지만, 그 이상은 하늘에 달린 일이고. 

 

일요일밤, 엄마의 라면 덕분에 월요병이 간데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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