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1월 1일 저녁, 이 책을 펼쳐둔 이유는 빌려놓은 새 책이 이것 뿐이어서였어요. 학교도서관에서 약 한 달쯤 전에 빌렸는데 그때는 두 꼭지를 읽고는 큰 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었습니다. 내용이 너무 무거워서 단숨에 읽어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책상 위에 한 달간 놓여 있다가 다시 집어든 책입니다.
저자는 특별한 종류의 청소 서비스를 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홀로 자살하고 뒤늦게 발견되어 방치된 집을 그 모든 냄새와 흔적을 지우고 새집처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인데요. 그래서 저자는 우리 사회의 가장 그늘진 삶의 마지막 흔적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닥의 핏자국을 지우고 벽을 닦고 온갖 물건을 치우며 가족보다 더 세세히 죽은 이의 삶의 마지막 조각들을 보게 되죠. 읽는 내내 삶이 이렇게 고독하고 쓸쓸하고 아픈 것인가, 거듭 묻게 됩니다.
우리 사회의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고독과 고립과 소외도 그 이상으로 증가했지요. 하지만 누군가가 홀로 죽어가고 방치되었다가 뒤늦게 발견되는 과정은 고독과 소외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어쩌면 전쟁보다 더 처참하고 외로운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살다가 사라졌지만 저자는 유품을 통해 그들 삶의 마지막을 유추해서 들려줍니다. 전기 공급이 중단된 날에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죽기 직전에 분리 수거까지 철저히 할 만큼 착한 이도 있고, 명품 박스나 그 반대로 쓰레기로 가득찬 방도 있습니다. 저마다 사연은 다양하지만 한두 개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든 죽음은 한 가지 공통된 결말을 가리킵니다. 생물학적 죽음 이전에 그들은 주변이나 사회로부터, 혹은 자신으로부터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오랜 시간 죽음에 내몰려 있었고 자살은 하나의 귀결일 뿐입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고 고귀한 것이며, 더 버틸 수 없는 막다른 곳에 내몰렸을 때 인간은 삶을 중단합니다. 막다른 곳이란 경제적인 위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와 동반되는 고독, 고립, 정신적인 황폐함이 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인간답게 살 수 없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죽음은 역설적으로 삶의 존귀함을 말해줍니다. 책장을 힘겹게 넘긴 끝에 마주하게 되는 최종적인 진실입니다.
결국 이 익명의 죽음을 통해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살아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잘나지 않아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고 뭘 하든 다 괜찮습니다. 타인을 해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 이 잠깐의 생을 영위할 자격이 있습니다. 삶은 살아보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을 ‘챙기는’ 능력을 더 계발해야 합니다. 사회적 성공과 직결되는 능력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연결하고, 홀로 있는 사람을 챙기고 서로를 보살피는 능력이 더욱 강조되어야 합니다.
우리 누구나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죽음이라는 폭력, 그 짙은 어둠을 이기는 힘은 “소유”가 아니라 “생명으로 가득한 삶”입니다. 결국 ‘사랑’이지요. 사랑으로 연결되고 사랑의 기억으로 생을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두려움 없이 자연 혹은 신의 손길에 맡기는 것이겠지요.
이 책을 읽고나니 에리히 프롬의 책을 다시 보고 싶네요.
책 이야기/에세이
죽은 자의 집 청소 | 김완 — 이보다 더 쓸쓸하고 아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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